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속의연꽃

우월자의 자만과 열등한 자의 자만

담마다사 이병욱 2016. 8. 5. 13:59

 

 

우월자의 자만과 열등한 자의 자만

 

 

 

 

 

 

최근 현각스님이 세간의 이슈가 되고 있습니다. 여기에 기름을 부은 것은 자현스님입니다. 자현스님이 방어논리를 펴긴 했지만 오히려 한국불교의 부정적인 면이 더욱더 노출되고 말았습니다. 네티즌 들 대다수는 현각스님 견해를 지지 하고 있는데 대략 90% 이상에 달합니다.

 

자현스님에 대하여 비판글을 올렸습니다. 이런 행위에 대해 비난 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절집에서 일어난 문제를 굳이 이슈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잘못 알려진 것에 대해서는 바로 잡을 필요가 있습니다. 특히 자현스님의 글을 보면 오만과 편견이 가득하여 이런 모습이 현재 한국불교에서 볼 수 있는 스님상(승상)이 아닌가 생각될 정도 입니다.

 

신도들이 전하는 글을 보면 대게 스님들이 지나치게 권위적이라 합니다. 스님과 신도를 엄격하게 구별하여 차등화 시켜 놓는 것입니다. 자현스님도 차등이 있을 수 밖에 없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한국불교는 비구와 비구니의 차별, 스님과 신도의 차별이 매우 심합니다. 마치 새로운 계급을 보는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권위적인 스님상은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요? 이는 다름 아닌 자만이라 봅니다.

 

자만은 내가 누군데라는 것에서부터 시작 됩니다. 대게 우월한 자의 자만 입니다. 그런 자만에는 태생의 자만, 배운자의 자만, 부자의 자만이 대표적입니다. 자현스님의 글을 보면 이 세 가지가 다 포함된 듯 합니다.

 

부처님은 우월한 자의 자만만 있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놀랍게도 동등감도 자만이고, 열등감도 자만이라 했습니다. 주석에서는 모두 아홉 가지 자만으로 분류합니다. 이전에 올린 글에서 아홉 가지 자만에 대한 설명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아홉가지 자만

 

1. 내가 우월하다는 교만

 

1) 우월한 자 가운데 나는 우월하다는 교만

 

왕들이나 출가자에게도 생겨난다. 왕은 왕국이나 재산의 담지자로서 ‘누가 나 같은 자 있으랴.’라고 교만을 만든다. 출가자에게도 계행-두타행 등을 통해서 ‘누가 나 같은 자 있으랴.’라고 교만을 만든다.

 

2) 우월한 자 가운데 나는 동등하다는 교만

 

왕들이나 출가자에게도 생겨난다. 왕은 왕국이나 재산의 담지자로서 ‘나는 다른왕들과 차이가 있는가’라고 교만을 만든다. 출가자에게도 계행-두타행 등을 통해서 ‘나는 다른 왕들과 차이가 있는가.’라고 교만을 만든다. 출가자에게도 계행-두타행 등을 통해서‘나는 다른 수행승과 차이가 있는가.’라고 교만을 만든다.

 

3) 우월한 자 가운데 나는 열등하다는 교만

 

왕들이나 출가자에게도 생겨난다. 왕은 왕국이나 재산의 담지가 잘 갖추어지지 않은 경우 ‘나는 왕이라는 이름만 갖고 있을 뿐 내가 무슨 왕인가.’라고 교만을 만든다. 출가자에게도 이득과 존경이 없을 경우 ‘나는 설법사, 다문자, 대장로라고 불리는데, 이득과 존경이 없는 내가 다른 무슨 설법사, 다문자, 대장로인가.’라고 교만을 만든다.

 

2. 내가 동등하다는 교만

 

1) 동등한 자 가운데 나는 우월하다는 교만

 

대신 등에게 생겨난다. 대신이나 공신은 재산-탈 것-운반자(동물) 등에 의해서 ‘나와 같은 다른 왕신이 있는가.’라고 교만을 만든다.

 

2) 동등한 자 가운데 나는 동등하다는 교만

 

대신 등에게 생겨난다. 대신이나 공신은 재산-탈 것-운반자(동물) 등에 의해서 ‘나와 같은 다른 왕신들과 차이가 있는가.’라고 교만을 만든다.

 

3) 동등한 자 가운데 나는 열등하다는 교만

 

대신 등에게 생겨난다. 대신이나 공신은 재산-탈 것-운반자(동물) 등에 의해서 ‘나는 대신이라는 이름만 갖고 있을 뿐 내가 대신인가.’라고 교만을 만든다.

 

3. 내가 열등하다는 교만

 

1) 열등한 자 가운데 나는 우월하다는 교만

 

노예 등에서 생겨난다. 어머니 쪽에서나 아버지 쪽에서 노예인 경우 ‘나와 같은 다른 노예가 있는가? 다른 자들은 태어날 수 없다. 잉태 되었기 때문에 노예이다. 그러나 나는 혈통의 계승자이기 때문에 우월하다.’라고 교만을 만든다.

 

2) 열등한 자 가운데 나는 동등하다는 교만

 

노예 등에서 생겨난다. 부모가 모두 노예인 경우 ‘나는 다른 노예와 차이가 있는가?’라고 교만을 만든다.

 

3) 열등한 자 가운데 나는 열등하다는 교만

 

노예 등에서 생겨난다. ‘나는 태생에 의해서 노예상태이다. 그러나 나에게 부모의 노예의 지위는 없다. 내가 왜 노예라고 불리는가.’라고 교만을 만든다. 그리고 노예와 동일하게 도살자 또는 짠달라와 같은 천민도 교만을 만든다.

 

이 가운데 우월한 자 가운데 나는 우월하다는 교만, 동등한 자 가운데 나는 동등하다는 교만, 열등한 자 가운데 나는 열등하다는 교만의 삼자는 여실한 교만으로 거룩한 길에서 부수어지고, 나머지 여섯 가지 교만은 여실하지 못한 교만으로 첫 번째 길 – 흐름에 드는 길 – 에서 부수어진다.

 

(2539번 각주, 디가니까야 합송의 경 D33, Smv.999-991, 전재성님)

 

 

주석에 따르면 총 아홉 가지 교만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중에 우월중월, 동등중동등, 열등중열등 이렇게 세 가지는 거룩한 길의 경지(아라한)에서 부수어진다고 했습니다. 아라한이 되었을 때 완전히 사라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나머지 여섯 가지는 흐름에 들었을 때 즉, 수다원이 들었을 때 부수어 진다고 했습니다.

 

교만, 아만, 거만, 오만 등으로 불리는 만()은 뿌리 깊은 것입니다. 최종적으로 아라한단계에서 부수어지기 때문 입니다. 세 가지 교만을 보면 우월감은 주로 많이 배우고 재산이 많고 지위가 높을 때 생겨나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동등감은 중간수준에서 생겨납니다. 열등감은 못 배우고 가진 것이 없고 지위가 낮았을 때 발생할 수 있습니다.

 

최악의 우월감은 ‘우월한 자 가운데 나는 우월하다는 교만’입니다. 이는 출가자에게도 적용될 수 있다고 했습니다. 스님과 신도는 이분법적 구조, 그리고 주종관계처럼 보입니다. 그래서 스님이 신도 위에 군림하려 한다면 이는 우월감에 따른 자만 일 것입니다. 단지 머리를 깍았다고 하여 승복을 입었다고 하여 “내가 누구인데”라며 삼배를 받으려 한다면 ‘우월한 자 가운데 나는 우월하다’는 교만이 될 것입니다.

 

한글 삼귀의문을 보면 “거룩한 스님들께 귀의합니다”라는 문구가 있습니다. 이는 잘못된 것입니다. 승가에 귀의하는 것이 맞습니다. 그럼에도 고치지 않는다면 이를 어떻게 보아야 할까요? 아마 스님들의 집단이기주의의 때문일 것입니다. 스님을 승보로 간주하여 부처님과 동등하게 대우를 받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스님이라는 지위가 우월함에도 더욱 더 높여서 승보로서 대우 받고자 하는 것은 ‘우월한 자 가운데 나는 우월하다’는 교만이 될 것입니다.

 

또 하나 최악의 교만은 ‘열등한 자 가운데 나는 열등하다는 교만’입니다. 스님과 신도라는 상하 관계에서 신도에 해당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신도들은 자신들이 스님보다 못하다는 것을 인정합니다. 머리도 깍지 않았고 승복도 입지 않았기 때문에 출신성분이 다르다는 것을 인정합니다. 그런데 절에 오래 다닌 신도들은 신참 신도들을 무시한다는 것입니다. 단지 절에 오래 다녔다는 이유로, 스님과 친하다는 이유로 같은 신도들을 차별합니다.

 

여기 신참신도가 있습니다. 스님을 잘 알지도 못하고 절에도 익숙하지 않습니다. 그런 한편 절에 오래 다녔다고 하여 텃새를 부리는 듯한 구참신도가 못 마땅합니다. 그럴 때 “너나 나나 똑 같은 신도이다. 그럼에도 왜 나는 차별 받아야 하는가?”라고 불평하였을 때 ‘열등한 자 가운데 나는 열등하다는 교만’이 될 것입니다.

 

현각스님에 대한 자현스님의 반론글을 보면서 한국불교의 현실이 다시 한번 세상에 노출 되었습니다. 현각스님의 글이 세상에 충격을 주었다면 자현스님의 반론글로 인하여 한국불교가 개혁을 하지 않으면 안될 당위성을 부여 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 이면에는 뿌리 깊은 스님상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오죽하면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에 이어 스님상이 있다고 할 정도 입니다.

 

스님상의 극치는 우월한 자 중에 우월함의 교만에 해당 됩니다. 반면 신도들의 교만도 없지 않을 수 없습니다. 열등한 자중의 우월하다는 교만은 대게 굴종적 신앙에서 근거 합니다. 그러나 가르침 앞에 차별이 있을 수 없습니다. 어떤 땔감에서 불이 붙듯이 누구나 가르침을 실천하면 성자가 될 수 있다고 했습니다.

 

스님들은 태생적으로 스님일 수 없습니다. 재가자들 가운데서 스님이 나옵니다. 지금 스님이라 하여 죽을 때까지 스님으로 살라는 법도 없습니다. 도중에 환속하는 스님들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스님과 신도를 구분하여 내가 누군데라 한다면 자만에 빠졌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 모습을 자현스님에게서 보았습니다.

 

 

2016-08-05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