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불교백년대계

사부대중이 여법(如法)하게 간다

담마다사 이병욱 2016. 6. 6. 18:35

 

사부대중이 여법(如法)하게 간다

 

 

저 건물을 보고

 

저 건물을 보고 통곡하듯이 울었습니다.” 자비명상으로 유명한 M스님의 말이다. 마치 대학캠퍼스를 연상케 하는 너른 부지에 크고 작은 건물이 들어차 있는 곳은 서울 서남부에 위치한 최대교회이다. 본당을 보니 마치 장충체육관처럼 생겼다. 5천명이 들어 갈 수 있다고 한다.

 

웅장하고 거대한 캠퍼스 같은 교회에 압도 되었다. 한편으로 부럽고 시기심도 나고 질투도 난다. 또 한편으로 한국불교의 현실에 대하여 원망도 해본다. 캠퍼스 바로 옆 주택을 개조하여 만든 작은 정사에 살고 있는 스님이 통곡하듯이 울었다는 것이 실감날 정도이다.

 

삼천리방방곡곡 교회 천지이다. 어디를 가나 눈에 밟히는 것은 적색, 백색 때로청색의 십자가이다. 종종 초대형 교회도 보게 된다. 돔형 체육관을 연상시키는 거대한 건축물을 볼 때 압도당한다. 삼천리가 교회십자가 천지가 될 동안 대체 한국불교는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그 옛날 삼천리 방방곡곡은 불국토이었다. 사람이 사는 곳에 절이 있었고 골짜기마다 절이 있었다. 요즘은 사람 사는 곳에 절 구경하기가 힘들다. 골짜기에 들어 가야 절을 볼 수 있다. 사람 사는 곳에는 교회가 들어차 있고 불교는 골짜기로 내 몰린 듯 하다. 이지경이 되도록 한국불교는 대체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방하착(放下着)이라 하지만

 

한국불교가 바뀌어져야 한다고 말한다. 이구동성으로 변화를 요구하고 있다. 그러나 종권을 쥐고 있는 권승들은 바꿀 생각이 없는 것 같다. 또 변화를 싫어하는 것 같다. 그냥 지금 이대로가 좋은 것 같다. 전형적인 기득권논리라 볼 수 있다.

 

소유한 것을 내 놓기가 쉽지 않다. 불자들은 보시금으로 만원짜리 한장 나가는 것이 마치 살점 떨어져 나가는 것처럼 생각하는 것이 보통이다. 승가도 이와 다르지 않는 것 같다. 선가에서는 방하착(放下着)’이라 하여 내려 놓을 것을 얘기 하지만 권승들은 기득권을 향유하려 할 뿐 내려 놓을 생각이 전혀 없는 것 같다. 사부대중 100인대중공사에서 총무원장 직선제가 61%로 압도적 선호 되었음에도 이에 아랑곳 하지 않고 염화미소법을 수정하여 추진하려 한다.

 

요즘 기울어진 운동장이라는 말을 한다. 정치권에서 나온 말이다. 이 말이 불교에서도 사용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기울어져도 보통 기울어진 것이 아니다, 거의 90도에 가깝다. 이는 직선제가 61%로 선호 되었음에도 종회에 발의할 종회의원 스님을 찾아 보기 힘들기 때문이다.

 

그들만의 리그를 만들어

 

한국불교,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다종교사회에서 한국불교는 생존할 수 있을까? 종교시장에서 한국불교는 얼마나 경쟁력 있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현실을 보면 비관적이다. 이대로 추락하다 소멸되어 사라져 버리는 것이 아닐지 걱정이 된다. 이는 권승들의 행태가 미래를 암울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권승들은 그들만의 리그를 만들었다. 대표적으로 종회이다. 이전에는 다수의 종책모임이 있어서 합종연횡하기도 했으나 지금은 한 개의 종책모임의 영향력하에 있다. 기울기가 거의 수직에 가까운 운동장이다. 그러다 보니 사부대중의 뜻이 전달 될 수 없다.

 

승단과 교단으로 분리되어야

 

한국불교는 바뀌어져야 한다. 어떻게 바꾸어야 하는가? 궁극적으로 승단교단으로 분리되어야 한다. 그래서 승단에서는 출가의 목적에 맞게 수행과 포교에 전념해야 하고, 교단에서는 재가의 전문가가 운영해야 한다. 여기서 승단은 비구와 비구니의 이부대중승가를 말하고, 교단은 비구와 비구니와 우바새와 우바이의 사부대중의 모임을 말한다.

 

무슨 일이든지 단계가 있다. 한번에 다 이루어질 수 없다. 부처님도 단계를 말씀 하셨다. 그래서 부처님은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이 이 가르침과 계율에서는 점차적인 배움, 점차적인 실천, 점차적인 진보가 있지 궁극적인 앎에 대한 갑작스런 꿰뚫음은 없다.(Ud.51,A8.19) 라고 말씀 하셨다. 마찬가지로 제도개혁에도 단계가 있다.

 

궁극적으로 승단과 교단으로 분리되어야 한다. 이전 단계로서 총무원장 직선제가 도입 되어야 한다. 구족계를 받은 스님들 모두에게 투표권을 주어서 직접선거에 의해서 선출해야 한다. 이렇게 직선하게 되면 그 동안 쌓였던 문제가 일거에 해결된다. 기본적으로 갈등이 있을 수밖에 없는 현실에서 투표하는 순간 갈등이 해소 된다. 특히 금권선거와 매관매직이 사라지게 된다.

 

직선으로 선출된 집행부가 구성되면 모든 것을 민주적으로 처리 될 수밖에 없다. 늘 대중의 눈을 의식해야 하기 때문이다. 또 직선이 되면 신도회가 활성화 된다. 현재 유명무실하거나 주지의 영향력하에 있는 신도회가 민주적 절차에 따라 구성되면 공동체가 활성화 된다. 이는 곧바로 한국불교의 중흥으로 발전 될 수 있다.

 

깨달음에도 단계가

 

깨달음에도 단계가 있다. 부처님은 처음부터 사성제를 설하지 않았다. 입문자에게는 보시하고 지계하면 하늘나라에 태어난다는 가르침부터 설했다. 이를 부처님의 차제설법이라 한다. 이는 부처님이 아난다여, 사람은 ‘나는 순서에 맞는 설법을 하겠다.’라고 다른 사람에게 가르침을 설해야 한다.” (A5.159) 라고 말씀 하신 것에서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순서에 맞게nupubbīkatha  kathessāmīti)’설한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할까?

 

순서에 맞게 설하는 것에 대하여 차제설법이라 한다. 맛지마니까야(M56)와 디가나까야(D3)따르면, 보시를 설한 다음에 계행을 설하고 계행을 설한 다음에 천상에 태어나는 것을 설하고, 다음에 감각적 쾌락의 욕망의 재난과 욕망의 여읨의 공덕을 설하고, 그 다음에 부처님의 본질적인 가르침인 네 가지 거룩한 진리와 여덟 가지 고귀한 길을 설한다. 마지막으로 갈수록 윤리적인 것보다 수승한 수행적 관점을 설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부처님은 처음부터 사성제를 설하지 않았다. 아직 가르침을 받아 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대신 도덕적이고 윤리적 가르침부터 설한 것이다. 그것이 보시와 지계이다. 시계생천의 가르침을 말한다부처님은 시계생천의 가르침에 이어 쾌락의 욕망의 재난과 욕망의 여읨의 공덕을 설하고, 이어서 사성제와 팔정도를 설하였다. 그런데 가장 나중에 가르침을 펼친 것은 수행이다.

 

부처님은 차제설법 뿐만 아니라 방편설법도 했다. 방편설(pariyāya-desanā) 이란 각각의 의미와 그 각각의 원인을 보여주면서 설법하는 것을 말한다. 이외 부처님은 자비설법, 무대가설법, 자타이익설법 등 받아 들이는 자의 근기에 따라 설했다.

 

모든 일에도 단계가

 

깨달음에도 단계가 있듯이 모든 일에도 단계가 있다. 벽돌 쌓듯이 단계를 밟아 올라가는 것이다. 조직도 마찬가지이다.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는 단계적 절차를 밟아야 한다. 그리고 ()’를 형성해야 한다. 조직화 하는 것이다.

 

총무원장 직선제를 목표로 한다면 승가와 재가의 힘을 모아야 한다. 불교는 기본적으로 사부대중공동체이기 때문에 어느 한편에 치우쳐서는 힘을 발휘할 수 없다. 비구스님들만으로 조직을 만드는 것 보다 비구니와 재가의 청신사와 청신녀가 함께 모였을 때 더 큰 힘을 발휘한다. 오로지 재가단체만으로 구성된 조직 보다 츨가와 재가가 함께 조직화 하였을 때 더욱 더 커다란 세를 형성하고 힘을 발휘할 수 있다.

 

모든 일은 단번에 이루어지지 않는다. 한단계 한단계 목표를 향해서 나아가다 보면 언젠가는 이루어지고 만다. 그 목표가 1년이 될지, 2년이 될지, 5년이 될지, 10년이 될지 알 수 없다. 도중에 포기하지 않고 세를 형성하며 조직화 하며 앞으로 나아가면 된다. 힘들 때 쉬어 가듯이, 때로 즐길 필요도 있다. 장기전이라면 부드럽고 낙천적일 필요도 있다. 유연한 것이 강한 것을 이기듯이 초심을 잃지 않고 나아가다 보면 고지가 바로 앞에 있을 수 있다.

 

 

 

 

여법하게(dhammena) 실천해야

 

부처님 가르침을 따르는 제자들로서 항상 여법하게살아야 한다. 여법하게 또는 법답게산다는 것은 무엇을 말할까? 디가니까야를 보면 대륙을 다스리되 몽둥이를 사용하지 않고 칼을 사용하지 않고 정법을 사용한다.”라 되어 있다. 여기서 정법이라는 말이 담메나(dhammena)’ 로서 법답게라고도 번역된다. 영어로는 담마네나의 뜻은 ‘Justly, righteously’이다. 이렇게 본다면 법답게또는 여법하게라는 말은 폭력을 쓰지 않는다는 말이다. 어떠한 경우에 있어서도 칼이나 몽둥이나 폭력을 쓰지 않는 것이다.  

 

여법하게또는 법답게라는 말로서 담미까(dhammikā)’가 있다. 담미까 역시 ‘righteous(정의롭게)’의 뜻이다. 이는 힘을 자제하는 것을 말한다. 만일 성직자가 우월적 지위를 이용하여 군림하였을 때 때 어떻게 될까? 돈 많은 장자가 금력으로 세상을 조정하려 하면 어떻게 될까? 사제들과 부자들이 정의롭지 않았을 때 해와 달도 바르게 돌지 못하게 된다.” (A4.70)  라 했다. 마치 나비날개짓이 폭풍우를 불러 오듯이 재앙을 가져오고 말 것이라 했다.

 

개인은 물론 조직이나 단체도 여법하게 해야 한다. 정의롭지 않은 힘의 사용은 역효과를 가져 온다. 특히 조직이나 단체를 이끄는 지도자는 법답게 살아야 한다. 지도자가 여법하지 않다면 어떻게 될까? 이는 지도자가 잘못된 길로 가기 때문에 모두가 잘못된 길을 따르네.” (A4.70) 라는 가르침으로 알 수 있다.

 

한국불교 100년 대계를 위하여

 

사부대중 대다수는 총무원장 직선제를 바라고 있다. 그럼에도 심하게 기울어진 운동장으로 인하여 좌절과 절망에 빠져 있다. 그것은 종단의 지도부를 구성하고 있는 스님들이 법답게살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직선제를 열망하는 사부대중은 한국불교 100년 대계를 위하여, 한국불교 중흥을 위하여 첫 발을 내딛었다.

 

첫 발 내딛는 순간부터 가시밭길이지만 이 길을 갈 수밖에 없다. 다만 여법하게 가야 한다. 정의롭게 가는 것이다. 항상 여법한 가르침을 실천하면서 궁극적으로 승단과 교단이 분리될 때 까지 가는 것이다. 이부대중의 승단에서는 오로지 수행과 포교에 매진 함으로써 출가목적을 이루고, 사부대중의 교단에서는 잘 교육받은 재가전문가가 교단을 운영하고 출가자는 일을 잘 하는지 감시함으로써 역할 분담을 하는 것이다. 그 첫 단계가 총무원장 직선제의 실현이다.

 

 언제나 법답게, 여법하게, 정의롭게 뚜벅뚜벅 가야 한다. 힘들면 쉬었다 가고 때로 상황을 즐기면서 목적지를 향해 가는 것이다. 사부대중이 함께 가는 것이다.

 

 

2016-06-06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