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장할 때는 아름답게
피함으로 인해 끊어지는 번뇌가 있습니다. 적절하지 않은 자리나 장소에 가지 않는 것입니다. 또 악한 사람을 만나지 않는 것 입니다. 카톡방의 경우도 마찬가지라 봅니다.
카톡방에서 퇴장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초대 받았어도 하는 일에 방해가 되어 퇴장합니다. 그러나 말 없이 퇴장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퇴장하는 데는 나름대로 이유가 있을 겁니다. 가장 큰 이유는 번뇌를 야기하기 때문 일 것 입니다. 그것은 정신적 괴로움입니다. 이렇게 보았을 때 피함으로 인해 번뇌를 끊는다는 것은 맞는 말입니다.
카톡방을 퇴장하면 한존재가 사라지는 것과 같습니다. 카톡방을 세상으로 보았을 때 퇴장하는 사람은 죽은 것과 같습니다. 반대로 퇴장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는 한세상이 폭발되어 사라지는 것과 같습니다. 그렇다고 단멸론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렇게 입장에 따라 다릅니다. 세상사는 것도 이와 다르지 않다고 봅니다.
여기 세상이 있습니다. 세상을 사는 사람의 입장에서 본다면 애기가 태어났을 때한존재가 출현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한존재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는 세상이 출현 한 것입니다. 아이가 자라서 자아와 세상을 인식할 때 세상이 생겨난 것과 같습니다.
세상속에서 사는 사람들은 나고 죽는 것에 대하여 세상을 들락날락 하는 것 처럼보일 것입니다. 마치 카톡방에 초대 되어 활동하다 퇴장하는 사람을 보는 것과 같습니다. 카톡방을 떠나면 카톡방에서 어떤 대화가 오가는지 전혀 알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세상을 떠나면 세상에서 세상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더 이상 알 수 없습니다.
오늘 장문의 글을 남기고 어느 카톡방을 퇴장 하였습니다. 마치 죽음에 임박하여 유서를 남긴 심정과 같습니다. 글에서 가급적 좋았던 이야기, 감사의 이야기를 썼습니다. 떠나는 마당에 굳이 나쁜 인상을 줄 필요가 없었기 때문 입니다. 우리 인생도 이러지 않을까요?
사람들은 이 세상에 태어나, 이 세상을 살다가, 이세상을 떠납니다. 그 과정에서 신체적으로 언어적으로 정신적으로 갖가지 행위를 짓습니다. 그 행위에 대한 과보는 반드시 받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세상이치 입니다.
사람들은 지금 젊다고 하여,지금 건강하다고 하여, 지금 행복하다고 하여 천년만년 살 것처럼 착각합니다. 그러나 언제 죽을지 알 수 없습니다. 과연 내일이 올 수 있을까요?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 실제로 60년대 영화제목으로 사용된 바 있습니다. 사실 우리에게 내일은 없습니다. 오늘이 지나면 내일이 올지 내생이 시작될지 아무도 모릅니다.
날던 비행기가 추락하고 지붕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는가 하면 날던 비행기가 추락하고 달리던 열차가 탈선하고 항해하던 배가 뒤집히는 세상입니다. 고속도로에서 신나게 달리던 차가 갑자기 앞차의 브레이크로 인하여 연속충돌로 이어지기도 합니다. 오래 되어 삭은 간판이 언제 머리 위에 떨어질지 모릅니다. 지금 이렇게 시퍼렇게 살아있다고 해도 살아 있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여기에서 삶이 끝날 수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퇴장 하였을 때 삶의 흔적은 고스란히 남아 있습니다. 카톡방에서 글이나 사진의 흔적이 남아 있듯이 삶의 과정에서 신체적으로 언어적으로 정신적으로 지은 행위는 남아 있습니다.
이 세상을 퇴장할 때도 있을 겁니다. 이 세상을 퇴장하면 이 세상의 폭발이지만 남아 있는 사람들은 여전히 살아갑니다. 떠난 자는 알 수 없어도 살아 남은 자들은 그의 행위를 기억합니다. 이렇게 본다면 가급적 좋은 이미지를 남길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서 참, 안됐다”라거나 “그 사람 아깝다”라는 말을 들으면 다행일 것입니다. 그러나 좋은 인상을 주지 않았을 때는 “그놈 참 잘 죽었다”라는 말을 들을 겁니다.
유종의 미를 거두라고 하였습니다. 카톡방에서 퇴장할 때도 예의가 있습니다. 아무 말 없이 퇴장하면 불쾌감을 줍니다. 왜 퇴장하는지 이유를 설명하고 퇴장하면 좋은 이미지로 기억할 것 입니다. 그러나 아무 말 없이 나가 버리면 남아 있는 사람들에게 상처를 줍니다. 이 세상도 마찬가지 일 것 입니다. 그 동안 삶의 흔적을 남겼다면 정리해야 합니다. 자신의 의지와 무관한 것이 운명이기 때문에 항상 준비를 해야 합니다.
지금 이시점에서 인생의 대차대조표를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신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언어적으로 지은 행위가 ‘악하고 불건전한 것(Akusala)’이 더 많은지 반대로 ‘착하고 건전한 것(Kusala)’이 더 많은지 자신이 잘 앎니다. 그래서 가급적 착하고 건전한 행위가 더 많도록 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려면 늘 깨어 있어야 합니다. 깨어 있으면 계행은 저절로 지켜 집니다.
카톡방과 인생은 너무 유사합니다. 초대받을 때는 태어나는 것과 같고 퇴장할 때는 죽는 것과 같습니다. 글을 올리는 행위는 삶의 과정과 같습니다. 그러나 퇴장 할 때는 뒤가 깨끗하지 않습니다.
아무 말 없이 슬며시 퇴장하는 것은 예의가 아닙니다. 살다가 갑작스럽게 죽는 것과 다름 없습니다. 퇴장할 때는 아름다운 퇴장의 변(辯)을 하나 실어 주는 것이 좋습니다. 죽음에 이르렀을 때 유서를 남기는 것과 같습니다. 분명한 사실은 남아 있는 사람들은 모두 기억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최소한 “그놈 참 잘 죽었다”라는 소리를 듣지 않아야 합니다.
2015-06-22
진흙속의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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