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 떠나는 여행

세월타령과 세월법문

담마다사 이병욱 2015. 2. 4. 07:55

 

 

세월타령과 세월법문

 

 

 

불교가 종교이지만 절에는 다니고 있지는 않습니다. 주변에 다닐만한 절도 없을 뿐만 아니라 설령 절에 간다고 해도 들을 것도 없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말하면 누군가는 , 불자 맞어?” 라고 할지 모릅니다.

 

한국불교에서는 법문이 없습니다. 일요법회 등에서 교리나 법문 등으로 교화 하는 경우는 극히 드뭅니다. 대부분 기도 위주이지요. 그래서 스님들이 늘 하는 말은 열심하 기도하세요라는 말 입니다.

 

기도를 하지 않습니다. 기도라는 것이 절대자나 초월적 존재에게 자신의 소원을 들어 달라고 요청 하는 것으로 비추어지기 때문 입니다. 이렇게 본다면 불량신도임에 틀림 없습니다.

 

절에 다니지도 않고 기도도 하지 않습니다. 홀로 공부하고 있습니다. 주로 경전을 공부하고 있습니다. 그것도 초기경전입니다. 그래서 빠알리 니까야라 불리는 초기경전을 모두 갖추어 놓았습니다. 모아놓으니 책장으로 가득합니다. 금액적으로 따졌을 때 백만원 가량 들어 갔습니다.

 

 

 

 

 

 

초기경전이 스승입니다. 경전이 바로 부처님입니다. 불상을 따로 모시지 않지만 경전은 사실상 불상과도 같습니다.

 

매일 경전을 열어 봅니다. 매일 부처님을 만납니다. 그리고 매일 가르침을 접합니다. 한국의 불교현실에서 매일 이보(二寶)’를 귀의처, 의지처, 피난처로 하여 살아가고 있습니다.

 

매일 부처님(Buddha)과 가르침(Dhamma)을 접합니다. 그럴 때 마다 글을 씁니다. 그래서 매일 글을 생산해 냅니다. 그런 생활이 벌써 9년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글을 써도 질리지 않는다는 사실 입니다. 경전을 근거로 하는 글쓰기 때문입니다.

 

가르침을 접하면 늘 새롭습니다. 가슴을 울리는 감동적인 문구가 많아 늘 되새기고자 합니다. 그러나 볼 때 뿐이었습니다. 그래서 꽁꽁 묶어 두고자 경을 외기도 합니다.

 

이제까지 외운 경은 많습니다. 초기경전을 접하기 전에는 금강경, 천수경 등 대승경전을 외웠습니다. 물론 한문 경전 입니다. 초기경전을 접하고 나서 부터는  빠알리어 원음으로 외웠습니다. 보배경(Ratana Sutta), 자애경(Metta Sutta), 축복경(Mangala Sutta), 길상승리게(Jaya-Mangala Gatha), 초전법륜경(Dhammacakkappavattana Sutta), 법구경(Dhammapada) 1품과 2품 등 입니다. 이렇게 빠알리어로 외우다 보니 빠알리구문이 매우 익숙해졌습니다.

 

경을 많이 외웠다고 하여 머리가 좋은 것은 아닙니다. 누구나 외는 머리만 있으면 가능 합니다. 다만 이 빠알리어로 부처님이 말씀 하셨구나!”라 생각하며 외웠을 때 훨씬 더 가까이 다가감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기쁨으로 외웠습니다.

 

한국불교에는 들을만한 법문이 별로 없습니다. 매일 글을 생산하는 입장에서 지난 수 년간 불교tv나 불교방송 등 여러 사이트를 지켜 보아 왔지만, 불자들의 가슴을 울릴만한 감동적인 법문을 그다지 많이 보지 못 하였습니다. 이유가 무엇일까요? 아마 법사님들이 경전공부를 제대로 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라 봅니다.

 

지난 수 년간 매일 초기경전을 접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매일 글을 생산해내고 있습니다. 그럴 때 마다 늘 생각하는 것은 초기경전이야말로 법문의 보고와도 같다는 것 입니다.

 

흔히 부처님의 말씀 하신 가르침에 대하여 팔만사천법문이라 합니다. 만일 법사가 신도들을 대상으로 법문한다면 아마 평생 해도 남을 내용 입니다. 이렇게 본다면 가독교 목사들에 비해 매우 행복한 케이스라 봅니다.

 

기독교 목사들은 거의 매일 설교 하다시피 합니다. 그럴 때마 머리를 싸매고 공부한다고 합니다. 바이블에 나와 있는 몇 줄을 위하여 이런 책 저런 책 뒤져서 설교할 분량의 원고를 만든다고 합니다. 이렇게 매일 공부하다 보니 목사들은 신도들을 위하여 감동적인 설교를 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한국불교에서는 스님들이 법문을 거의 하지 않습니다. 설령 들어 보아도 감동을 주지 않습니다. 자신의 신상에 대한 이야기나 세상돌아 가는 이야기가 대부분이어서 들어도 별로 남는 것이 없습니다. 시간이 돈인 시대에 바쁘게 살아 가는 현대인들에게 시간낭비라는 인식을 준다면 점점 절에 가지 않게 되겠지요.

 

불교에는 팔만사천법문이 이미 있습니다. 이 팔만사천법문만 활용해도 불자들의가슴을 울리는 훌륭한 법문을 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세월에 대한 법문을 할 때 초기경전에서 세월에 관한 법문자료를 찾아 보면 됩니다. 법구경에 이런 게송이 있습니다.

 

 

오로지 꽃들을 따는데

사람이 마음을 빼앗기면,

욕망이 채워지기 전에

악마가 그를 지배한다.” (Dhp48)

 

 

이 게송은 감각적 쾌락에 대한 욕망에 빠져 드는 것을 경계하는 말입니다. 지금 여기에서 일어나는 사실을 보지 못하고 욕망에 이끌려 다닐 때 죽음이 바로 코 앞에 다가가와 있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요? 인간의 목숨은 짧기 때문에 방일하지 말고 열심히 정진하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법구경에는 반드시 해당 게송에 대한 인연담이 있습니다. 마치 법문하기 좋으라고 일부로 만들어 놓은 것 같습니다. 이 게송에 대한 인연담을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법구경인연담)

 

이 시가 설해진 데는 이와 같은 인연담이 있다: DhpA.I.363-366에 따르면, 부처님께서 싸밧티 시에 계실 때, 빠띠뿌지까와 관련된 이야기(Patipujikavatthu)이다.

 

한때 서른 셋 신들의 하늘나라에 말라바린(Malabhalin)이라는 하늘아들이 천명의 선녀들에게 둘러싸여 정원에 들어갔다. 오백 명의 선녀들이 꽃을 따서 던지면 오백명의 선녀들이 꽃을 주어 하늘아들을 치장했다. 그런데 한 선녀가 나뭇가지에서 떨어져 몸이 등불처럼 꺼져서, 싸밧티 시의 한 고귀한 가문에 태어났다. 그리고는 그녀는 태어나면서부터 전생을 기억했고. ‘하늘아들 말라바린의 아내이다.’라고 회상하며, 자라서는 꽃공양과 향공양을 하면서 전 남편의 곁에 다시 태어나기를 기원했다. 그래서 그녀의 남편을 공경하는 자라는 의미에서 빠띠뿌지까(Patipujika)라고 지었다.

 

그녀는 열여섯에 다른 가문에 시집을 갔다. 그리고 그녀는 수행승들에게 식권으로 먹는 음식과 보름의 음식과 우기의 음식을 공양하며 천상의 남편과 만나길 발원했다. 그러면서 그녀는 열달 후에 한 아들을 낳았고 그 아들이 걸을만하자 두 번째 아들을 낳았고 그 아들이 걸을만하자 또 다른 아들을 낳고 해서 어느덧 네 아들을 낳았다. 어느날 그녀는 공양을 올리고 공덕을 수행승들에게 회향하고 가르침을 듣고 계행을 지키고는 그날 저녁에 갑자기 질병으로 죽어서 다시 천상계에 화생했다.

 

천상계에서는 여전히 선녀들이 말라바린에게 꽃을 장식하고 있었다. 하늘아들 말라바린이 ‘오늘 아침부터 당신이 안보이던데, 어디 갔다 왔소?’라고 물었다. ‘여보, 저는 죽었습니다.’ ‘무슨 소리요?’ ‘주인님, 사실입니다.’ ‘어디서 태어났소?’ ‘싸밧티 시의 한가문에 태어났습니다.  ‘얼마나 그곳에서 오랫동안 지냈습니까?’ ‘주인님, 열달만에 저는 어머니의 태에서 나와 열여섯 살에 다른 가문에 시집가서 네 아들을 낳아 기르며, 수행승들에게 공양을 올리고 시중을 들며 다시 돌아오기를 서원하여 당신 곁에 온 것입니다.’ ‘인간의 수명은 얼마나 됩니까?’ ‘주인님, 백년입니다.’ ‘그렇게 짧습니까?’ ‘주인님, 그렇습니다.’ ‘인간들이 그렇게 짧은 시간 태어나서 산다면, 시간을 빈둥거리며 방일하게 보냅니까?’ ‘주인님, 무슨 말씀을 하십니까? 인간들은 늙음과 죽음이 없이 무수한 세월을 사는 것처럼 방일합니다.

 

그러자 말라바린은 크게 동요하며, ‘당신이 말한 대로 인간들이 태어나 겨우 백년을 사는데,(인간의 백년은 서른 셋 신들의 하늘나라의 하루 밤낮에 해당한다. 신들의 수명은 천상년으로 천년이고, 인간년으로 환산하면, 3 6백만년에 해당한다) 빈둥거리며 방일하게 보낸다면, 언제 그들이 괴로움에서 벗어나겠습니까?

 

한편 지상에서 다음날 수행승들은 이 사실을 부처님께 알렸다. 부처님께서는 천상계의 일을 수행승들에게 설명하고 ‘이 세상의 모든 뭇삶의 목숨은 짧다. 그 감각적 쾌락의 욕망이 채워지기도 전에 죽는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이어서 시로써 ‘오로지 꽃들을 따는데, 사람의 마음이 빼앗기면, 욕망이 채워지기 전에 악마가 그를 지배한다.’라고 가르쳤다. 이 가르침이 끝나자 많은 사람들이 흐름에 든 경지 등을 성취했다.

 

(법구경 48번 게송 인연담)

 

 

인연담에 따르면 천상의 하루가 인간의 일생에 해당됩니다. 천상에 사는 존재의 입장에서 본다면 인간은 백세를 살아도 하루살이 밖에 안됩니다. 그런데 인연담에 따르면 놀라운 깜짝놀랄만한 가르침으로 가득 합니다. 그 중에 하나가 인간들이 그렇게 짧은 시간 태어나서 산다면, 시간을 빈둥거리며 방일하게 보냅니까?”라는 내용입니다. 이에 대하여 인간들은 늙음과 죽음이 없이 무수한 세월을 사는 것처럼 방일합니다.”라는 말에서 인연담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알 수 있다.

 

흔히 세월에 대하여 이야기 합니다. 나이가 들면 세월이 너무 빨리 흘러간다고들 합니다. 그래서 연령대별로 자동차의 시속과 비교하여 말합니다. 또 어떤 이는 나이가 드는 것을 줄이고 싶어서인지 자신의 나이에 0.8을 곱하는 것이 진짜 나이라 합니다. 인생 60을 살았다면 48세가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세월에 대하여 말하는 것은 세월타령밖에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스님들도 이런 식으로 법문을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타령조의 법문이 됩니다.

 

세월타령한다는 소리를 듣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것은 세월법문을 하면 됩니다. 그런데 세월법문은 이미 경전에 나와 있다는 사실입니다. 초기경전을 열어 보면 무수히 많은 세월에 대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렇게 본다면 초기경전은 좋은 법문을 하기 위한 보고(寶庫)와도 같습니다.

 

 

2015-02-04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