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 떠나는 여행

어쩌다 축생으로 태어났을까?

담마다사 이병욱 2016. 3. 25. 10:22

 

어쩌다 축생으로 태어났을까?

 

 

흔히 개팔자가 상팔자라 한다. 분주하고 고생스런 삶을 살 때 개 보다 못한 삶을 일컫는 말이다. 주인이 잘 먹여 주고 돌봐 주고 심지어 가족처럼 대하는 것을 볼 때 사람팔자 보다 더 나은 듯이 보여서 하는 말일 것이다. 그럼에도 개를 볼 때 마다 측은한 마음이 일어나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아무리 개팔자가 상팔자라 하지만 마음 한 구석에는 어쩌다 축생으로 태어났을까?”라는 연민이 있다.

 

대화방에 S거사님이 강아지 사진을 올렸다. 두 마리의 흰 강아지가 무언가를 열심히 먹고 있다. 마치 꼬리를 흔들며 먹는 것을 즐기는 것 같다. 또 한 사진을 보면 털이 복실복실하게 나서 귀엽고 사랑스럽게 보이는 강아지가 있다. 이 사진을 보고서 어쩌다 축생으로 태어났을까?”라는 말을 남겼다.

 

 

 

 

 

 

 

 

 

 

 

대화방에는 스님도 있다. 충남 S시에 소재하고 있는 C사는 신도들뿐만 아니라 몇 분의 스님도 초대되어 있다. 그런데 어느 스님이 강아지사진과 멘트를 보고서 주인공을 찾으면 알 수 있어요. 인연에 대해서도. OO합장.”이라 했다. 개가 축생으로 태어난 것에 대하여 주인공을 찾으면 알 수 있다는 것이다. 더구나 축생으로 태어난 인연도 알 수 있을 것이라 했다. 마치 화두를 대하는 듯 했다.

 

부처님 가르침에 따르면 모든 존재들은 육도 윤회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그 윤회는 시작을 알 수 없다고 했다. 왜 그럴까? 그것은 무명과 갈애 때문이다. 그래서 무명에 덮인 뭇삶들은 갈애에 속박되어 유전하고 윤회하므로 그 최초의 시작을 알 수가 없다.”(S15.11) 라 한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한량없는 윤회에서 우리는 언젠가 개로 태어난 적도 있을 것이다. 그것도 한번만이 아니라 한량 없이 태어났을 것이다. 다만 우리가 모르고 있을 뿐이다.

 

개를 보면 측은한 마음이 일어난다. 측은지심이다. 그렇다고 연민의 마음만 낸다면 개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 기분이 좋지 않을 것이다. 한편에서는 연민을 보내고 또 한편에서는 연민을 당한다면 기분이 좋을 리 없다. 이는 불행하고 가난한 자를 대하는 태도에서도 나타난다.

 

지금 불행한 자가 있다. 더구나 가난하기 까지 하다. 육체적 정신적 장애가 있어서 자신의 힘으로 이 세상을 도저히 살아 갈 수 없을 때 비참하게 보인다. 이런 사람을 보았을 때 사람들은 연민의 마음을 낸다. 그런 연민의 마음이 지나치면 근심하게 된다. 연민이 근심으로 되었을 때 불선업이 된다.

 

불행하고 가난한 자를 보았을 때 어떤 마음을 내는 것이 가장 공평할까? 그것은 한 때 나도 저와 같은 사람이었다라고 마음을 내는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불행하고 가난한 사람을 보면 이 오랜 세월을 지나면서 우리도 한 때 저러한 사람이었다.”(S15.1) 라고 마음을 낼 것을 말씀 하셨다. 이와 같은 마음의 태도가 우월감에 따른 연민이나 연민이 지나쳐 근심걱정으로 전개 되는 것을 막는 최상의 마음이라 본다.

 

부자를 대하는 태도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행복하고 부자인 사람에 대하여 열등의식에 가득차 시기하고 질투하는 것이 아니라 이 오랜 세월을 지나면서 우리도 한 때 저러한 사람이었다.”(S15.2) 라고 마음을 내는 것이다. 이런 마음에 우월감, 동등감, 열등감이 자리 잡을 수 없다. 우리도 언젠가 불행하고 가난한 때가 있었고, 또 언젠가 행복하고 부유한 때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본다면 강아지를 대하는 태도도 달라질 것이다.

 

강아지를 보면 귀엽고 사랑스럽다. 그래서일까 가족처럼 아끼며 사는 사람들이 많다. 어떤 이는 자식보다 낫다고 한다. 자신의 말을 듣지 않는 자식보다 자신을 알아 보고 자신의 말을 잘 듣는 애완견이 훨씬 낫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일종의 우월감이 작용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인간의 말을 잘 듣는 강아지는 축생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강아지를 가진자는 주인이고 말을 잘 듣는 강아지는 종이라 볼 수 있다. 이처럼 주종관계가 분명하였을 때 결코 공평한 관계는 아니다.

 

부처님 가르침에 따르면 우리도 한때 개로서 삶을 살았다고 볼 수 있다. 무명에 덮이고 갈애에 묶이는 삶을 살았을 때 육도를 윤회하게 되는데 개로서 태어났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개를 대하는 태도도 달라져야 한다.

 

어느 스님은 주인공 이야기를 하였다. 축생으로 태어난 것에 대하여 주인공을 찾으면 알 수 있다고 했다. 또 축생으로 태어난 인연에 대해서도 알 수 있다고 했다. 그 주인공만 찾으면 모든 의문이 해결될 듯하다. 그 주인공을 어떻게 찾아야 할까? 그 주인공을 찾을 수 있을까?

 

누군가 선사에게 개는 왜 축생으로 태어났을까요?”라고 물었다면 어떤 대답을 할까?  차나 한잔 하시게라며 동문서답을 들을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는 그대는 누구입니까?”라며 역질문을 받게 될지 모른다. 심하면 고함소리를 듣거나 방망이로 맞을지 모른다. 왜 이렇게 동문서답하고 반문자적이고 반지성적 행위를 하는 것일까? 그것은 분별하고 망상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일 것이다. 본래 없는 것임에도 개는 왜 축생으로 태어났을까요?”라고 묻는 것에 대하여 분별망상하는 것으로 볼 것이다.

 

누군가 개를 쳐다 보고 왜 축생으로 태어났을까?”라며 측은지심을 낸다면 어떻게 말해 주어야 할까? 주인공을 찾는 것도 좋지만 부처님 가르침에 따른다면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이 윤회는 시작을 알 수 없다. 무명에 덮인 뭇삶들은 갈애에 속박되어 유전하고 윤회하므로 그 최초의 시작을 알 수 없다. 귀여운 강아지들을 보면 이 오랜 세월을 지나면서 우리도 한 때 저러한 개이었다.’라고.”

 

 

2016-03-25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