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속의연꽃

깨달음에 대하여 생각해 본다

담마다사 이병욱 2015. 5. 27. 08:43

 

 

깨달음에 대하여 생각해 본다

 

 

 

 

 

 

불교를 깨달음의 종교라고 한다. 그래서 깨달음을 강조한다. 그러나 막상깨달음이 무엇입니까?”라고 물으면 명쾌하게 답을 하지 못한다. 그래서인지 스님이나 학자들은 깨달음이란 무엇인가?”라는 주제로 수 많은 견해를 제시한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한국불교에서는 아직까지 깨달음에 대해서 명확하게 정리 되지 않았음을 말한다. 그러다 보니 불교란 무엇인가?”라는 제목의 글을 심심치 않게 접한다.

 

깨달음에 대하여

 

깨달음이란 무엇일까? 기독교인들도 대화 중에 깨달았다라는 말을 한다. 깨달음이라는 말이 불교전용 용어로 알고 있으나 누구나 깨달음이라는 말을 쉽게 사용한다. 먼저 국어사전을 찾아 보았다. 깨달음에 대하여 이렇게 설명되어 있다.

 

 

(1) 제대로 모르고 있던 사물의 본질이나 진리 따위의

숨은 참뜻을 비로소 제대로 이해할 수 있게 됨.

(2) 모르고 있던 사실을 뒤늦게 알아차림.

 

 

기독교인들이 말하는 깨달음은 2번항 임을  알 수 있다. 불교인들이 말하는 깨달음은 1번항이 될 것이다.

 

1번 항에서 사물의 본질이나 진리라 하였다. 이는 원리라고도 할 수 있다. 여기서 중요한 말은 진리라는 말이다. 깨닫는 다는 것은 진리를 아는 것을 말한다. 그렇다면 불교에서 진리는 어떤 것일까?

 

네 가지 진리가 있는데

 

불교에 진리가 있다. 그것은 다름아닌 사성제(四聖諦)이다. 글자가 말해 주듯이 네 가지 거룩한 진리를 말한다. 진리가 하나가 아니라 네 가지라는 사실이다! 왜 네 가지인가? 그것은 불자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괴로움( : dukkha)’에 대한 것이다. 그래서 반드시 괴로움이라는 말이 들어가서 다음과 같이 표현된다.  

 

 

(1) 고성제(苦聖諦: dukkha ariyasacca)

괴로움의 거룩한 진리 

(2) 고집성제(苦集聖諦: dukkhasamudayo ariyasacca)

괴로움의 발생의 거룩한 진리 

(3) 고멸성제(苦滅聖諦: dukkhanirodho ariyasacca)

괴로움의 소멸의 거룩한 진리 

(4) 고멸도성제(苦滅道聖諦: dukkhanirodhagāminī paipadā ariyasacca)

괴로움의 소멸로 이끄는 길의 거룩한 진리

 

 

이렇게 불교에서 진리는 하나가 아니다. 네 가지이다. 그런 사성제에서 가장 처음 나오는 말이 고성제이다. 이를 둑카아리야삿짜라 하여 괴로움의 거룩한 진리라 한다. 왜 괴로움을 거룩한 또는 성스런 진리라 하였을까? 이는 괴로움의 철저한 자각에서 출발하기 때문이다. 대충 아는 것이 아니라 뼈저리게, 눈물나게 알았을 때 괴로움이 성스런 진리가 된다.

 

고성제는 초전법륜경(S56.11)’에 잘 정리 되어 있다. 결론적으로 오취온(五取溫: pañcupādānakkhandhā dukkhā)’이다. 오온에 대하여 집착하고 있는 한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말한다. 괴로움의 성스런 진리는 나의 몸과 마음이 나의 것이 아니라 조건발생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일깨워 준다.

 

무엇이든지 처음이 중요하다. 첫 단추를 잘못 꽤면 줄줄이  어긋나듯이, 괴로움에 대하여 모르면 사성제를 모르는 것과 같다. 그런 사성제는 불교의 전부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코끼리 발자국안에 모든 축생들의 발자국이 다 들어가듯이, 부처님의 84천 법문은 모두 사성제에 포섭된다.

 

정견이란 무엇인가?

 

불교는 깨달음의 종교이다. 무엇을 깨닫는가? 네 가지 진리, 사성제를 깨닫는 것이다. 그럼에도 깨달음을 사성제 밖에서 찾으려 한다면 어떻게 될까? 아마 길을 잃고 헤매게 될 것이다. 그래서 정견이 중요하다고 하였다.

 

정견이란 무엇일까? 우리 불자들은 절에 10, 20, 30, 평생을 다녀도 정견에 대하여 자신 있게 이야기 하지 못한다. 교리를 모르기 때문이고 스님들이 가르쳐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선사들은 정견에 대하여 자신이 부처임을 아는 것이라 한다. 자신의 내면에서 본래불, 본래면목, 불성을 찾아야 함을 말한다. 이런 접근방식은 자칫 존재론으로 치우칠 수 있다.

 

부처님이 말씀하신 정견은 사성제를 아는 것이다. 초기경전에 따르면 팔정도의 정견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명확하게 정의 되어 있다.

 

 

[세존]

수행승들이여, 올바른 견해란 무엇인가? 수행승들이여, 괴로움에 대하여 알고 괴로움의 발생에 대하여 알고 괴로움의 소멸에 대하여 알고 괴로움의 소멸로 이끄는 길에 대하여 알면, 수행승들이여, 이것을 올바른 견해라 한다.(S45:8)

 

 

한마디로 정견(바른 견해)은 사성제에 대한 지혜를 말한다. 사성제를 아는 것이 정견이 된다. 그렇다면 정견이 왜 중요한가? 그것은 수행의 방향을 정하기 때문이다. 만일 정견이 제대로 서 있지 않다면 수행은 중구난방이 될 것이다.

 

정견이 바로 서야 바른 길로 갈 수 있다. 그 길은 팔정도의 길이다. 그럼에도 한국불교에서는 사성제와 팔정도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선사들은 본래불, 본래면목, 자신이 부처임을 아는 것이 정견이라 한다.

 

존재론과 인식론

 

불교를 깨달음의 종교라 한다. 이는 인식론에 기반한다. 사성제를 알고 팔정도를 닦는 것은 깨닫기 위해서이다. 네 가지 성스런 진리, 서성제를 깨닫는 것이다. 깨달음에도 단계가 있다고 하여 계()-()-() 삼학을 닦아야 함을 강조한다. 그러나 불교를 존재론으로 보면 엉뚱한 곳으로 빠져 길을 잃고 헤매기 쉽다. 선사들이 참나를 찾자고 했을 때 이는 존재론적으로 보는 것과 같다. 마치 그리스도, 알라, 브라흐마 등 존재의 근원 내지 궁극적 실재를 찾는 것과 같다.

 

유일신교에서는 궁극적 실재가 있다고 믿는다. 이 세상을 존재케 하는 존재의 근원을 상정하는 것이다. 바라문교 역시 마찬가지이다. 그런데 궁극적 실재를 가정하면 존재론으로 되어 버린다. 나와 이 세상을 있게 한 존재의 근원을 찾기 위한 기나긴 여정이 시작된다.

 

부처님은 브라만교를 비판하였다. 존재의 근원인 브라흐마(Brahma)’와 개별적 자아인 아뜨만(Atman)’은 있을 수 없다고 하였다. 이는 연기법으로 설명될 수 있다. 부처님은 깟짜야나곳따의 경에서 세상의 발생을 관찰하는 자에게는 세상에 비존재라는 것은 사라진다. 세상의 소멸을 관찰하는 자에게는 세상에 존재라는 것은 사라진다.(S12.15)”라 하였다. 원인과 조건과 결과로 설명되는 연기법에 따르면 영원주의와 하무주의는 모두 논파된다. 따라서 이 나와 이 세상의 원인이 된다는 궁극적 실재나 존재의 근원은 있을 수 없다.

 

불교는 철저하게 인식론을 기반으로 한다. 이는 깨달음이라는 말 자체가 인식론에 기반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럼에도 궁극적 실재나 존재의 근원을 찾는 수행을 한다면 이는 존재론을 기반으로 하는 것이다.

 

누구나 깨달음을 말한다. 어떤 학자는 깨달음이라는 말에 식상했는지 불교는 행복의 종교이다라 한다. 사실 어떤 종교이든지 행복을 추구 하기 때문에 대단히 무책임한 말이라 볼 수 있다. 어떤 이는 불교에 대하여 자신이 부처임을 아는 것이 정견이라 한다. 그러나 초기경전에 따르면 잘못된 것이다. 부처님은 정견에 대하여 사성제를 아는 것이라 하였다.

 

정견이 바로서야

 

현재 한국불교는 대혼란기에 빠져 있다. 선사들은 본래불을 아는 것이 정견이라 하고 초기불교주의자들은 사성제를 아는 것이 정견이라 한다. 분명한 사실은 정견이 바로 서야 한다는 사실이다.

 

정견이 바로 서지 않으면 엉뚱한 곳에서 길을 잃고 헤메이기 쉽다는 사실이다. 10, 20, 30년 평생을 찾고자 해도 결국 찾지 못한다. 이는 수행의 방향이 잘못 되었기 때문이다.

 

불교는 존재론이 아니라 인식론이다. 불교는 깨달음의 종교이다. 네 가지 성스런 진리, 사성제를 깨닫는 것이다. 그 깨달음의 길은 팔정도이다.

 

 

무화과 나무에서 꽃을 찾아도 얻지 못하듯,

존재들 가운데 어떠한 실체도 발견하지 못하는 수행승은,

마치 뱀이 묵은 허물을 벗어버리는 것처럼,

이 세상도 저 세상도 다 버린다.” (stn5)

 

 

2015-05-27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