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속의연꽃

유신견(有身見)을 가지고 있는 한, 휴휴재 니까야강독 ‘모든 번뇌의 경(M2)’

담마다사 이병욱 2015. 6. 21. 12:24

 

유신견(有身見)을 가지고 있는 한, 휴휴재 니까야강독 모든 번뇌의 경(M2)’

 

 

비내린 차분한 날 저녁에

 

모처럼 차분하고 한가한 하루였다. 메르스여파로 온나라가 공포에 휩싸여 있는 이 때 모처럼 비가 내려서 두려움을 씻어내는 것 같았다. 그래서일까 환자발생도 줄어 들고 진정국면을 보이는 것 같다. 몇 일 지나면 본격적인 장마가 시작 된다는데 그때쯤이면 소강상태에 들어 갈 것으로 보인다.

 

메르스는 중동에서 발원된 것이어서일까 덥고 건조한 날씨에서 더 기승을 부리는 것 같다. 반대로 차고 습한 날씨에서는 맥을 추지 못한다고도 볼 수 있다. 그래서 매스컴에서는 수분을 많이 섭취하라고 권장한다. 그러고 보면 괴질이나 역병은 수분에 약한 것 같다.

 

오랜 만에 대지가 축축이 젖은 날 토요일 저녁 휴휴재에서 맛지마니까야 강독이 있었다. 오래 전부터 예고된 것으로 한달에 한번 있는 강독시간이다. 이른바 바른불교학당에서 매주 토요일 저녁에 강좌를 열고 있는데 그 중의 하나가 니까야 강독시간이다.

 

학당을 담당하는 법우님은 강사라 소개하였다. 그러나 이는 가당치 않은 말이다. 단지 진행자일 뿐이다. 강단에 설만한 자격도 실력도 없기 때문이다. 수행경력이 일천하여 감히 나설 수 없으나 맡긴 것이기에 책임감을 가지고 진행하고 있다.

 

이날 토요강독시간에 모인 법우님은 모두 10명이다. 메르스여파와 오랜만에 내린 비, 그리고 지리적으로 외진 곳에 있다 보니 많은 법우님들이 참석하기에는 한계가 있는 듯 하다. 그럼에도 먼 길을 그것도 험하고 가파른 길을 따라 올라 오신 법우님들이 있었다.

 

미얀마에서 수행한 법우님

 

늘 고정멤버나 다름 없는 법우님들을 제외 하고 새로운 얼굴이 보였다. 필명이 위말라인 법우님이다. 물어 보니 진흙속의연꽃글을 통해 오게 되었다고 한다. 이럴 때 대략난감하다. 글만 보고서 환상을 품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제 까지 만나려 하지 않은지 모른다. 그럼에도 시절인연이 되었는지 커밍아웃하게 되었다. 그래서 글을 보고서 찾아 오는 법우님과 마주 하게 되었다. 이럴 경우 장동건 정도 되는 마스크와 외모를 가져야 하는데 실망시켜 드리는 것 같아 늘 죄송하게 생각한다. 이것도 일종의 외모 콤플렉스 일 것이디.

 

위말라법우님은 미얀마 수행하였다고 한다. 조금 수행하였다고 하지만 말이 조금이지 실제로 수 년 수행한 것이다. 부처님 가르침을 공부한 사람들이 그렇듯이 모두 선하게 생겼다. 법우님도 마찬가지이다. 특히 필명 위말라라는 필명이 말해 주는 것 같다.

 

빠알리어 위말라는 티끌 없음이라는 뜻이다. 이는 숫따니빠다 담미까의 경(Sn2.14)’에서도 알 수 있다. 위말라와 관련된 게송은 다음과 같다.

 

 

Sabba tuva ñāamavecca dhamma,

pakāsesi satte anukampamāno;

Vivaṭṭacchadosi samantacakkhu,

virocasi vimalo sabbaloke.

 

당신께서는 모든 앎을 이해하시고,

뭇삶들을 애민히 여겨, 가르침을 설하십니다.

널리 보는 님이시여, 당신께서는 덮개를 벗어버리고,

티끌 없이 온 세상을 비추십니다.(stn378)

 

 

네 번째 구절에서 티끌 없이라는 말이 있다. 이는 빠알리어 위말라(vimala)’를 번역한 것이다. 위말라는 ‘clean; spotless; unstained’의 뜻으로 한자어로 이구(離垢)’ 또는 무구(無垢)’ 라 한다. 또 위말라는 라는 말은 율장에 등장에 하는 야사친구의 이름이기도 하다. 우리나라 불자중에서도 한문식 법문 무구가 있다. 이렇게 본다면 때묻지 않는다는 뜻의 위말라나 무구는 좋은 법명 또는 필명이라 볼 수 있다.

 

개량한복을 입은 법우님

 

이날 귀한 분이 오셨다. 박호석님이다. 바른불교재가모임 창립당일 함께 하였던 법우님이다. 그러나 이날 정식으로 인사를 나누었기 때문에 사실상 초면인 셈이다. 법우님은 삼보정사를 이끌고 있다. 사단법인이라 한다. 별도의 빌딩이 있어서 법당 뿐만 아니라 유치원 등의 시설도 가지고 있다고 하였다.

 

법우님은 한복을 입고 오셨다. 그렇다고 법복은 아니다. 일종의 개량한복이다. 미디어붓다에 기고된 법우님의 글에 따르면 한복 입은 지 20년 가량 되었다고 한다. 김영상정부 당시 우리 것에 대한 관심이 한창 높았을 때 한복입기를 권장하였다고 하는데 그 때부터 입기 시작한 것이 지금까지 입게 되었다고 한다. 법우님은 칼럼에서 한복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예찬하고 있다.

 

 

한복은 불자인 필자에게는 참으로 편리한 옷입니다. 절하기에 편하고 참선할 때, 저린 발을 감추기도 좋고, 무엇보다 품새가 넉넉해서 차림에 마음 쓸 필요가 없어서 좋습니다. 그래서인지 절에 가면 한복을 입은 불자들을 흔히 만날 수 있습니다.

 

(스님만 수행자가 아니다”, 박호석 칼럼] 6- 재가자는 회색 법복 입어선 된다고?, 미디어붓다 2015-06-10)

 

 

그러나 법우님은 요즘 일부 불자들이 입는 법복에 대해서는 우려를 표한다. 수십만원에 달하는 디자인에 옷감과 염색의 고급화로 수백만이 되는 법복을 입고 다니는 세태를 말한다. 법복이 자기과시를 위한 수단이 되어 버렸을 개탄한다.

 

한국의 허핑턴포스트를 표방하는

 

박호석님은 미디어붓다에 칼럼을 쓰고 있다. 그러고 보면 같은 칼럼니스트라 볼 수 있다. 현재 미디어붓다에는 11명의 칼럼니스트들이 글을 올리고 있다. 한국의 허핑턴포스트지를 표방하는 미디어붓다에는 다양한 필진을 확보하기 위하여 애를 쓰는 것 같다. 그래서일까 참으로 다양한 사람들이 필진으로 참여 하고 있다.

 

미디어붓다 칼럼진을 보면 테라와다불교 빅쿠도 있고 IT관련 전문가도 있고 교육상담가도 있다. 박호석님의 경우 오랫동안 군불교포교현장에서 활동한 것에 대한 이야기 등을 쓰고 있다. 이렇게 다양한 경력의 사람들 중에 한명으로서 칼럼을 쓰고 있다. 대부분 실명을 사용하고 있지만 필명 진흙속의연꽃을 사용한다. 이에 대한 견제도 많았다. 왜 실명을 공개하지 않는지 왜 얼굴을 공개하지 않는지에 대한 비난을 받았다.

 

처음 미디어붓다로부터 칼럼을 제안 받았을 때 거절 하였다. 칼럼이라는 것은 특별한 사람들이나 쓰는 것으로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미디어붓다 운영진 중의 한분인 한북스님의 청을 받고 수락하였다. 그래서 블로거로서 글을 일주일에 두 차례 올리고 있다.

 

일주일에 두 번 글을 올린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매일 글을 생산해내고 있기 때문에 그 중에 선별해서 올린다. 올린 글이 종종 대문에 커다랗게 실린 경우를 본다. 그럴 경우 창피하고 부끄럽다. 마치 손을 가리고 손가락 사이로 보듯이 본다. 다른 필진의 글과 비교하여 차이가 남을 느끼기 때문이다. 그러나 개으치 않기로 했다.

 

한국판 허핑턴포스트를 지향하는 미디어붓다에서 바라는 것은 다양성일 것이다. 마치 화엄경에서 꽃으로 장엄된 화장세계와 같은 것이다. 화장세계는 크고 아름다운 꽃만으로 장엄된 세상은 아니다. 작고 보잘 것 없는 꽃, 들에서 피는 들꽃, 산중에서 저홀로 피고 지는 꽃 등 온갖 꽃으로 장엄된 세상이 화장세계이다. 그래서 어떤 이는 화엄에 대하여 잡화엄이라 한다. 온갖 잡스런 꽃으로 장엄된 세계라는 뜻이다. 이렇게 본다면 다양한 필진을 갖는 것은 매우 커다란 장점이다.

 

IT분야 칼럼니스트는 자신의 전문분야에 대한 글을 가르침과 매칭시켜 쓸 것이다. 수행경험이 풍부한 미얀마스님의 칼럼은 수행에 대한 이야기 위주이므로 역시 그 분야의 꽃이다. 이렇게 다양한 분야의 다양한 사람들이 이야기 꽃을 피었을 때 꽃으로 장엄된 화장세계가 된다. 사람도 마찬가지 일 것이다.

 

70억개의 꽃으로 장엄된 세상

 

이 세상에 수 많은 사람들이 있다. 지구상에 70억명의 사람이 있다면 70억개의 세상이 있는 것이나 다름 없다. 이는 부처님이 세상의 발생에 대하여 설명한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상윳따니까야에 따르면, 부처님은 세상의 발생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씀 하셨다.

 

 

“수행승들이여, 세상이 생겨난다는 것은 무엇인가? 시각과 형상을 조건으로 시각의식이 생겨난다. 그 세가지가 화합하여 접촉이, 접촉을 조건으로 느낌이, 느낌을 조건으로 갈애가 생겨난다. 갈애를 조건으로 집착이 생겨나며, 집착을 조건으로 존재가 생겨나고, 존재를 조건으로 태어남이 생겨나며, 태어남을 조건으로 늙고 죽음, 비탄, 고통, 근심, 절망이 생겨난다. 이것이 세상의 생겨남이다.” (S35:107)

 

 

부처님은 세상의 발생에 대하여 접촉에 따른 의식이 생겨나는 것으로 보았다. 안이비설신의 등 여섯 감각기관으로 대상을 인식해야 세상이 발생된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런 세상은 어떤 것일까? 철저하게 연기적세상이다. 원인과 조건과 결과로 상속되는 연기의 세상이다. 연기된 세상의 결말은 무엇일까? 그것은 늙고 죽음, 비탄, 고통, 근심, 절망이다.

 

세상의 발생은 다름 아닌 괴로움의 발생이다. 이렇게 본다면 세상은 괴로움으로 가득한 것이 된다. 만일 부처님이 이 세상은 괴로운 것이다라고 만 하였다면 염세주의자로 몰렸을 것이다. 오늘날까지 가르침이 전승되어 오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부처님은 괴로움으로 가득 찬 이 세상의 소멸에 대해서도 설하였다. 그것은 세상의 발생과 반대의 순서이다. 접촉에 의해서 갈애가 생겨나지만, 그 갈애가 남김 없이 소멸 되었을 때 늙고 죽음, 비탄, 고통, 근심, 절망도 소멸한다고 하였다. 이렇게 부처님은 사성제를 설하였다. 그래서 가르침이 오늘날까지 전승되어 온 것이다.

 

부처님의 세계관에 따르면 70억명의 인구는 각자의 세상을 가지고 살아 간다. 그 세상은 다름 아닌 꽃과 같다. 70억개의 꽃으로 장엄된 세상이다.

 

들에 가면 이름도 모르는 꽃이 피어 있다. 작은 들꽃이지만 들꽃에게는 하나의 세상이 열린 것이다. 오온으로 이루어진 인간 역시 하나의 세상을 갖는다. 살아서 인식한다는 것 자체는 자신의 세상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런 세상은 다름 아닌 연기된 세상이다. 어떤 근원이 있다거나 한마음에 있어서 연유된 것이라기 보다 시각접촉, 청각접촉 등 접촉에 따라 연기된 세상을 살고 있는 것이다.

 

초전법륜경을 낭송하고

 

휴휴재 니까야 강독모임에서는 맛지마니까야 모든 번뇌의 경(M1)’을 낭송하였다. 준비된 프린트를 돌아 가며 읽는 식으로 한 것이다. 강독하기 전에 간단한 의식을 행하였다. 그것은 삼귀의문과 예불문 낭독이다. 삼귀의문은 바른불교 취지에 맞게 마지막 구절은 거룩한 승가에 귀의합니다라 하였다. 노래가 아닌 낭송형식이다. 이어서 예불문으로서 초전법륜경을 함께 낭송하였다.

 

초전법륜경은 부처님이 처음으로 설법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특히 이 경은 가르침의 대강이 담겨 있다. 그것은 사성제에 대한 것이다. 괴로움이 무엇이고, 어떻게 괴로움이 발생되고, 어떻게 해야 괴로움이 소멸되는지, 그리고 괴로움의 소멸방법은 무엇인지에 대한 가르침이다.

 

우리나라 불자들은 법회할 때 반드시 대승경전의 정수라 불리우는 반야심경을 낭송한다. 그러나 이제 바뀔 때도 되었다고 본다. 부처님의 말씀 하시고자 하는 핵심 가르침이 담겨져 있는 초전법륜경을 낭송할 때도 된 것이다.

 

어떤 이는 말한다. 반야심경의 내용을 제대로 알면 마지막 주문인 아제 아제 바라아제..”할 때 감격의 눈물을 흘린다고 한다. 초전법륜경에서도 감격스런 대목이 있다. 부처님이 사성제를 세 번 굴려서 열두번 형태로 점검하여 마침내 더 이상 깨달을 것이 없는 위없는 깨달음에 이르렀을 때 아라한 선언을 한다. 경에서 부처님은 나에게 나는 흔들림 없는 마음에 의한 해탈을 이루었다. 이것이 최후의 태어남이며, 이제 다시 태어남은 없다.’라는 앎과 봄이 생겨났다.(S56.11)”라 하였다. 바로 이 아라한 선언을 접하면 반야심경에서 가떼 가떼 빠라가떼..”의 주문 못지 않게 감격스런 것이다.

 

좌선 중에 다리저림에 대하여

 

초전법륜경의 낭송에 이어 모든 번뇌의 경강독에 들어 갔다. 맛지마니까야 는 중간길이의 경으로 이루어져 있지만 모든 사람들이 한목소리로 처음부터 끝까지 독송하기에는 길다. 그래서 돌아 가면서 한구절씩 독송하는 형식으로 하였다.

 

독송이 끝나고 쟁점에 대하여 토론하였다. 모두 일곱 가지 번뇌와 이를 끊는 방법에 대하여 자신이 생각하는 바를 이야기 하는 형식이다. 일곱 가지 중에 가장 처음 나오는 관찰에 의해 끊어지는 번뇌가 가장 중요하다. 이를 가장 나중에 토론하기로 하고 먼저 나머지 여섯 가지에 대하여 토론 하였다.

 

여섯 가지 중에 인내에 의해 끊어지는 번뇌가 있다. 이에 대하여 많은 의견이 나왔다. 특히 좌선 중에 다리저림에 대한 것이 주요 이슈이었다. 참고 견디는 것이 맞는 것인지 때에 따라 위치를 바꾸어 주는 것이 맞는 것인지에 대한 것이다. 분명한 사실은 좌선이 고행을 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인내 하는 것에 대하여 고행으로 여긴 다면 부처님 가르침과는 거리가 먼 것이다. 다리가 저리면 이를 관찰하면 된다. 그렇다고 하여 고행하듯이 참고 견디면 안된다는 것이다.

 

어느 법우님이 이의를 제기하였는데

 

피함에 끊어지는 번뇌가 있다. 경에 따르면 적당하지 않은 자리나 적당하지 않은 장소, 그리고 악한 친구는 피하는 것이 좋다고 하였다. 이와 관련하여 피함으로 번뇌를 끊는다라는 제목으로 글을 하나 올렸다. 글에서 피함으로 끊어지는 번뇌를 언급하며 어리석은 자와 사귀지 말고 나와 동등하거나 나은 자와 사귀자는 취지로 글을 썼다.

 

어느 법우님이 이의를 제기 하였다. 부처님의 차별 없이 제도한 가르침과는 맞지 않다는 것이다. 이에 경전을 근거라 한 글쓰기라 설명하였다. 그리고 수행자의 입장에서 자신을 향상시키기 위하여 친구도 가려 사귄다는 취지로 답글을 올렸다. 그럼에도 한번 부정적인 생각을 가져서일까 점점 글이 거칠어 간다. 급기야는 글짜에 빠지는어리섞은일이지요라든가 피하라는부처님의가르침을 글짜로해석하는 어리섞은불자는돼지맙시다라 하였다. 지나치게 경전에 의존하는 것에 대한 비판이다.

 

글을 쓰다 보면 격려도 받지만 비난도 많이 받는다. 지난 9년 동안 글을 써 오면서 수도 없이 겪은 일이기에 어지간한 비난이나 비방에 대해서는 면역이 생겼을 정도이다. 어떤 이는 자신의 견해와 다르다 하여 초기경전의 한 구절을 인용하여 머리를 일곱조각으로라는 표현을 거침없이 사용하였다. 아마 인정하고 싶지 않아서 일 것이다.

 

카페에서 답글을 주신 법우님도 좀처럼 인정하지 않으려 하는 분위기를 알 수 있다. 그런 이면에는 아마 깔보고 무시하는 마음이 있어서인지도 모른다. 실제로 이어지는 답글을 보면 하물며법우님 같은 분이 감히 엉뜽한해석을 늘어눟고라든가 알량한이해를가지고 큰지혜나 얻은냥과 같은 표현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러거나 말거나 오늘도 내일도

 

경전을 근거로 글쓰기를 하고 있다. 그러다 보니 글이 자꾸 길어진다. 또한 주석의 견해를 싣다 보니 내용도 점점 깊어진다. 이렇게 긴 길이의 글을 그래도 꾸준히 보아 주는 법우님들이 있다는 사실이다. 블로그초창기 때부터 보어 오던 법우님들이다. 사실상 함께 공부하여 온 것이나 다름 없다.

 

법우님들로부터 종종 격려의 메세지도 받는다. 심지어 어느 법우님은 최근 간행된 단행본 상윳따니까야를 선물하기도 했다. 반면 안티도 많다. 안티카페나 안티블로그도 있을 정도이니 이쯤 되면 연예인이나 되는 것 같다. 그러거나 말거나 오늘도 내일도 쓸 뿐이다.

 

경전을 근거로 하여 글을 쓰면 정견이 된다. 그러나 경전에 근거하지 않는 이야기는 아무리 훌륭한 이야기를 해도 개인적인 견해에 지나지 않는다. 맛지마니까야 모든 번뇌의 경에서 피함에 의해 끊어지는 번뇌를 설명하기 위하여 법구경 더 낫거나 자신과 같은 자를 걷다가 만나지 못하면, 단호히 홀로 가야하리라. 어리석은 자와의 우정은 없으니.” (dhp61)라는 게송을 활용하였다. 이 게송은 부처님의 가르침이다. 이러한 가르침은 초기경전 도처에서 발견된다. 숫따니빠따 위대한 축복의 경에서도 어리석은 사람을 사귀지 않으며, 슬기로운 사람에 가까이 지내고,(stn259)”라 하여 어리석은 자를 멀리 하고 현자를 가까이 하는 것이 커다란 축복이라 하였다. 이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이다.

 

물론 부처님은 자만을 경계하였다. 그래서 자기를 남과 비교하여 동등하다거나 열등하다거나 우월하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Sn4.5)”라 하셨다. 그러나 수행의 측면으로 보았을 때는 어리석은 자 보다 현자를 가까이 하라고 하였다. 배우는 입장에서 본 다면 자신의 향상에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어느 정도 공부가 되었다면 어리석은 자도 교화 해야 할 것이다. 부처님이 깨달음을 이루고 난 후 45년 동안 길에서 보냈던 것처럼 알려 주어야 한다. 그래서 수행자의 본분사는 수행포교이다. 이는 다름아닌 상구보리하화중생이다.

 

여러 모로 많이 부족한 자이다. 어떻게 글을 쓰다 보니 필명이 알려지게 되었고 교계신문에 칼럼을 쓰게 되었다. 또 바른불교재가모임에서 니까야강독 진행을 맡게 되었다. 이런 일련의 과정이 불과 육개월 사이에 이루어진 것이다. 이전과 비교하면 천지차이의 변화이다. 이런 현상에 대하여 커밍아웃이라 표현한 바 있다.

 

부처님의 관심사는?

 

이날 니까야강독모임의 메인 주제는 유신견이었다. 모든 번뇌의 경에서 가장 핵심적인 내용은 관찰에 의해 끊어지는 번뇌(āsavā dassanā pahātabbā)’이다. 경에 따르면 나는 무엇인가?” 또는 이 존재는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가?” 15가지 의문 사항에 대하여 정신활동을 기울이지 말아야 할 것에 정신을 기울이는 것이라 하였다. 한마디로 쓸데 없는 생각을 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떤 것에 정신활동을 기울이어야 하는가? 그것은 사성제이다. 지금 당면한 괴로움을 먼저 해결하는 것이 가장 시급히 해야 될 일이지 우주에 대하여 또는 나에 대하여 탐구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것을 말한다.

 

관찰에 의해 끊어지는 번뇌는 사성제를 아는 것이다. 사성제를 안다는 것은 성자의 흐름에 들어 감을 말한다. 그런데 성자의 흐름에 들어 가기 위해서는 조건이 있다. 가장 먼저 유신견이 타파 되어야 한다. 개체에 실체가 있다는 견해의 타파를 말한다. 오온에 실체가 없음을 말한다. 그래서 숫따니빠따에서는 무화과 나무에서 꽃을 찾아도 얻지 못하듯, 존재들 가운데 어떠한 실체도 발견하지 못한다.(stn5)”라 하였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오온이 무아임을 말한다. 문자 그대로 해석하여 나가 없다라고 하여 단멸론으로 본다면 초등학생과 같은 발상이다. 여기서 말하는 무아는 오온무아를 말한다. 오온에 실체가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오온에 대하여 이런 게송이 있다.

 

 

물질은 포말과 같고

느낌은 물거품과 같네.

지각은 아지랑이와 같고

형성은 파초와 같고

의식은 환술과 같다고

태양의 후예가 가르치셨네.” (S22.95)

 

 

부처님의 관심사는 우리의 몸과 마음에 대한 것이었다. 우리의 몸과 마음을 떠나 우주를 탐구한다든가 실체도 없는 나를 찾는 것은 관심사가 아니었다. 오온이 무상하고 괴로운 것이고 실체가 없음을 알아 괴로움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한 것이다. 그래서 설한 것이 팔만사천법문이다.

 

마음이 일어나지 않으면 세상도

 

성자의 흐름에 드는 조건으로 유신견, 의심, 계금취의 타파이다. 그런데 이 세 가지는 사실상 같은 의미라 볼 수 있다. 개체에 실체가 있다는 견해를 갖는 것이 유신견이다. 유신견을 가지고 있으면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하여 의심할 수밖에 없다. 또한 유신견을 가지고 있으면 나를 찾는 수행을 하게 될 것이다. 이는 잘못된 수행방법이다. 잘못된 수행방법에 대한 것이 계율과 의식에 대한 집착(계금취견)이다. 이 모든 것이 유신견으로부터 시작된다.

 

유신견을 가지고 있는 한 성자의 흐름에 결코 들어 갈 수 없다. 유신견을 가지고 있으면 연기적 사유를 할 수 없다. 연기법은 연기의 연결 고리로 되어 있어서 도중에 끊어 버릴 수 있다. 그래서 열반을 성취할 수 있다. 그러나 유신견에 따른 한마음 사상을 가지고 있다면 삼매에 의한 합일의 경지를 이룰 수 있지만 끊을 수 없기 때문에 결코 열반을 성취할 수 없다. 열반은 오로지 연기의 가르침으로만 성립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다음과 같은 오도송이 나오게 된다. 흔히 부처님의 오도송이라 한다.

 

 

나는 집을 짓는 자를 찾으며

그러나 발견하지 못하고

많은 생애의 윤회를 달려왔으니,

거듭 태어남은 고통이다. (Dhp153)

 

집짓는 자여, 그대는 알려졌다.

그대는 다시는 집을 짓지 못하리.

서까래는 부서졌고 대들보는 꺽였다.

많은 생애의 윤회를 달려왔으나,

마음은 형성을 여의고

갈애의 부숨을 성취했다. (Dhp154)

 

 

이것이 부처님의 오도송이다. 부처님은 갈애를 부숨으로 열반을 성취하였다. 이는 사성제에서 멸성제에 해당되는 것이다. 갈애를 부수었다는 것은 더 이상 업을 짓지 않는다는 것을 말한다. 업을 짓지 않으면 업으로서 태어남은 없다. 마음은 대상이 있어야 일어나는데, 마음을 일으킬 대상이 없으니 마음이 일어나지 않는다. 마음이 일어나지 않으면 세상도 일어나지 않는다. 그래서 열반이 성취된다.

 

올려준 글 잘 보고 있어요

 

니까야강독모임이 끝났다. 비가 와서 차분한 분위기에서 진행 되었다. 그리 많지 않은 숫자이지만 그래도 논의는 치열했다. 아마 다양한 불교, 다양한 가르침 때문일 것이다. 그럼에도 법우님들끼리 법에 대하여 논의 하는 것은 즐거운 일이다.

 

부처님도 가르침에 대하여 논의하는 것을 장려 하였다. 그래서 차를 마시면서 밤새 법담을 나누어도 지치지 않는다. 이런 분위기는 중독인 것 같다. 대구에 사는 법우님은 매주 KTX타고 올라 오는데 이번 주는 오지 못하였다. 그 안타까운 마음을 ! 서울 올라 가고 싶어요라 하였다. 이쯤 되면 모임이 강한 중독성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늦은 시간 귀가 하였다. 먼 길을 가야 하기 때문에 마지막 전철은 타야 한다. 함께 하였던 법우님이 무언가 선물을 준다. 휴휴재 내려 가는 길에 준 것이다. 열어 보니 향을 넣을 수 있는 나무함이다.

 

 

 

 

 

 

한번도 향을 피워 본적이 없다. 일부로라도 사서 피워 보아야겠다. 맛지마니까야 강독 진행하는데 고마움의 표시로서 선물한 것이라 한다.

 

늦은 시간 귀가는 거의 전쟁에 가깝다. 지하철 역까지는 차를 가지고 온 법우님에게 신세를 져야 한다. 여러 명이서 함께 탔는데 어느 법우님이 이렇게 말했다. “올려준 글 잘 보고 있어요라고. 이런 말 한마디에 힘을 받는다.

 

 

2015-06-21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