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 떠나는 여행

니까야가 뭐꼬?

담마다사 이병욱 2015. 2. 6. 17:14

 

 

니까야가 뭐꼬?

 

 

 

 

 

 

한자어 용어가 있습니다. 그 중에 불교와 관련된 용어가 있습니다. ‘조고각하’ ‘고구정녕과 같은 말 입니다. 이런 사자성어는 정보통신과 인터넷시대에 맞지 않습니다. 사전을 찾아 보기 전에는 그 뜻을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같은 말이라도 한자어를 사용하면 고상해 보입니다. 더구나 일반인들이 모르는 한자어를 사용하면 유식해 보입니다. 유식이라는 말 자체도 유식해 보입니다. 그래서 문자 쓴다는 말이 나왔는지 모릅니다.

 

영어사용이 보편화 된 요즈음 알아들을 수 없는 용어를 사용하기도 합니다. ‘레토릭’ ‘나이브등과 같은 말 입니다. 기사를 읽을 때 종종 발견 되는 이런 말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해 하고 있을까요? 아마 사전을 찾아 보기 전에는 알 수 없을 것입니다.

 

글을 쓸 때 가급적 문자를 쓰지 않으려 노력 합니다. 사실 아는 문자도 별로 없습니다. 읽는 사람들의 눈높이에 맞추어 풀어 쓰려고 노력 합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메세지(의미)의 전달이기 때문입니다.

 

한자이든 영어이든 알기 힘든 문자 쓰는 것에 대한 거부감이 있습니다. 좀 더 쉽게 표현 할 수 있음에도 굳이 일반인들이 알 수 없는 문자를 사용한다는 것은 일종의 자기과시라 보여지기 때문 입니다. 굳이 쉬운 말로 표현할 수 있음에도 문자 쓰는 것을 보면 잘난 체하는 것으로 비추어 질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말을 하고, 어떻게 글을 써야 할까요? 그것은 초기경전에 답이 있다고 봅니다. 부처님의 전도선언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수행승들이여,

처음도 훌륭하고 중간도 훌륭하고 마지막도 훌륭한,

내용을 갖추고 형식이 완성된 가르침을 설하라.”(S4.5)

 

 

부처님은 교화할 때 내용과 형식을 갖추라고 하였습니다. 말이나 글로서 표현하고자 할 때는 내용과 형식을 갖추어 하라는 말입니다. 그것도 처음도, 중간도, 마지막에도 적용 되어야 함을 말합니다. 이 말은 무슨 뜻 일까요? 논리적으로 말하고 논리적으로 쓰라는 말 입니다.

 

만일 논리가 갖추어져 있지 않다면 횡설수설하고 말 것 입니다. 듣는 이로 하여금 짜증을 유발하고 보는 이로 하여금 시간낭비라 생각 할 것입니다.

 

상류층이 쓰는 언어가 있습니다. 그들은 그들만의 언어를 사용하여 그들만의 방식대로 소통합니다. 부처님당시에도 그랬습니다. 부처님당시 고대인도에는 브라만들이 있었습니다. 사성계급의 정점에 있던 지배계층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태생에 대한 우월의식을 가지고 있었고 그들끼리 소통하는 언어를 따로 가지고 있었습니다. 산스크리트어를 말합니다. 마치 조선시대 양반들이 한문으로 소통하는 방식과 같습니다.

 

부처님은 교화할 때 어떤 말로 하였을까요? 학자들에 따르면 민중어를 사용하였다고 합니다. 지배계층의 언어인 산스크리트어를 사용하지 않고 대다수 사람들이 사용하는 마가다어로 설법한 것 입니다.

 

부처님이 민중어를 사용한 것은 큰 의미가 있습니다. 그것은 부처님의 가르침이 널리 퍼지기를 바래서라고 볼 수 있습니다. 또 그 시대 민중들에게 가장 많이 통용되는 언어로서 교화한 것은 부처님의 자비사상의 발현이라 봅니다.

 

오늘날 한국에서 부처님당시의 언어인 빠알리어가 번역 되어 나왔습니다. 그런데 번역에 따라 받아 들이는 느낌이 다릅니다. 왜 이런 차이가 날까요? 그것은 그 시대에 맞는 용어를 사용했느냐의 차이라 봅니다.

 

부처님은 가르침이 널리 퍼지기를 바랬습니다. 그래서 처음도, 중간도, 마지막도 좋은 법문으로 교화 하기를 바랬습니다. 이는 서론과 본론과 결론을 갖추어 논리적으로 교화하라는 말과 같습니다. 그런데 부처님은 또 완성된 가르침을 설하라라 하였습니다. 이는 무엇을 의미할까요? 가르침을 빠짐없이 전달하라는 말과 같습니다. 시계생천의 법문만 하여 하늘나라에 태어나는 것을 목적으로 삼을 것이 아니라 공부가 되었으면 사성제 등의 근본교리를 설하여 가르침을 남김 없이 전달하라는 말과 같습니다.

 

부처님의 전도선언은 부처님의 준엄한 명령과도 같습니다. 상대방을 교화시키고자 할 때는 논리적으로 말하여야 하고 가르침을 빠짐없이 전달하라는 준엄한 명령입니다. 또 한편으로 그 시대에 통용되는 표준어를 사용하여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이는 지방어를 고집하지 말아야 하고 보편어를 침해해서는 안된다. M139)”라고 말씀 하신 것에서도 알 수 있습니다. 그 시대 민중들이 사용하는 표준어로 누구나 알기 쉽게 전달하라는 말과 같습니다.

 

오늘날 한국에서는 부처님의 원음을 우리말로 접할 수 있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한글을 깨쳤다면 초등학생이라도 알 수 있는 내용입니다. 그러나 내용은 심오합니다. 마치 씹으면 씹을수록 맛이 나듯이 보면 볼수록 그 의미가 드러나는 가르침 입니다.

 

이 시대에 맞는 부처님의 원음이 우리말로 번역되오 나온 지 십년이 넘었습니다. 이런 번역서를 빠알리니까야라 합니다. 그럼에도 아직까지 니까야를 모르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그래서일까요 어느 노비구니스님은 니까야가 뭐꼬?”라 했다 합니다.

 

 

2015-02-06

진흙속의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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