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속의연꽃

깨달은 자로서의 붓다, 지혜로운 노인으로서의 붓다

담마다사 이병욱 2015. 5. 28. 09:14

 

 

깨달은 자로서의 붓다, 지혜로운 노인으로서의 붓다

 

 

깨달은 자를 부처라 한다. 빠알리어로는 붓다라 한다. 붓다는 무엇을 깨달은 자일까? 가장 고층이라 일컬어지는 숫따니빠따에 이런 게송이 있다.

 

 

Abhiññeyya abhiññāta

bhāvetabbañca bhāvita;  

Pahātabba pahīna me,   

tasmā buddhosmi brāhmaa. 

 

[세존]

나는 곧바로 알아야 할 것은 곧바로 알았고,

닦아야 할 것을 이미 닦았으며,

버려야 할 것을 이미 버렸습니다.

그러므로 바라문이여,

나는 깨달은 자입니다.”(stn558)

 

 

이 게송은 숫따니빠따 셀라의 경(Sn3.7)에서 뿐만 아니라 맛지마니까야 셀라의 경(M92)에서도 나온다.

 

게송에서 ‘알아야 할 것(pariññeyyā)’은 ‘교학(pariyatti)’을 말하고, ‘닦아야 할 것(bhāvetabbā)’은 ‘수행(paipatti)’을 말한다. ‘버려야 할 것(pahātabbā)’은 오염원을 버린다는 뜻이다. 오염원 소멸 되었을 때 청정하게 될 것이다. 또 한편으로는 알아야 할 것에 대하여 사성제라 말할 수 있고, 닦아야 할 것은 팔정도라 말할 수 있다.

 

어느 경우이든지 공통적으로 마음을 청정하게 하는 것이다. 이는 오염원을 모두 소멸 시켜 마음을 청정하게 하는 것이다. 이렇게 마음의 청정과 지혜를 이루었을 때 붓다(buddha)라 하였다. 이 때 붓다는 깨달은 자를 말하며 일반적으로 보통명사로 사용한다.

 

붓다는 교학과 수행과 통찰로 완성된다. 특히 부처님은 교학과 수행을 병행해야 한다고 말씀 하셨다. 수행 역시 멈춤(: 사마타)과 통찰(: 위빠사나)을 병행해야 한다고 하였다. 특히 수행과 관련하여 법구경에서 “선정과 지혜가 있으면 참으로 그에게 열반이 현전한다.(DHP372)”라 하였다. 이렇게 본다면 궁극적 목적에 가장 빨리 도달 하기 위해서는 교학과 수행을 병행하는 것이다. 마치 새가 양 날개로 날듯이, 교학과 수행을 병행하면 더 높이 더 멀리 날아 갈 수 있는 것이다.

 

교학과 수행으로 오염원을 제거하면 붓다가 된다. 그런데 초기경에 따르면 놀랍게도 붓다의 의미가 나이 든이라는 뜻도 있다는 사실이다. 나이 든 자, 즉 노인에게도 붓다라는 칭호를 붙여 주는 것이다.

 

나이 든 자로서의 붓다의 의미는 마하빠리닙바나경(대반열반경, D16)에서 확인 할 수 있다. 경에서 쑤밧다라고 하는 나이가 들어 출가한 자라는 구절이 있다. 여기서 나이가 들어 출가한 자라는 말은 빠알리어 ‘buḍḍhapabbajito’의 번역어이다.

 

나이 든 자를 붓다로 보는 것은 빠알리 사전에서도 확인 된다. 빠알리사전 PCED194에서는 buddha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되어 있다.

 

 

1) buḍḍha:

a. [=vuḍḍha] 老いたる, 古き. aged; old

 

2) buddha:

a. m. [bujjhati pp.] った, めたる, 知せる; , , . -ānubuddha に隨ってれる.

[pp. of bujjhati] known; understood; perceived. (m.), one who has attained enlightenment; the Enlightened one.

 

 

붓다에 대한 첫 번째 뜻은 형용사로서 ‘늙은’ 또는 ‘나이 든’의 의미가 있다. 영어로는 ‘aged; old’라 하였다. 이렇게 본다면 붓다라는 말이 반드시 석가모니 부처님과 같은 고유명사가 아님을 알 수 있다.

 

붓다에 대하여 두 번째 뜻은 과거분사형으로 하여 ‘known; understood; perceived’ 의 뜻이다. 사람을 지칭할 때는 정관사를 붙여서 ‘the Enlightened one(깨달은 자)’이라 하였다.

 

일반적으로 나이 먹었다라는 말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보통 노인을 떠 올릴것이다. 산전수전 쓴맛 단맛 다 본 노인이다. 또 한편으로 이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누님처럼 차분한 느낌의 노인이 연상된다.

 

노인에 대하여 두 가지 타입으로 볼 수 있다. 단지 세월만 가서 육체적으로 늙어 나이만 먹은 노인을 말한다. 또 하나는 경험이 풍부하여 이치를 파악할 줄 아는 지혜로운 노인을 말한다. 붓다로서의 노인은 후자일 것이다.

 

노인은 지혜의 상징과도 같다. 산전수전 다 겪어 보았기 때문에 그 길로 가면 되는지 안되는지 잘 안다. 그래서 젊은이들에게 잔소리 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젊은 세대는 귀담아 듣지 않는다. 지혜로운 노인들의 말을 경청하여 손해 볼 일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노인이라고 해서 모두 지혜롭지는 않다. 쓸데 없이 나이만 먹어 마치 정신적 성장이 멈춘 듯한 노인도 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노인들이 나이만 먹어 어리석게 산다고 볼 수 있다.

 

주변에서 형편 없이 늙어 버린 노인들을 볼 수 있다. 보기에도 안쓰러워 대부분 쳐다 보지도 않는다. 그런 노인들 대부분은 지혜롭지 않다는 사실이다. 옛날 가지고 있던 사고방식에서 조금도 변화가 없다. 그것은 고집으로, 탐욕으로, 성냄으로 나타난다.

 

나이를 먹어 형편 없이 늙은 노인이 고집부리고 화를 낸다면 꼴불견이다. 그래서 사람들이 가까이 하려 하지 않는다. 나이가 들어 아무것도 할 수 없어서 서러운데 어느 누구도 가까이 하려 하지 않는 다면 더욱더 서러운 일일 것이다. 그렇다면 나이 들기 전에, 노인이 되기 전에 어떻게 해야 할까?

 

 

 

 

 

 

나이가 들면 들수록 지혜로워져야 한다. 그래서 지혜의 노인이 되어야 한다. 이제까지 탐욕과 분노로 살았다면 헛된 것임을 알아 그와 반대로 살아야 한다. 그래서 탐욕의 대신 관용으로, 분노대신 자애로 살아야 한다. 이것이 지혜로운 노인의 삶의 방식이다.

 

나는 얼마나 지혜로운가? 간단히 아는 방법이 있다.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이다. 이 중에서 성내는 것 하나만 봐도 그 사람의 됨됨이를 알 수 있다. 화를 낸다는 것은 내면의 천박함이 가장 쉽게 드러나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탐욕이다. 밥 먹을 때 보면 알 수 있다. 대부분 탐욕으로 먹기 때문이다. 가장 드러나기 어렵고 알아차리기 어려운 것이 어리석음이다. 그러나 어리석음도 쉽게 알 수 있는 방법이 있다. 탐욕과 성냄은 어리석은 자들의 삶의 방식이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그 사람이 어리석은지 지혜로운지는 행위를 보면 알 수 있다. 모든 것은 행위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아무리 숨기고 감추려 해도 눈빛 하나 얼굴색깔, 행동하는 것 만 봐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 사람에 대하여 깊이 알려면 겪어 보아야 한다. 함께 살아 보아야 그 사람의 계행을 알 수 있고, 위기에 처해 보아야 얼마나 진실한 지 알 수 있고, 토론해 보아야 얼마나 지혜로운지 알 수 있다.

 

나이만 들었다고 지혜로운 것은 아니다. 법구경에서는 머리가 희다고 해서 장로가 아니다하였는데, 나이만 먹었다고 하여 지혜로운 것은 아니다. 나이만 먹었을 뿐 여전히 탐욕과 성냄으로 살아 간다면 어리석은 자이다.

 

지혜로운 자는 관용과 자애와 지혜가 넘쳐난다. 왜 그럴까? 탐욕이 소멸된 자리에 관용이 들어 앉았고, 성냄이 소멸된 자리에 자애가 들어 앉았다. 그래서 지혜로운 자는 늘 관용과 자애로 늘 넘쳐난다. 그런 자에 대하여 깨달은 자, 붓다라 한다. 나이가 들어 지혜로운 노인도 마찬 가지이다. 그래서 나이 든 자에 대하여 붓다라 하나 보다.

 

 

2015-05-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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