겉보기로 사람을 알 수 없다
불교계 바닥은 그다지 넓은 것 같지 않습니다. 대담프로를 보면 ‘그 밥에 그 나물’이라는 말이 있듯이 맨 그 인물이 그 인물 같습니다. 뉴페이스를 보기 힘들어서 이전에 출연 했던 자가 또 다시 다른 대담프로에 나오기 일쑤입니다. 특히 이름이 널리 알려진 명망가들이 그렇습니다.
스님들 역시 그 스님에 그 스님 같습니다. 불교방송이나 불교TV 법문을 보면 일부 스님들로 한정된 듯 합니다. 아마 법문을 잘 한다고 널리 알려져 있다 보니 자주 초대 받아 익숙한 얼굴이 되었다고 봅니다. 어떤 이에 따르면 대략 이백여명의 명사들이 단골초대손님이라 합니다. 그런데 명사들은 이들뿐일까요? 강호의 고수들은 왜 얼굴을 내비치지 않는 것일까요?
숨은 고수들이 있습니다. 숨어 살듯이 좀처럼 세상에 얼굴을 내밀지 않습니다. 그러나 소문으로 알 수 있습니다. 입에서 입으로 알려져서 아는 사림들만 알고 있습니다. 이들이 세상에 나오지 않는 이유는 ‘명예’ 때문이라 합니다. 방송에 나가는 순간 연예인처럼 알려지는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라 합니다. 다만 행동으로, 논문으로, 책으로 자신을 드러낼 뿐 함부로 대담프로에 나오지 않는다고 합니다. 심지어 블로그나 카페에 잡문도 쓰지 않는다고 합니다.
사람들은 사람에 대한 호기심으로 가득 합니다. 연예인이나 스포츠스타의 일거수일투족은 좋은 뉴스거리 입니다. 방송에서 연예인프로가 많은 이유는 스타에 대한 대중의 호기심을 충족시켜 주기 위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심지어 블로그에서도 연예인 이야기를 다루면 조회수가 증가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방송에 출연 했다고 해서 모두 성공했다고 볼 수 있을까요? 방송에 나온 것 자체가 성공인이라는 등식이 성립 될 수도 있지만 그렇다고 내면을 알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방송에서는 편집을 합니다. 불리한 것은 감추고 유리한 것만 내세우다보니 자화자찬 일색입니다. 외면에만 치우쳐 내면을 보지 못하였을 때 실망하기 쉽습니다.
불교인을 대상으로 한 상 중에 불자대상이 있습니다. 대게 명망가들이 받습니다. 세상에 이름이 널리 알려진 사람으로서 불교인이라면 일순위가 됩니다. 탤런트, 스포츠스타 등이 단골 불자대상후보가 됩니다. 또 시류에 따라 떠오른 인물이 대상이 되기도 합니다. 정치적이고 정략적 선택이라 볼 수 있습니다.
역대불자대상 수상자를 보면 마치 연예대상이나 스포츠대상을 보는 듯 합니다. 또 하나 사성장군으로서 불자이면 당연히 불자대상후보가 되는데 사성장군대상을 보는 듯 합니다. 이렇게 이름만 보고 정치적이고 정략적 선택을 하다보니 많은 문제점이 노출 되었습니다.
불자대상중에는 논문조작으로 구속된 학자가 있는가 하면, 대북송금으로 인하여 구속된 기업인도 있었습니다. 개그맨출신 불자대상은 도박으로 구속 된바 있습니다. 사성장군출신 불자대상은 무기중개상혐의로 장관후보에서 탈락 되었습니다. 또다른 사성장군은 선제타격론을 주장하여 전쟁분위기를 고조시키기도 했습니다. 이름만 보고 정략적 선택한 결과 감옥대상이 된 듯 합니다.
유명하다고 하여 다 훌륭하지 않습니다. 반짝인다고 하여 다 금이 아닌 것과 같습니다. 머리가 희다고 하여 다 장로가 아닌 것과 같습니다. 방송탓다고 하여 다 훌륭하다고 볼 수 없습니다. 겪어 보아야 알 수 있습니다.
사람의 마음을 알 수 없습니다. 열길 물속은 알아도 한길 사람의 마음은 알 수 없다고 합니다. 십년지기라도 겪어 보아야 알 수 있습니다. 경계에 처하면 모든 것이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그 사람을 알 수 있을까요?
어느 날 꼬살라 국왕 빠세나디가 육사외도들이 지나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외도들은 명성이 자자 했으므로 초청을 해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아마 감동했던 것 같습니다. 왕은 부처님에게 “저들은 세상에서 거룩한 님과 거룩한 길에 들어선 님 가운데 어떤 쪽입니까?” (S3.11) 라며 물었습니다. 명성만 듣고 말만 듣고 겉으로만 거룩하게 본 것입니다. 이에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말해 주었습니다.
“그들이 계율을 지니고 있는가 하는 것은 함께 살아 보아야 알 수 있습니다. 그것도 오랫동안 같이 살아 보아야 알지 짧은 동안에는 알 수가 없습니다. 주의가 깊어야지 알지 주의가 깊지 않으면 알 수가 없습니다. 지혜로워야 알지 우둔하면 알 수가 없습니다.” (S3.11)
빠세나디왕이 육사외도를 본 것은 겉모습이었습니다. 그리고 주변에서 말하는 명성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부처님의 눈으로 보았을 때는 모든 것이 드러나 보였습니다. 범부들은 깨달은 자를 알 수 없지만 깨달은 자는 깨달은 자를 알아 볼 수 있는 눈이 있기 때문에 외도의 실체를 본 것입니다.
부처님은 계행이 청정한지는 함께 살아 보아야 알 수 있다고 했습니다. 마치 연애와 결혼이 다른 것과 같습니다. 연애시절에는 단점도 좋아 보이지만 막상 함께 살다 보면 단점은 단점일 뿐 입니다. 청정한 수행자인지 아닌지는 겉보기로 알 수 없고 함께 살아 보아야 알 수 있다고 했습니다. 미얀마로 수행갔던 사람에 따르면 아무리 좋아 보이는 사람도 몇 달 함께 생활 하면 온갖 단점이 노출 되어 실망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청정비구라 하지만 겪어 보지 않으면 알 수 없습니다. 계행이 바른지는 함께 살다 보면 알 수 있는 것이라 했습니다. 홀로 사는 비구라면 계행의 의미가 없을 것입니다. 함께 모여 살아야 계율속에서 성장할 수 있습니다.
이 밖에 사람을 알아 볼 수 있는 방법중에는 대화를 통해서, 재난을 통해서, 토론을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이라 했습니다.
대화를 하다 보면 거짓말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또 그 사람이 견고한지는 재난이 닥쳤을 때 알 수 있는 것이라 했습니다. 이득과 불이익에도 흔들리지 않고, 명예와 불명예를 바라지도 않고, 칭찬과 비난에도 초연하고, 행복과 불행에도 끄덕 없는 사람은 재난이나 경계에 닥쳤을 때 드러납니다. 토론하다 보면 그 사람이 얼마나 지혜로운지 알 수 있다고 했습니다. 토론과정에서 지식과 지혜의 깊이가 모두 드러나기 때문 입니다. 이렇게 함께 살아 보아야 알 수 있고, 대화를 해 보아야 알 수 있고, 경계에 부딪쳐야 알 수 있고, 토론해 보아야 그 사람에 대하여 알 수 있다고 했습니다.
겉보기로 사람을 알 수 없습니다. 화려한 스펙이 그 사람의 인품까지는 보장하지 않습니다. 이름이 널리 알려져 있다 하여 반드시 훌륭한 사람이라 볼 수 없습니다. 불자대상이 이를 잘 말해 줍니다. 진정한 고수는 얼굴을 알리지 않습니다. 가장 낮은 자리에서 가장 낮은 자세로 자신의 할 바를 묵묵히 다하는 사람, 이런 사람이 훌륭한 사람이고 고수입니다. 이런 사람에게 불자대상을 주어야 합니다.
2016-08-15
진흙속의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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