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현스님의 갑질은 언제까지
종종 스님들이 자비롭지 않다고 생각될 때가 있습니다. 지혜와 자비의 종교라는 불교에서 일부스님들의 무자비한 행태를 보면 한국불교 전체가 자비롭지 않은 종교라고 보여질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현상을 자현스님에게서 보았습니다.
자현스님은 연일 자신의 페이스북에 현각스님을 비판하고 있습니다. 말이 비판이지 사실상 비난이나 비방과 다를 바 없습니다. 현각스님이 자신의 글을 삭제 하고 와전된 것이라고 해명 했음에도 자현스님은 그에 아랑곳 하지 않고 불교신문에 계속 시리즈로 기고문을 올리고 있습니다. 자현스님이 올린 기고문 중의 일부를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그런데 만일 어떤 학생이 전학을 와서 이렇게 3년을 보낸 뒤에 졸업할 때가 돼서, ‘야, 니들 음식은 더럽게 맛도 없는데, 내가 참고 먹어 준거야. 도저히 수준 떨어져서 못 먹겠는 걸, 토하려다 참고 먹어 줬으니 감사해’라고 했다면 반 학생들은 어떤 기분이들까? 내가 현각스님의 비판에서 받은 느낌이 바로 이런 것이었다.”
(자현스님, 논점 없는 상처내기는 이제 그만, 불교신문 2016-08-05)
자현스님의 8월 5일자 불교신문 기고문을 보면 학교다닐 때 점심시간 풍경을 적고 있습니다. 학생 중에 한 두명은 도시락을 싸가지고 오지 않고 오로지 포크겸용 숟가락 하나만 들고 다닌다는 것입니다. 아마 현각스님을 염두에 두고 쓴 글 같습니다. 한국불교에 포크 하나만 들고 나타난 현각스님이 다른 한생들의 도시락을 빼앗아 먹는다는 취지의 글입니다.
자현스님은 매일 올리는 자신의 페이스북 글 내용을 정리하여 불교신문에 특별기고문형식으로 시리즈로 올리고 있습니다. 지금 까지 모두 다섯 차례의 글을 올렸는데 ‘현각스님의 비판에서 느껴지는 아쉬움 (1), 현각스님의 비판에서 느껴지는 아쉬움 (2), 한국불교 싸잡아 비판 부적절…결자해지해야, 논점 없는 상처내기는 이제 그만, 25년 이상 화두선 한 ‘한국선승’ 맞는가…’라는 제목의 글입니다. 한결 같이 현각스님의 백인우월주의와 한국문화에 대한 몰이해 등이 주류를 이루고 있습니다.
자현스님의 글을 보면 외국인스님에 대한 도를 넘는 비판을 가하고 있습니다. 한국말도 제대로 못하는 것을 예로 들기도 하는데 이는 인신공격에 가깝습니다. 글의 제목에서 말하듯이 선승이 맞는지 의문하기도 합니다. 이런 글이 한번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시리즈로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는 것이 놀랍습니다. 또한 이런 글을 시리즈로 싣고 있는 조계종기관지 불교신문의 태도 역시 놀라울 뿐입니다.
현각스님이 자신의 글을 내리고 전달과정에서 오해임을 분명히 밝혔음에도 계속 시리즈형식의 글로써 깍아내리려는 하는 태도를 어떻게 보아야 할까요? 이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게송이 떠 올려집니다.
“분노를 끊어 편안히 잠자고
분노를 끊어 슬프지 않네.
참으로 하늘사람이여,
뿌리엔 독이 있지만 꼭지에 꿀이 있는
분노를 죽이는 것을 성자는 가상히 여기니,
그것을 죽이면 슬프지 않기 때문이네.” (S1.71)
초기경전 도처에서 볼 수 있는 게송입니다. 부처님은 “뿌리엔 독이 있지만 꼭지에 꿀이 있는 분노”라 했습니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요? 주석에 따르면 “욕먹은 자를 다시 욕하고, 매맞은 자를 다시 때리면 즐거움이 생겨난다.”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는 다름 아닌 분노에 수반되는 쾌감을 말합니다. 남을 미워하고 성내는 것은 그 마음 바탕에는 분노가 자리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수행자는 미움을 버려야 한다는 가르침입니다.
게송에서 꼭지의 꿀은 ‘쾌감’을 뜻합니다. 그리고 뿌리의 독은 분노를 뜻합니다. 꼭지에 꿀이 있고 뿌리에 독이 있는 분노라면, 이런 분노는 쾌감을 수반하는 분노를 뜻합니다. 그런데 이 게송을 보면 ‘가학’이 떠 올려집니다. 강자가 약자를 괴롭히면서 쾌감을 느끼는 것을 말합니다. 약자에 대하여 자비를 베푸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학대를 함으로써 쾌감을 느끼고, 학대를 즐기는 것을 말합니다.
자현스님이 연일 현각스님을 비판하는 글을 올리는 것은 쾌감을 수반하는 분노로볼 수 있습니다. 분노에 더욱 더 분노 함으로써 쾌감을 느끼는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마치 약자를 학대하여 즐거움을 얻는 것과 다름 없습니다. 자현스님의 글을 보면 참으로 야멸차고 매정하고, 독하고 냉정하기 그지없습니다.
꼭지에 있는 꿀을 먹으면 먹을수록 단맛을 느껴 계속 먹고 싶어 집니다. 그런데 뿌리에는 독이 있어서 꼭지의 꿀을 먹으면 먹을수록 점점 독해진다는 사실입니다. 이는 강자의 약자에 대한 분노에서 나타날 수 있습니다. 우는 아이에게 젖을 주며 달래려 하기 보다 욕하고 때린다면, 욕하고 때리는 과정에서 쾌감도 있을 것입니다. 자신의 뜻대로 되지 않는다 하여 마구 화를 내는 것도 일종의 가학이라 볼 수 있습니다. 욕먹은 자에게 욕을 하고, 맞은 자를 또 때리는 것은 쾌감이 수반된 분노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뿌리엔 독이 있지만 꼭지에 꿀이 있는
분노”라 합니다.
자현스님의 글을 보면 냉정하기 그지 없습니다. 자비라고는 눈곱만큼도 찾아 보기 힘듭니다. 페이스북 글을 보면 “이 분은 특별한 능력이없이 하버드라는 한국인의 저급한 환상덕분에”라며 ‘경멸론’을 말하는가 하면, “25년 동안 조계종에 빨대만 꼽고서” 라며 ‘빨대론’으로 비판하고 있습니다. 자신이 속해 있는 종단에 대하여 비판의 목소리를 냈다 하여 무자비하게 분노의 융단폭격을 퍼붓는 것 같습니다. 자현스님의 분노는 계속됩니다. 이미 지워진 현각스님의 페이스북글의 내용을 문제 삼아 또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또 현각스님은 문제가 있는 한국불교의 대안으로, 당신이 간여하고 있는 계룡산 국제선원(무상사)을 제시하였다. 이것은 한국불교 전체에 대한 모독이다. 물론 한국불교 역시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는 점진적으로 고쳐 가야하는 뿐들이지 일거에 부정되는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된다. 특히 당신 역시 25년이나 한국불교에 몸담았던 사람이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이런 식의 해법 제시는 전혀 타당하지도 올바르지도 않다.”
(자현스님, 논점 없는 상처내기는 이제 그만, 불교신문 2016-08-05)
이 부분에 이르면 자현스님의 분노가 마침내 폭발하는 것 같습니다. 감히 한국말도 제대로 못하는 외국인이 조계종의 정체성을 부정하는 듯한 말을 했기 때문입니다. 누군가 “한국불교는 죽었습니다.”라고 했을 때, “아닙니다, 계룡시 무상사에 가면 한국불교의 맥이 살아 있습니다.”라고 말한 것에 대한 분노를 말합니다.
몇 해전 한국불교를 비판하였다고 하여 무자비하게 폭행당한 적광스님이 떠 올려집니다. 종단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를 내면 용서하지 않겠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것 같습니다. 자비문중이라는 이름이 무색합니다. 실제로 비판언론에 대하여 해종언론이라는 딱지를 붙여 말살시키고자 합니다. 그래서일까 대부분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습니다. 조직침묵입니다. 말해 보았자 들어 주지도 않을 것이기 때문에 체념적 침묵으로 일관하고, 말을 하면 불이익을 받기 때문에 방어적 침묵으로 일관합니다.
자현스님에 대한 현각스님의 비판을 보면, 비판의 차원을 넘어 ‘현각스님죽이기’나 다름 없습니다. 한 두 번도 아니고 다섯 차례나 기고문을 올려 융단폭격을 한 것은 욕먹은 자를 욕하는 것과 같고, 매 맞은 자를 때리는 것과 같습니다. 자현스님의 태도는 무자비한 것이고 한국불교 갑질의 전형을 보여 주는 것 같습니다. 자현스님의 갑질은 언제까지 계속될까요?
“참으로 힘 있는 사람이 있다면,
힘 없는 자에게 인내하네.
그것을 최상의 인내라 부르네.
힘 있는 자는 항상 참아내네.”(S11.4)
2016-08-11
진흙속의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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