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 떠나는 여행

끌리는대로 땡기는대로 오욕락으로

담마다사 이병욱 2015. 10. 2. 17:58

 

끌리는대로 땡기는대로 오욕락으로

 

 

어느 날 먼 길을 가던 나그네가 있었다. 캄캄한 밤길을 걷다가 커다란 싱크홀에 빠지고 말았다. 다행히 칡넝쿨이 있어서 붙들고 있었기 때문에 바닥으로 추락하지 않았다.

 

줄 하나에 의지한 채 나그네는 밤을 보냈다. 다리에 부상을 입어서 올라 갈수도 없는 처지였다. 다음날 날이 밝아서 아래를 보니 아래에는 독사들이 우글거리고 있었다. 위를 쳐다보니 맹수가 배회하고 있었다. 그런데 바로 위에 쥐 두마리가 번갈아 가며 칡넝쿨 줄을 갉아 먹고 있었다.

 

나그네는 절망하였다. 위로 올라 갈수도 밑으로 내려 갈수도 없었다. 줄 하나에 의지 하고 있지만 쥐들이 갉아 먹고 있기 때문에 끊어지는 것은 시간문제이었다. 이때 얼굴을 때리는 것이 있었다. 달콤한 꿀이었다. 허기진 나그네는 너무나 달콤한 꿀을 혀로 핥아먹었다. 그러자 잠시 죽음의 공포에서 벗어났다. 중학교 때 들은 이야기를 상상력으로 구성해 본 것이다.

 

 

岸樹井藤

 

 

중학교 때 불교학교를 다녔다. 추첨으로 들어간 학교가 그때 당시 종로5가 근처 연지동에 있었던 동대부중이었다. 중학교 1학년 때 일주일에 한번 불교시간이 있었다. 불교선생님으로부터 위에 언급한 흰쥐검은쥐 이야기를 들었다.

 

교법사라 불리는 불교선생님은 서른 안팍의 젊은 선생님이었다. 이마가 훤하고 머리는 반곱슬이고 얼굴은 희고 늘 온화한 미소를 지어서 부처님처럼 보였다. 나중에 알고 보니 동국대 불교학과 교수가 되어 있었다.

 

불교선생님은 칠판에 그림까지 그려 가면서 흰쥐검은쥐 이야기를 해 주었다. 여기서 흰쥐와 검은쥐는 낮과 밤을 상징한다고 하였다. 발 아래의 독사는 탐진치 삼독을 뜻하고 얼굴에 떨어지는 꿀은 감각적 쾌락을 상징한다고 하였다. 선생님의 이야기를 듣자 우리들이 줄에 매달려 사는 것과 다름 없다는 마음이 들었다.

 

줄은 언젠가 끊어지게 되어 있다. 그런 와중에 달콤한 꿀은 죽음의 공포를 잊어버리기에 충분하였다. 어린나이에 들었던 흰쥐검은쥐 이야기는 매우 생생하였다.

 

흰쥐 검은쥐 이야기를 초기경전에서 발견하지 못했다. 대승경전 불설비유경에 있는 안수정등이라 한다. 이 교훈적 이야기를 보면 우리가 사는 현실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언제 죽을지 모르는 현실에서 오로지 감각적욕망에 의지해서 하루하루 살아 가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요즘 TV에서는 볼거리로 넘쳐난다. 근래에는 종편까지 가세해서 케이블채널까지 합하면 수 십개채널이다. 남들이 웃고 떠드는 것을 즐기다 보면 시간 가는 줄 모른다. 또 한편으로 사람들은 음악을 즐겨 듣는다. 종종 청춘을 돌려다오~”라며 구성지게 한가락 뽑으며 거리를 다니는 사람도 보았다. 어떤 이 들은 이어폰을 끼고 스마트폰에 저장해 둔 음악을 듣고 다니기도 한다.

 

시도 때도 없이 먹거리프로가 유행이다. 오로지 눈으로만 볼 수 있는 먹방을 보면 군침이 돈다. 실제로 거리에서 코를 자극하는 고기굽는 냄새에 자극받아 사람들은 음식점으로 향하기도 한다. 이 뿐만이 아니다. 도시의 화려한 네온사인에 도시는 잠들지 않는다. 먹고 마시고 배설하는 즐거움으로 사람들은 살아간다.

 

사람들이 TV를 보면 그 순간만큼은 삶의 괴로움을 잊어 버린다. 마치 달콤한 꿀과 같은 것이다. 이런 꿀맛은 눈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다. 아름다운 음악을 듣는 것도, 맛있는 음식을 먹는 것도, 이성과 보드라운 잠자리를 함께 하는 것도 꿀과 같은 것이다. 오욕락을 즐김으로서 죽음의 공포를 잊어 버리는 것과 같다.

 

꿀맛에 탐닉하다 보면 줄은 끊어지게 되어 있다. 달이 가고 해가 감에 따라 생명의 줄은 점점 얇아 질 것이다. 그럼에도 감각적 욕망은 그칠 줄 모른다. 줄이 끊어지는 그 순간까지도 꿀맛을 회상하며 죽음의 공포를 벗어나고자 한다.

 

흔히 사람들이 말하기를 즐기며 살자고 한다. 정년퇴임한 사람에게 이제 남은 여생을 즐기며 사세요라고 말한다. 힘들게 살았으므로 즐겨야 한다는 것이다. 또 어떤 이들은 한살이라도 젊었을 때 열심히 즐기는 삶을 살아야 늙어서 후회가 없다라고 말한다. 또 어떤 사람들은 먹는 재미로 산다. 먹는 재미가 없으면 사는 의미가 없다고 한다. 이렇게 본다면 즐김과 재미는 같은 말이다. 그리고 즐길 락()과도 동의어이다. 그런데 즐길 락자는 행복과 동의어라는 사실이다. 이렇게 본다면 재미, 즐거움, 행복은 모두 같은 뜻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어떤 이는 땡기는대로산다고 한다. 배고프면 먹고 졸리면 자는 식이다. 그러다 보니 욕망대로 사는 꼴이 되어 버린다. 만약 스님이나 단체를 이끄는 지도자가 끌리는대로살면 어떻게 될까? 막행막식으로 될 것임에 틀림없다. 그럼에도 소위 깨달았다고 하는 자들은 걸림없는 삶을 말한다. 그러나 깨닫지 못한 사람들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 커다란 혼란을 초래한다. 끌리는대로 살면 수행할 필요가 없다고 보기 때문이다. 탐진치를 소멸하기 위하여 수행한다고 하는데 욕망대로 산다고 하면 굳이 힘들게 수행할 필요가 있을까?

 

어떤 이는 불교가 이고득락의 종교라한다. 자칫 즐거움과 재미를 추구하는 종교로 오인 받을 수 있다. 물론 행복의 스펙트럼은 매우 넓다. 감각적쾌락도 행복이고 선정삼매도 행복이다. 또 열반도 행복이라 하였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행복이라 하면 즐거운 상태를 말한다. 속되게 말하면 재미가 행복인 것이다. 그런 행복, 즐거움, 재미는 일시적이고 잠정적이라는 사실이다.

 

행복을 추구하는 종교는 한계가 있다. 재미라는 것도 나이 들고 병이 들면 추구할 수 없다. 행복전도사라 자처하는 방송인은 부부가 함께 자살하였다. 그래서일까 요즘은 행복 대신 힐링이라는 말을 사용한다. 그래서 힐링콘서트가 대유행이다. 유명 스타스님들도 힐링법회를 열어 삶에 지친 자들의 상처를 보듬어 준다. 이렇게 본다면 행복만 추구하는 삶, 즐거움만 추구하는 삶, 재미만 추구하는 삶에는 한계가 있음을 알 수 있다.

 

힐링 다음은 무엇일까? 전문가들에 따르면 콜링(calling)’이라 한다. 우리말로 표현하면 소명이 된다. 영성에 따른 종교적 생활을 의미한다. 어쩌면 힐링콘서트가 아니라 조만간 콜링콘서트가 열릴지 모른다.

 

한평생 감각적 쾌락에 따른 욕망으로 산 사람이 있다. 더 이상 재미를 보지 못하였을 때 행복하지 않다고 생각할 것이다. 밧줄의 끈이 얇아져 끊어질 때가 되었을 때 이제 무슨 재미로, 무슨 즐거움으로, 무슨 행복으로 살아갈까?

 

밧줄이 두꺼울 때, 쥐가 밤낮으로 갉아 먹기 전에 발판을 마련해 놓아야 한다. 발판을 딛고 또 다른 발판을 마련해 놓는다. 이렇게 발판을 만들다 보면 마침내 싱크홀에서 탈출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대부분 사람들은 재미와 즐거움과 행복을 추구한다. 재미가 있어야 하는 것이다. 만일 재미가 없다면 심심해, 심심해를 연발할 것이다. 무료하고 심심힌 것을 참지 못한다. 가공할 권태에 못이겨 눈으로 귀로 코로 혀로 감촉으로 재미를 찾는다. 이마저 없으면 망상이라도 한다. 이제는 재미, 즐거움, 행복에 겨웠는지 치료 받고자 한다.

  

대부분 사람들은 끌리는대로 땡기는대로 오욕락으로 산다. 배고프면 먹고 갈증나면 마시고 졸리면 잔다는 식의 삶의 종착지는 어디일까? 달콤한 꿀맛에 빠져 있을 때 독사들이 우글 거리는 바닥에 떨어지고 말 것이다. 지금 여기서 알아차려 물질과 정신을 아는 지혜, 원인과 결과를 아는 지혜, 부처님의 가르침으로 싱크홀을 빠져 나갈 발판을 이 생에서 마련해 놓지 않아야 하지 않을까?

 

 

2015-10-02

진흙속의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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