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들의 범계행위에 대하여 방관한다면
출가자 숫자가 두 자리
출가자수가 급감하고 있다고 한다. 교계신문에 따르면 최근 10년 새 출가자가 반으로 줄어 들었다고 한다. 더구나 출가연령도 45세 이상의 고령이 대부분이라 한다. 이렇게 출가자가 급감하게 되자 올해 사미와 사미니계 수계식에서 사상 처음으로 두 자리 숫자를 기록하였다고 한다.
출가자가 급감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출산율 감소와 함께 물질문명의 발달로 독신수행자의 삶이 그다지 매력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이는 기독교와 매우 대조적이다. 기독교의 경우 매년 수천명의 신학생들이 졸업한다. 이렇게 숫자가 많은 이유는 성직에 매력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결혼을 하여 가정을 가질 수 있고 무엇보다 존경받을 수 있는 분위기와 환경이 조성되어 있다는 것이 큰 장점이라 본다.
출가자가 많다고 하여 반드시 훌륭한 수행자가 많이 나오리라는 보장은 없다. 그럼에도 많은 출가자가 있다는 것은 그 중에 뛰어난 자가 있을 가능성이 높다. 오늘날 기독교에서 수천명의 신학생이 배출 되는데 그 중에는 뛰어난 인재가 있을 수밖에 없다.
인재들이 많았을 때 종교 역시 발전할 것이다. 그런 면으로 본다면 한국불교는 확실히 쇠퇴기에 접어 들었다. 세 자리도 아니고 두 자리의 출가자숫자라면 네 자리의 기독교 신학생들과 비교 대상이 되지 않는다.
출가자를 비난하면 안된다고
이 세상에서 불교만큼 뛰어난 종교는 없다. 사실상 불교는 ‘종교(宗敎)’이다. 가장 으뜸 되는 가르침이라는 말이다. 그럼에도 출가자가 급감한다는 것은 여러 가지 문제가 없지 않을 수 없다. 가장 큰 문제는 한국불교가 그다지 청정하지 않다는 것이다. 이는 여러 경로를 통하여 확인 할 수 있다.
절에 오래 다닌 불자들의 이야기를 들어 보면 승보, 법보, 불보사찰의 스님들의 타락상에 말해 준다. 삼보사찰이 이 정도라면 다른 사찰의 스님들은 불을 보듯이 뻔할 것이다.
스님들의 범계행위에 대하여 종종 글을 올린다. 이에 스님의 일에 간여한다고 비난하는 사람들도 있다. 어떤 이는 이런 글을 보내 왔다.
재가 불자가 출가 불자의 문제를 도저히 그대로 보고 있지 못하겠다고 하며 정화하고자 하면 어떻게 해야 할까?
재가 불자가 출가 불자의 행위에 대해 정화 차원에서 노력하고자 하면 출가해야 한다고 본다.
출가하여 동일한 출가 집단의 일원으로 정화의 노력을 해야 한다고 본다.
아니면, 재가 불자라고 할 수 없는 사회인으로 살아가면서 또는 다른 종교인으로 살아가면서 비리를 들추어내고 비방하는 것에 대해서는 무엇이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삼귀의하고 오계를 받아 지녀야 하는 재가 불자로서는, 출가 불자의 행위에 대해서는 어떤 말도 하지 않고 재가 불자의 할 일만 하는 것이 바른 길이라고 본다.
(H법우님)
H법우님의 글에서 일부를 옮긴 것이다. 법우님에 따르면 재가불자가 출가자를 비난하면 안된다는 것이다. 출가자를 바로 잡으려거든 출가해서 바로 잡으라는 것이다. 이런 주장에 일부 동의 할 수 있지만 전부 동의할 수 없다. 출가자자 잘 못 된 길로 들어 섰을 때 “스님 그렇게 하면 안됩니다.”라고 말 할 수 있어야 한다. 이렇게 말해 주는 것은 비난이나 비방이 아니다. 불자로서 당연히 해야 할 말을 하는 것이다.
재가자의 적극적인 개입
율장 대품을 보면 재가자의 적극적인 개입에 따라 지켜야 할 항목이 새로 만들어졌다. 거의 대부분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다. 한때 왕의 코끼들이 죽었다. 기근이 들어 사람들이 코끼리 고기를 먹었다. 사람들은 탁발하는 수행승들에게 코끼리 고기를 주었다. 이에 어떤 사람들은 “어찌 싸끼야의 아들이 코끼리 고기를 먹을 수 있단 말인가? 코끼리는 왕의 표상이다. 만약 왕이 알면 마음에 들지 않을 것이다.”(Vin.I.218) 라고 혐책하고 분개 하였다고 기록 되어 있다.
이에 부처님은 뭐라 하였을까? 부처님은 “수행승들이여, 코끼리 고기를 먹어서는 안된다. 먹는다면 악작죄가 된다.”라고 말씀 하셨다. 만일 누구도 코끼리 고기 먹는 것을 비난하고 혐책하지 않았다면 수행승들은 계속 코끼리 고기를 먹었을 것이다.
율장의 성립 과정을 보면 공동체생활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일에 대하여 세세하게 규정해 놓았다. 그때그때 일이 발생될 때마다 새로운 규정들이 생겨난 것이디. 거기에는 재가자와 관련 된 것이 매우 많다. 재가자의 눈에 보았을 때 출가자로서의 위의에 맞지 않았을 비난과 혐책이 뒤따랐다. 이렇게 하여 세세한 율장이 성립 되었는데 이는 궁극적으로 출가수행승의 출가목적을 달성하게 하기 위한 것이라 볼 수 있다.
탁발을 거부한 수행승
출가자는 재가자의 도움 없이는 살 수 없다. 만일 재가자의 도움 없이 홀로 자생할 수 있다면 이미 출가수행자라 볼 수 없다. 머리깍은 재가자에 지나지 않는다. 부처님 당시에도 그런 수행자가 많았을 것이다. 이는 율장대품에서 ‘출가자의 네 가지 기초생활수단’을 보면 알 수 있다.
율장대품에 따르면 한때 라자가하에서 훌륭한 공양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졌다. 그때 한 바라문은 “이 수행자 싸끼야의 아들들은 계행이 쉽고 삶이 평안하고 좋은 음식을 먹고 바람이 들이치지 않는 침상에서 잔다. 나도 수행자 싸끼야의 아들들 가운데 출가하면 어떨까?”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잘 먹고 잘 살기 위해서 출가하고자 한 것이다. 이런 예는 오늘날이라고 해서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출가목적이 불분명한 케이스에 해당된다.
바라문은 수행승들에게 다가가서 출가신청을 했다. 수행승들은 그를 출가시키고 구족계를 주었다. 하지만 그가 출가 하였을 때 음식의 지속적인 공양이 중단 되었다. 아마 청식 등이 중단 되었기 때문으로 본다. 이에 수행승들은 “벗이여, 오십시오. 탁발하러 갑시다.”라 하였다. 이런 제안에 바라문출신 수행승은 뭐라 하였을까?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출가수행승]
“벗이여, 내가 탁발해야 하다니, 그러기 위해서 출가한 것이 아닙니다. 만약에 당신이 준다면, 내가 먹겠지만, 주지 않는다면, 환속하겠습니다.”
(출가자의 네 가지 기초생활수단, 율장대품 Vin.I.58, 전재성님역)
바라문출신 출가수행승은 탁발을 거부하였다. 빌어먹기 위해서 출가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재가자들이 밥을 해서 사원으로 가져와 먹는 것이라든가, 집으로 초대하여 먹는 것, 또는 다른 수행승이 탁발해 온 것을 함께 먹는 것은 가능하지만 걸식하는 것만큼은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에 수행승들이 “벗이여, 그대는 배를 채우기 위해서 출가했단 말입니까?”라고 물었다. 그러자 그는 “벗이여, 그렇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이 어리석은 자여(moghapurisa)”
수행승들은 바라문출신 수행승을 비난하였다. 그리고 이런 사실을 부처님에게 알렸다. 그러자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 하셨다.
"vigarahi buddho bhagavā: kathaṃ hi nāma tvaṃ moghapurisa, evaṃ svākkhāte dhammavinaye udarassa kāraṇā pabbajissasī? Netaṃ moghapurisa, appasannānaṃ vā pasādāya pasannānaṃ vā bhiyyobhāvāya. Atha khvotaṃ bhikkhave appasannānaṃ ceva appasādāya pasannānañca ekaccānaṃ aññathattāya"ti.
[세존]
“어리석은 자여, 그대는 이와 같이 잘 설해진 가르침과 계율 가운데 배를 채우기 위해서 출가할 수 있단 말인가? 어리석은 자여, 그것은 아직 청정한 믿음이 없는 자를 청정한 믿음으로 이끌고, 이미 청정한 믿음이 있는 자를 더욱더 청정한 믿음으로 이끄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아직 청정한 믿음이 없는 자를 불신으로 이끌고, 이미 청정한 믿음이 있는 자 가운데 어떤 자들을 타락시키는 것이다.”
(출가자의 네 가지 기초생활수단, 율장대품 Vin.I.58, 전재성님역)
부처님이 제자들에게 견책하는 말이 있다. 일종의 심한 욕이라 볼 수 있는데 그것은 “이 어리석은 자여(moghapurisa)”라는 말이다. 이것이 부처님이 할 수 있는 최대의 욕이라 볼 수 있다.
“탁발식을 기초생활수단으로 삼는다”
어리석은 바라문 출신 수행승은 배를 채우기 위해 출가하였다. 이에 비난과 혐책이 잇따르자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생활규칙을 정하였다.
Anujānāmi, bhikkhave, upasampādentena cattāro nissaye ācikkhituṃ: 'piṇḍiyālopabhojanaṃ nissāya pabbajjā. Tattha ke yāvajīvaṃ ussāho karaṇiyo. Atirekalābho: saṅghabhattaṃ uddesabhattaṃ nimattanaṃ salākabhattaṃ pakkhikaṃ uposathikaṃ pāṭipadikaṃ
[세존]
“수행승들이여, 구족계를 받는 자에게 네 가지 기초생활수단에 대하여 알리는 것을 허용한다.
1) 출가자는 탁발식을 기초생활수단으로 삼는다. 그것에 대해서 목숨이 다할 때까지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별도로 얻을 수 있는 것으로는 승차식, 별청식, 초대식, 행주식, 십오일식, 포살식, 월초일식이 있다.
(출가자의 네 가지 기초생활수단, 율장대품 Vin.I.58, 전재성님역)
부처님은 ‘탁발식(piṇḍiyālopabhojanaṃ)’을 기초로 삼는다고 하였다. 이는 ‘food received through collecting alms’으로 설명된다. 발우를 들고 음식을 구하는 것을 말한다. 그것도 ‘목숨이 다할 때 까지 노력을 기울여야한다.’고 하였다. 과연 우리나라 수행자들 중에 몇 명이나 해당될까?
승차식, 별청식, 초대식
율장에 따르면 탁발식을 기본으로 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예외 규정도 있다. 승차식, 별청식, 초대식, 행주식, 십오일식, 포살식, 월초일식 같은 것이다.
승차식(saṅghabhatta: food given to the community)이란 “재가자가 특정한 수행승을 지정하지 않고 참모임에 고루 차례에 따라 보시하는 음식을 말한다.”(279번 각주)라고 설명되어 있다. 대중공양을 말한다. 그런데 차례 대로 하는 것이다. 음식을 만들어 승가로 찾아가 대중공양하는 것을 말한다. 이렇게 할 경우 탁발나갈 일이 없을 것이다.
별청식(uddesabhattaṃ)이란 “재가자가 특정한 수행승을 지정하여 보시하는 음식이다.” (280번 각주)라 하였다. 오늘날 특정한 신도단체에서 안거중에 있는 스님을 찾아 음식공양하는 것이 이에 해당된다고 볼 수 있다.
초대식(nimattanaṃ)이 있다. 이를 한역에서는 청식(請食)이라 한다. 초대받아 식사하는 것을 말한다. 청식과 관련하여 ‘“공짜밥은 없다” 스리랑카의 청식(請食)제도(2012-10-14)’라는 제목으로 글을 올린 바 있다. 어느 재가불자가 스리랑카 청식제도를 보고서 글을 올린 것에 대한 소감문을 작성한 것이다.
글을 올린 법우님에 따르면 스리랑카의 사찰에는 공양간이 없다고 하였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조리해서 먹지 않는 것을 말한다. 쌀을 사다 놓고 음식재료를 사와서 만들어 먹지 않음을 말한다.
청식과 관련하여 마성스님 글에 따르면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사찰에서 음식을 만들지 않는다. 승려가 자기 자신이나 다른 사람을 위해 요리하는 자체가 금지되어 있다. 남방불교에서 신도들이 사찰에서 음식을 얻어먹는다는 것은 도저히 생각할 수조차 없는 일이다.” (출가자의 밥값, 마성스님) 라 하였다.
예외 없는 법은 없다
부처님은 네 가지 기초생활수단에 대하여 말씀 하셨다. 음식에 이어서 옷과 처소, 그리고 의약품에 대한 것을 보면 다음과 같다.
"Paṃsukulacīvaraṃ nissāya pabbajjā. Tattha te yāvajīvaṃ ussāho karaṇīyo. Atirekalābho: khomaṃ kappāsikaṃ koseyyaṃ kambalaṃ sāṇaṃ bhaṅgaṃ
"Rukkhamūlasenāsanaṃ nissāya pabbajjā. Tattha te yāvajīvaṃ ussāho karaṇiyo. Atirekalābho: vihāro aḍḍhayogo pāsādo hammiyaṃ guhā.
"Pūtimuttabhesajjaṃ nissāya pabbajjā. Tattha te yāvajīvaṃ ussāho karaṇiyo. Atirekalābho: sappi navatītaṃ telaṃ madhu phāṇitanti. "
2) 출가는 분소의를 기초생활수단으로 삼는다. 그것에 대해서 목숨이 다할 때 까지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별도로 얻을 수 있는 것으로는 아마옷, 면옷, 비단옷, 모직옷, 삼베옷, 모시옷이 있다.
3) 출가는 나무밑처소를 기초생활수단으로 삼는다. 그것에 대해서는 목숨이 다할 때 까지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별도로 얻을 수 있는 것으로는 정사, 평부옥, 전루, 누옥, 동굴이 있다.
4) 출가는 진기약을 기초생활수단으로 삼는다. 그것에 대해서 목숨이 다할 때까지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별도로 얻을 수 있는 것으로는 버터기름, 버터, 꿀, 당밀이 있다.
(출가자의 네 가지 기초생활수단, 율장대품 Vin.I.58, 전재성님역)
분소의(Paṃsukulacīvara)는 ‘a robe made of rags taken from dust-bins’로 설명된다. 시체나 쓰레기 등에서 가져온 천을 이용하여 만든 옷을 말한다.
나무밑처소(Rukkhamūlasenāsana)는 한역으로 수하좌(樹下坐)라 한다. 진기약(Pūtimuttabhesajja)은 “소의 오줌에 미로발란 나무의 쓰디쓴 열매를 재어서 썩힌 것으로 치료제나 강화제로 쓰인다.”(291번 각주) 라 하였다.
네 가지 기초생활수단을 보면 예외는 모두 다 있다. 예외 없는 법은 없다는 것을 말하는 것 같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기본은 탁발, 분소의, 수하좌, 진기약 이렇게 네 가지이다. 이 네 가지에 대하여 “목숨이 다할 때까지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라고 하였다. 과연 이렇게 노력을 기울일 수행자가 얼마나 될까? 우리나라 같으면 가능한 일일까?
“저는 불교를 버렸습니다”
테라와다불교에서는 가급적 부처님가르침대로 살려고 노력한다. 그렇다면 한국은 어떤가? 부처님의 가르침대로, 율장정신대로 사는 수행자는 과연 얼마나 될까? 한국에서 테라와다불교가 도입되어 창립되었다고 하지만 탁발에 의존하는 빅쿠가 얼마나 될까? 아마 거의 없을 것이다.
오늘날 한국에서 불교는 사라져 가고 있다. 어떤 재가불자는 한국에서 불교는 이미 사라졌다고 하였다. 그리고 불교를 버렸다고 하였다. 삼보사찰이 있지만 어느 곳 하나 청정한 곳이 없다는 것이다. 청정비구라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세월이 흐를수록 청정과는 거리가 멀다는 것이다.
어떤 법우님의 이야기에 따르면 스님들이 식당에서 대 놓고 고기를 먹고 술을 마시는 것이 보통이라 한다. 또 어떤 법우님이 말하기를 이름을 대면 알만한 스님이 신도에게 노골적으로 성을 요구하였다고 한다. 겉으로 보기에는 존경받는 스님임에도 가정이 있는 여신도에게 여러 차례 집요하게 성을 요구하여 마침내 관철시켰다는 것이다. 이런 소문이 알게 모르게 퍼져 있다. 절의 내부 사정을 잘 아는 법우님들은 일상적으로 일어나는 일이라 한다. 다만 절의 내부 사정을 잘 모르는 불자들은 스님들이 아직도 이슬만 먹고 사는 존재로 알고 있다는 사실이다.
스님들의 범계행위에 대하여 알만한 사람들은 다 알고 있다. 청정비구라 하지만 한꺼풀만 들어가 보면 청정하기는커녕 악취만 나는 스님들이 무척많다는 사실이다. 이런 사실에 절망하여 법우님은 “저는 불교를 버렸습니다”라 하였다. 한국불교를 버렸다는 말이다.
스님들의 범계행위에 대하여 방관한다면
스님들의 범계행위에 실망하여 불교를 떠난 사람들도 많다. 한국불교에서 더 이상 희망을 보지 못한 것이다. 그래서 재가자들이 한국불교의 위기상황으로 규정하고 ‘파사현정’하고자 한 것이다. 그럼에도 스님들일이라 하여 재가자가 개입하는 것에 대하여 불온시 한다면 바람직한 것일까?
남방 테라와다 불교나 계율이 살아 있는 대만불교에서는 스님들이 잘못을 저지르면 그 자리에서 지적한다고 하였다. 이는 스님들이 계를 지키도록 보호 해주는 것이다. 그리고 재가자들에게도 율장교육을 시킨다고 하였다. 계를 지키기 위하여 얼마나 노력하는지 알게 하는 목적이 있다고 한다.
만일 스님들이 술을 마시고 고기를 먹고 음행을 하는 등 막행막식하는 것에 대하여 보고서도 못 본척하고 알면서도 모르는 척 한다면 어떻게 될까? 아마 조만간 한국불교는 쇠퇴하여 사라지고 말 것이다. 스님들의 범계행위에 대하여 지적하지 못하고 스님들 일이라 하여 방관한다면 한국불교가 망하는 길로 가는 것에 동참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참다운 불자라고 볼 수 없다.
누군가 “출가 불자의 행위에 대해서는 어떤 말도 하지 않고 재가 불자의 할 일만 하는 것이 바른 길이라고 본다.”라고 하였다면 이를 어떻게 보아야 할까?
2015-10-02
진흙속의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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