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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를 믿어서 정말 다행이야”연기법으로 논파된 영원주의와 허무주의

담마다사 이병욱 2015. 1. 30. 09:05

 

 

불교를 믿어서 정말 다행이야연기법으로 논파된 영원주의와 허무주의

 

 

우리불자들은 부처님의 가르침이 얼마나 위대한지에 대하여 잘 모르는 것 같습니다. 절에 십년, 이십년, 삼십년, 심지어 평생을 다녀도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하여 정확하게 알지 못한다면 불자라 할 수 없을 것입니다.

 

부처님 그분을 제대로 알지 못할 때 단지 기도의 대상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또 타종교인들의 공격적인 선교에 쉽게 넘어 갈 것입니다. 그러나 부처님 그분을 제대로 안다면 소원을 들어 주는 기도의 대상이 아니라 스승으로 받아 들이게 될 것입니다. 또 그분 부처님의 가르침을 제대로 안다면 불교를 믿어서 정말 다행이야라는 말이 나올 것입니다.

초기경전을 접하면서 그 동안 궁금하였던 것, 의문을 가졌던 것이 명쾌 하게 풀립니다. 그 중에 영원주의와 허무주의가 있습니다.

 

사람들은 영원주의 아니면 허무주의적 견해를 가지고 있습니다. 영원주의는 죽으면 하늘나라에서 영원히 산다는 상주론을 말하고, 허무주의는 죽으면 아무것도 남는 것이 없다는 단멸론을 뜻합니다.

 

그런데 부처님은 이와 같은 양극단이 모순이고, 거짓이고, 위선임을 밝혀 내었습니다. 대표적으로 상윳따니까야에 실려 있는 깟짜야나곳따의 경(S12.15)를 들 수 있습니다.

 

경에서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 하셨습니다.

 

 

[세존]

“깟짜야나여, 참으로 올바른 지혜로써 있는 그대로 세상의 발생을 관찰하는 자에게는 세상에 비존재라는 것은 사라진다. 깟짜야나여, 참으로 올바른 지혜로써 있는 그대로 세상의 소멸을 관찰하는 자에게는 세상에 존재라는 것은 사라진다. (S12.15)

 

 

 

Buddha

 

 

이 두 개의 구절은 매우 유명합니다. 연기법의 진수를 보여주는 이 경은 성철스님이 중도를 설한 백일법문에서 가전연경으로도 소개한 바 있습니다. 무엇 보다 이 경이 유명한 것은 부처님이 연기법으로 영원주의와 허무주의를 논파하였는 사실입니다. 또한 이경은 불교가 성립되는 근거가 될 수 있는 경이라 봅니다. 왜 그럴까요? 조건발생과 조건소멸로 설명되는 연기법에 따라 열반이 실현 될 수 있기 때문 입니다.

 

연기법은 ‘원인(hetu)’과 ‘조건(paticca)’과 ‘결과(phala)’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이를 ‘인연과’라 합니다. 이와 같이 조건발생과 조건소멸로 설명되는 연기법에 따라 열반이 실현 될 수 있어서 불교가 다른 종교와 확연하게 차이가 납니다.

 

종교다원주의자들이 늘 하는 말이 있습니다. 산에 오르는 길은 여럿 이지만 결국 정상에서 만난다는 소위 정상론입니다. 이는 다름 아닌 진리는 하나라고 말을 설명하기 위해서입니다. 하지만 그들의 입장에서 바라 본 것입니다. 특히 기독교적 입장에서 바라 본 것입니다.

 

다원주의자들은 존재의 근원이나 궁극적 실재를 가정합니다. 이런 범주에 브라만교의 브라흐마, 힌두교의 창조신은 물론 대승불교의 바이로차나, 심지어 선종의 진아(참나)와 불성까지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다원주의자들이 포함하지 않은 것이 단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열반입니다. 왜 그럴까요? 그것은 불교가 브라만교를 비판하고 성립하였기 때문입니다.

 

정상론은 부처님의 가르침과는 맞지 않습니다. 연기법에 따르면 정상론은 성립하지 않습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이 진리입니다. 나머지는 모두 삿된 견해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는 다음과 같이 설명 할 수 있습니다. 먼저 허무주의 타파입니다.

 

 

1)허무주의 논파

 

단멸(uccheda)은 소멸(niroda)이 아니라 ‘멸절(cut off)’을 뜻합니다. 따라서 “몸이 파괴되어 죽으면 아무것도 남는 것이 없다”라는 허무주의(nihilationism)적 견해는 단멸론(斷滅論)’입니다.

 

단멸론은 연기의 순관에 따라 논파됩니다. 연기의 순관은 조건발생입니다. 예를 들어 십이연기에서 “의식을 조건으로 명색이 생겨난다”라는 정형구가 있습니다. 이는 의식을 조건으로 명색이 생겨남을 뜻합니다. 이는 “이것이 생겨남으로써 저것이 생겨난다 (若生此卽生彼)”라는 연기법에 따른 것입니다.

 

어느 누구도 신체적으로 언어적으로 정신적으로 지은 행위가 남아 있는 한 결코 단멸할 수 없습니다. 뒤이어 조건에 따라 발생하는 사실(dhamma)’이 있기 때문에 단멸론은 거짓이 됩니다.

 

청정한 삶을 살아 번뇌 다한 아라한이 되지 않는 한 누구도 재생되는 것으로 부터 벗어날 수 없습니다. 더 이상 재생의 원인이 되는 업을 짓지 않는 한 그 어느 존재도 단멸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죽으면 아무 것도 남는 것이 없다라고 자살을 한다면 그 자살한 과보로 인하여 다음 생이 시작 됩니다.

 

결코 단멸하지 않습니다. 조건에 따라 발생되는 사실이 있기 때문에 죽으면 아무것도 남는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허무주의적 견해는 모순과 위선과 거짓이 됩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참으로 올바른 지혜로써 있는 그대로 세상의 발생을 관찰하는 자에게는 세상에 비존재라는 것은 사라진다. (S12.15)”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절대부(絶對無)’는 절대로 성립할 수 없음을 말합니다.

 

이처럼 뒤이어 발생하는 사실(dhamma)’을 관찰함으로써 죽으면 모든 것이 끝난다는 허무주의가 논파됩니다.

 

 

2) 영원주의 논파

 

죽어서 영원히 산다는 영원주의적 견해는 상주론(常住論)’입니다. 전세계 대부분의 종교가 이러한 견해를 가지고 있습니다. 대승불교에서 극락도 이런 견해 중의 하나입니다.

 

영원주의는 연기의 역관에 따라 논파됩니다. 연기의 역관은 조건소멸입니다. 예를 들어 십이연기에서 의식이 소멸하면 명색이 소멸한다라는 정형구가 있습니다. 이는 약무차즉무피((若無此卽無彼), 이것이 없을 때 저것이 없어진다는 연기법에 따른 것입니다.

 

의식이 소멸하면 명색, 즉 현생의 몸과 마음이 재생되지 않습니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요? 현재의 몸과 마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현생의 나와 다른 존재가 재생합니다. 동일인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다만 현생에서 신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언어적으로 지은 행위에 따른 과보의 몸과 마음으로 태어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현생의 나와 동일인이 아닌 것입니다. 그럼에도 영원주의자들은 현생의 나가 그대로 환생하는 것이라 말합니다.

 

어느 누구도 죽어서 영원히 살 수 없습니다. 뒤이어 조건에 따라 소멸하는 사실이 있기 때문에 영원주의는 거짓이 됩니다. 그럼에도 전세계의 대부분의 종교에서는 천국에 태어나 영원히 산다고 말합니다. 또 원인 없이 스스로 존재하는다는 창조주자재신이 있다고 합니다.

 

하지만 연기법에 따라 뒤이어 사라지지는 사실(dhamma)을 관찰하면 영원주의적 견해는 모순이고 위선이고 거짓이 됩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참으로 올바른 지혜로써 있는 그대로 세상의 소멸을 관찰하는 자에게는 세상에 존재라는 것은 사라진다. (S12.15)”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절대유(絶對有)’는 절대로 성립할 수 없음을 말합니다.

 

이처럼 뒤이어 소멸되는 사실(dhamma)’을 관찰함으로써 자아와 세상은 영원하다는 영원주의가 논파 됩니다.

 

 

경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1)세상의 발생을 관찰하는 자에게는 세상에 비존재라는 것은 사라진다.

(조건발생에 따라 허무주의 논파)

 

2) 세상의 소멸을 관찰하는 자에게는 세상에 존재라는 것은 사라진다.

(조건소멸에 따라 영원주의 논파)

 

 

있는 그대로의 발생과 소멸이야말로 조건적 발생이라고 하는 연기의 본질이라고 할 때, () 또는 무()라고 하는 개념은 관찰 할 수 없는 것으로 극단적인 견해이며 형이상학적 가정입니다. 이러한 형이상학의 토대가 있기 때문에 우파니샤드적 범아일여의 영원주의와 사후의 존재를 부정하고 무로 귀속시키는 단멸론적 허무주의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부처님은 이와 같은 영원주의와 허무주의 양극단을 연기법으로 부수었습니다.

 

 

2015-01-30

진흙속의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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