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의 권위, 학자의 권위
한국의 불자들은 누구 말을 신뢰할까요? 거의 대부분 스님말이라면 끔벅 죽을 것 입니다. 그리고 PHD의 권위에 고개 숙일 것 입니다.
진제스님의 제바달다 비유를 비판한 바 있습니다. 조계종 종정 진제스님은 94년멸빈된 서의현 전총무원장복권을 요청하면서 “제바달도 불은을 입었느니..”라 하였습니다. 이에 대하여 경전적 근거가 없는 개인적인 견해라고 비판하였습니다. 그러자 카페에서 어느 법우님이 “종정스님은 무슨 근거로 그런 말씀을 하셨을까? 자비와 포용과 융합으로 하신말씀에다 또 글자를 들이대서 종정스님의 깊은 뜻을 따져?”라 합니다. 이어서 “감히 종정스님말씀에 토를달고 싶어서 견딜 수 없게 돼지. 스님들 비난에만 몰두하면 성불하나요?”라 합니다.
종정스님이 어떤 말을 하건 말건 보통불자가 간여할 사항이 아니라는 겁니다. 아마 이런 “삼보를 비방하지 말라”는 범망경 대승보살계에 따른 것이라 봅니다. 한국불교에서는 스님을 승보로 간주하기 때문에 스님을 비판하는 것에 대하여 삼보를 비방하는 것으로 보기 때문일 것입니다.
스님의 권위가 있다면 학자의 권위도 있을 것 입니다. 특히 불교학자가 말한 것이라면 더욱더 인정하겠지요. 그러나 가르침을 제대로 전하지 못한다면 그 순간 권위는 무너집니다.
불교닷컴에서 조성택교수의 기고문을 보았습니다. 깨달음지상주의의 한국불교를 비판하며 실천을 강조한 글 입니다. 그런 조성택교수와 일면식도 없습니다. 다만 2011년 종교평화선언 추진과 관련하여 블로그에서 신랄하게 비판한 바 있습니다.
조교수의 글 ‘이웃의 고통에 공감하지 않는 불교’를 보면 동의하기 어려운 내용으로 가득합니다. 실천수행을 강조하다 보니 무리수를 둔 것이라 보여 집니다. 조교수는 경전이나 교리에 대하여 비판적입니다. 교리에 대해서는 “불교는 부처님의 ‘가르침’이다. 오온, 무아, 연기법, 업설, 만법유식, 삼계허망 등 소위 교리는 ‘가르침’을 체계적으로 설명하기 위한 추상적이며 관념적인 개념들이다.”합니다. 이런 말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사실상 부정하는 말이나 다름 없습니다.
더구나 조교수는 교리에 대하여 “교리는 우리의 지적 요구를 충족시키고 세계를 지적으로 이해하는데 도움을 주지만 인격을 변화시키지는 못한다.”라 합니다. 이런 말에 역시 동의할 수 없습니다. 만일 사성제, 십이연기 등의 근본가르침이 우리의 삶을 변화 시키지 못하고 인격적 변화를 일으키지 못한다면 부처님이 말씀 하신 가르침은 폐기 해야 할 것입니다.
초기경전을 접하면서 마음의 안정을 찾았습니다. 마치 오랫동안 헤메이다 제자리로 찾아 간 것 같습니다. 그래서 팔만사천이나 된다는 방대한 법문을 모아 놓은 빠알리니까야를 접하면서 한구절 한구절에 감동을 하고 경탄을 하게 됩니다. 2500년 전에 이렇게 깊고 오묘한 진리의 세계를 밝혀 놓은 것에 대한 경외감입니다. 그러면서 의식의 확장이 이루어지고 인식의 지평이 넓어 집니다.
사성제의 진리를 제대로 알면 변화가 오지 않을 수 없습니다. 부처님이 괴로움에 대하여 “괴로움의 거룩한 진리란 이와 같다. 태어남도 괴로움이고 늙는 것도 병드는 것도 괴로움이고 죽는 것도 괴로움이고 슬픔, 비탄, 고통, 근심, 절망도 괴로움이다. 사랑하지 않는 것과 만나는 것도 괴로움이고 사랑하는 것과 헤어지는 것도 괴로움이고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것도 괴로움이다. 줄여서 말하지면 다섯가지 존재의 집착다발이 모두 괴로움이다.(S56.11)”라 하였을 때 과연 어느 누가 이를 부정할 수 있을까요?
이어지는 집성제에서 “괴로움의 발생의 거룩한 진리란 이와 같다. 그것은 바로 쾌락과 탐욕을 갖추고 여기저기에 환희하며 미래의 존재를 일으키는 갈애이다. 곧, 감각적 쾌락의 욕망에 대한 갈애, 존재에 대한 갈애, 비존재에 대한 갈애이다. (S56.11)”라 하였을 때 역시 이를 부정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요?
부처님이 멸성제에서 “괴로움의 소멸의 거룩한 진리란 이와 같다. 그것은 갈애를 남김없이 사라지게 하고 소멸시키고 포기하고 버려서 집착 없이 해탈하는 것이다.”라 하였을 때 이 또한 부정할 수 있는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부처님이 최종적으로 “괴로움의 소멸로 이끄는 길의 거룩한 진리란 이와 같다. 그것은 바로 여덟 가지 고귀한 길이다. 곧, 올바른 견해, 올바른 사유, 올바른 언어, 올바른 행위, 올바른 생활, 올바른 정진, 올바른 새김, 올바른 집중이다. (S56.11)” 라고 방법까지 제시하였을 때 진리로서 받아 들이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사성제의 진리를 제대로 알면 변화가 일어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콘단냐도 부처님의 설법을 듣고 나서 “무엇이든 생겨난 것은 그 모두가 소멸하는 것이다.”라고 순수하고 때묻지 않은 진리의 눈이 생겨났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할까요? 다름 아닌 성자의 흐름에 들어 갔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인격적 변화가 아니고 무엇일까요?
부처님의 가르침을 내 삶과 견주어 틀림 없음을 확인 하였을 때 진리로서 받아 들이고 삶의 변화를 일으키게 됩니다. 이런 것이 인격적 변화가 아닐까요? 그럼에도 조성택 교수는 어떤 근거로 교리에 대하여 “지적으로 이해하는데 도움을 주지만 인격을 변화시키지는 못한다.”라 했을까요?
조성택교수에 따르면 불자들은 교리나 경전 공부하는 것이 그다지 가치가 없다는 식으로 말합니다. 차라리 그 시간에 불쌍한 사람들 도와 주는 것이 부처님 가르침을 실천하는 길이라 합니다. 일부는 맞지만 전부 동의 하기 힘듭니다.
불자들은 삼보에 의지 합니다. 오계를 지키는 것 보다 삼보에 의지 하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따라서 불자인지 아닌지는 삼보를 의지처, 귀의처, 피난처로 삼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삼보에 가르침(Dhamma)이 있습니다. 불자들은 부처님 말씀에 의지 합니다. 그것은 원음이 담겨 있는 초기경전 입니다. 그럼에도 경전과 교리를 부정하는 듯한 불교학자의 견해를 어떻게 보아야 할까요?
스님의 권위, 학자의 권위가 있습니다. 삭발하고 승복입은 스님들이 하는 말이라면 부처님 말씀처럼 받아 들이는 것이 현실 입니다. 또 PHD타이틀을 가진 학자가 한마디 하면 권위가 부여 되는 것이 현실 입니다.
불자들은 스님이 말했다 하여 또는 학자가 말했다 하여 그대로 받아 들일 것이 아니라 가르침에 맞는지 따져 보아야 합니다. 그래서 가르침과 부합되면 받아 들이고, 맞지 않으면 개인적 견해로 간주해야 합니다. 부처님은 ‘다른 것에 의지 하지 말라(anaññasaraṇā)’고 하였습니다. 오로지 자신과 가르침에 의지하라고 하였습니다.
Attadīpā bhikkhave,
viharatha attasaraṇā anaññasaraṇā.
Dhammadīpā dhammasaraṇā anaññasaraṇā.
[세존]
“수행승들이여,
자신을 섬으로 하고 자신을 귀의처로 하지
다른 것을 귀의처로 하지 말라.
가르침을 섬으로 하고 가르침을 귀의처로 하지
다른 것을 귀의처로 하지 말라.” (S22:43)
2015-06-26
진흙속의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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