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속의연꽃

순수의 시대로 돌아가고 싶다

담마다사 이병욱 2015. 5. 22. 11:38

 

 

순수의 시대로 돌아가고 싶다

 

 

 

동국대에 가면 마음이 편안 해진다. 그리고 고향처럼 익숙하다. 언제나 다시 찾을 때 마다 변치 않고 그 자리에 있다.

 

고향에 가면 모든 것이 익숙하다. 지금은 아무도 살지 않는 고향이지만 어렸을 적에는 꽤나 북적이었다. 두메산골도 아니고 도시근처도 아닌 탁 트인 전형적인 농촌이다. 개발이 되지 않아 그 시절 그 모습을 유지 하고 있다. 어린 시절 베이비붐 시대에 태어난 아이들은 뒷잔등이 놀이터이었다.

 

고향을 찾을 때면 늘 뒷잔등에 간다그곳에 가서 유년시절을 떠 올리며 기억을 되살려 하나씩 확인한다. 변함없이 그 자리에 있는 것은 무덤이다. 큰 무덤이 있어서 해마다 제사를 지내곤 했다. 제사밥 얻어 먹는 재미로 기웃거렸다. 무덤주위로 큰 소나무가 있다. 어렸을 때는 크게 보였다.

 

뒷잔등은 변함없이 그 자리에 있다. 아무리 세월이 많이 흘러도 항상 그 자리에 있다. 지금은 반백이 다 되어 세월에 떠밀려 가고 있지만 그곳은 항상 그대로이다. 나무만 더 자랐을 뿐 변함이 없다. 그때는 베이비부머들의 놀이터이었지만 지금은 적막하기만 하다.

 

 

 

 

늘 변함 없이 그 자리에 서 있는 소나무를 보면 반갑다. 유년의 추억을 간직하고 있는 장소가 변함없고 더구나 개발이 되지 않아 다행이다. 그 자리에 그대로 있다는 것은 행운이고 축복이다. 기댈 언덕이 남아 있다는 것은 어머니의 품과도 같이 포근하고 안은 한 것이다.

 

동국대도 늘 그 자리에 있다. 언제 어느 때 가도 변함없이 그 자리에 있어서 변치 않는 고향과도 같다. 고향이 유년시절의 추억을 간직한 곳이라면 동국대는 중학교시절 추억이 서린 곳이다.

 

농사를 지어서는 더 이상 살 수 없어서 고향을 떠난 시절이 있었다. 대한해(大旱害)가 들어 몇 해 연속으로 비가 오지 않았다. 논바닥은 갈라지고 대지는 타들어 갔다. 어느 해 이었던가 여름밤 저 먼 산 중턱에서 불이 치솟아 올랐다. 어른들이 기우제를 지낸다고 하였다. 그 후 비가 왔는지 오지 안않는지는 알 수 없다. 분명한 것은 대한해 이후 하나 둘 고향을 뜬 사람들이 많아졌다는 사실이다.

 

고향을 떠난 사람들은 난민과 다름없다. 농사만 지어 가지고는 식솔을 먹여 살릴 수 없었기 때문에 남부여대(男負女戴)’하듯이 서울행 야간열차를 탔다. 배운것이 농사밖에 없어서 도시빈민이 된 난민들은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살았다.

 

산동네 달동네라 불리는 곳에 살았다. 환경은 열악했다. 고향에서 세상 모르고 살던 시절이 그리웠다. 가난이 무엇인지 괴로움이 무엇인지 몰랐던 순수의 시대를 늘 떠 올렸다. 그러나 어느 순간 오염되가고 있는 자신을 보았다. 하얀 도화지에 새로운 그림이 그려지고 여백이 채워지고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마음속에 적당히 타협하여 감에 따라 돌아 올 수 없는 다리를 건넌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러나 멈출 수 없었다. 도시에서 삶이라 그랬을까? 반드시 그렇지만은 않을 것이다. 농촌에 살았어도 마음은 오염되기 시작했을 것이다. 그것은 자아의식의 발달과 괘를 같이 한다.

 

유년시절은 순수의 시대이다. 세상을 모르던 시절이다. 그리고 자신을 모르던 시절이다. 마음이 순수하다 보니 세상이 익숙해 보였다. 지금 생각해 보면 나와 세상이 일체가 된 듯한 합일의 상태이었다고 본다. 그러나 무언가를 하나 둘 알고 나서부터는 깨지기 시작했다. 특히 급격한 환경변화가 초래된 초등학교 말 시절에 마음이 타락 되어 감을 느꼈다. 다시 되돌아 가려 하였으나 생각만 있을 뿐 돌아 갈 수 없었다. 아는 것이 많아지면 질수록 지식이 쌓이면 쌓일수록 순수의 시대로 복귀하는 것은 요원한 것이다.

 

중학교에 들어갔다. 소위 뺑뺑이로 동대부중에 가게 되었다. 그때 당시 종로5가 부근 연지동에 있었다. 미아리에서 종로5가 부근까지 꽤 긴 거리를 버스타고 다녔다. 버스는 늘 만원이었다. 등굣길은 매일 버스와의 전쟁이 었다.

 

중학교시절에는 순수의 시대에 조금 가까이 간 느낌이었다. 학교가 불교학교라서 불교시간이 있었기 때문이다. 일주일에 한번 있는 불교시간에 부처님의 일생을 배웠다. 그때 당시 불교선생님은 조용길교법사이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선생님은 동국대 불교학과 교수를 역임하였다. 또 대불련 창립을 주도하였고 불광법회 모임에서 주도적역할을 하였다.

 

중학교 시절에 불교를 접한 것이 큰 영향을 끼쳤다. 사춘기 이전 정확하게는 변성기 이전에 불교를 접하였다는 것은 일종의 발판을 마련해 놓은 것과 다름 없다. 타지에서 방황하다 언제든지 되돌아 가서 머물 수 있는 고향과도 같기 때문이다.

 

중학교 일학년 때 백일장이 있었다. 부처님오신날을 앞두고 열린 교내백일장에서 상을 탔다. 상장과 부모은중경이 그려져 있는 작은 화첩을 선물로 받았다. 생애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런 영향이어서인지 지금 글을 쓰는지 모른다. 까맣게 잊고 있다가 그런 것이 있다는 것을 발견한 듯하다. 불교도 마찬가지이다. 변성기 이전에 접한 부처님의 일생을 아무런 저항 없이 순수하게 있는 그대로 받아 들였다. 그리고 나서 잊어버렸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나서 불교와 인연이 끊어진 것이다. 그러나 마음 속에는 남아 있었다. 무의식 어딘가에 저장 되어 있었던 것이다.

 

다시 불교를 접하였다. 타지에서 방황하다 고향에 되돌아온 탕아처럼 어느 날 잊고 있었던 곳으로 되돌아 가고자 한 것이다. 그것은 순수의 시대에 대한 갈망과 같다. 변성기를 거치면서 갈수록 마음이 오염되어 순수와는 멀어져 갔는데 불교를 통해서 순수의 시대로 복귀하고픈 마음이 일어난 것이다.

 

종로 5가 연지동에 있었던 동대부중 건물은 사라졌다. 지금은 대기업 사옥이 위풍당당하게 그 자리에 서 있다. 학교는 오래 전에 다른 곳으로 이사갔다. 그러나 추억만은 남아 있다. 그것은 제등행렬이다. 해마다 부처님오신날이 되면 동국대 운동장에서 행사를 치루었다저녁에는 종로거리를 누볐다. 그런 동국대는 매우 익숙하다.

 

최근 동국대를 다시 찾았다. 바른불교재가모임의 일원으로서 고공농성현장을 찾았다. 종단에서 편법과 탈법과 불법으로 이사장과 총장을 선출한 것에 대한 항의표시로 한 학생이 한달이 넘게 홀로 조명탑 위에 올라가 있다. 다시 찾은 동국대에 가 보니 옛날 그대로이다. 동국체전 당시 카드섹션을 했던 대운동장도 그대로이다. 백상은 자리가 옮겨지긴 했지만 그 모습 그대로이다. 무엇보다 그대로인 것은 본관 앞 불상이다. 그때 당시 본 석가여래입상의 상호를 확인 하였다. 변함 없는 그 모습 그 대로이다.  

 

 

 

 

동국대에 가면 고향에 간 것 같다. 지금도 변치 않고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 석가여래입상을 보면 고향 뒷잔등에 서 있는 소나무를 보는 것 같다. 고향에서 유년기 순수시대를 떠 올리듯이 동국대에 가면 중학시대의 순수를 떠올린다.

 

유년기 순수시대로 돌아가고자 한다. 근심 걱정 없고 모든 것이 익숙하고 순수한 시절이다. 유년기는 순수의 시대이다. 순수의 시대로 돌아가고 싶다.

 

 

2015-05-22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