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불교백년대계

한국불교, 언제까지 기독교따라하기 해야하나

담마다사 이병욱 2016. 8. 22. 09:00

 

한국불교, 언제까지 기독교따라하기 해야하나

 

 

 

 

 

하나님은 누구 편을 들어 줄까

 

불자로 살며 불선심을 자극하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기도세레모니입니다. 축구경기 할 때 종종 볼 수 있습니다. 온국민이 시청하는 국제경기에서 골을 넣는 순간 기도하는 모습을 지켜 보는 불자들은 착잡하기만 합니다. 그래서일까 유튜브동영상에서 최봉수교수는골을 못넣어도 불안하고 골을 넣어도 불안합니다.”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 골을 넣지 않으면 지게 되서 불안한 것이고, 골을 넣으면 기도세로모니를 볼까 봐 불안하다는 것입니다.

 

기도세레모니에 대한 비판도 있습니다. 김용옥 교수가 유명합니다. 김용옥 교수는 강연과 칼럼에서 축구감독 차범근의 기도세레모니를 비판한 바 있습니다. 차범근감독의 대학 선배이기도 한 김용옥교수는 그대는 전도사가 아니라 축구감독이며, 그대가 이끄는 축구팀은 어느 교회의 사설팀이 아니라 대한민국 국가대표팀이라고 지적하며 대표팀을 이끄는 공인이라 말한 바 있습니다. 그리고 기도는 골방에서 하라라고 충고한 바 있습니다.

 

차범근감독의 기도행위는 유명합니다. 독일 분데스리가팀에 있을 때에도 골을 터뜨린 후 소감을 묻는 카메라 앞에하나님께 감사를을 연발했는가 하면, 국가대표팀 감독이 감독이 되어서도 벤치에 앉아 간절히 기도하는 모습이 카메라에 잡히기도 했습니다. 만일 기독교 선수로 이루어진 팀과 경기를 했을 때 그들의 신은 어느 편을 들어 줄까요? 기도세레모니를 열심히 하는 선수들이 있는 두 팀에서 경기를 했을 때 하나님은 누구 편을 들어 줄까요?

 

무례한 기독교인들

 

교계신문에 기도세레모니에 대한 비판이 넘쳐 납니다. 리우올림픽에서 메달을 선수의 기도세레모니에 대하여 종교자유정책연구원에서는 기다렸다는 듯이 즉각성명을 냈습니다. 이어 여당지라 볼 수 있는 불교신문과 법보신문에서는 강하게 비판했습니다. 경기장이 기독교 선교의 장으로 변질되고 있다는 것이 가장 큰 이유입니다. 그리고 국가예산으로 훈련받은 선수들이 자신이 속한 종교에서 신앙행위를 드러낸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 했습니다.

 

기도세레모니와 길거리 선교에 대한 글을 지난 십년간 여러 차례 글을 올렸습니다. 누구보다 열심히 기도세레모니와 길거리선교의 폐단에 대하여 지적한 바 있습니다. 이에 대하여 무례한 기독교인들이라고 스스로 결론 내린 바 있습니다. 그들은 왜 무례할까요? 전국민이 지켜 보는 가운데 기도세레모니를 한다든가 연말시상식 때 하나님 감사 운운 하는 것도 국민을 선교의 대상으로 보기 때문이라 생각했습니다. 더구나 전철이나 길거리에서 불특정 다수를 대상으로 예수천국불신지옥을 부르짓는 것은 국민을 교육의 대상으로 보기 때문이라 했습니다. 국민을 미개한 사람들로 알아 가르치려 드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도 되는 것일까요?

 

매일 걸어다닙니다. 학의천을 걷다가 불쑥 누군가 지나가면서 예수님믿고 복받으세요라고 말합니다. 반박할 틈도 주지 않고 쏜살 같이 지나가 버립니다. 마치 자전거를 타고 가는 사람이 불쑥 한마디 던지고 내 빼는 것 같습니다. 설령 그가 불교인이든 아니든 그들의 눈에는 모두 구제해야 될 불쌍한 사람으로 보여서 일 것입니다. 만일 기독교인에게도 그렇게 말할 수 있을까요? 그들의 눈에는 불교인과 기독교인을 구별할 수 있는 특별한 눈이라도 있는 것일까요? 한가지 추론할 수 있습니다. 일요일 점퍼 등 일상복 차림이면 어김없이 대상이 된다는 것입니다. 대게 일요일 기독교인들은 마치 예식장 가듯이 정장을 하며 잘 차려 입기 때문에 구별되는지 모릅니다. 이렇게 툭 던지고 달아 나듯이 저 멀리 가고 있는 기독교인들을 보면 무례하기 그지 없습니다.

 

욕하면서 따라 배운다

 

욕하면서 따라 배운다는 말이 있습니다. 불교에도 기독교따라하기를 많이 볼 수 있습니다. 한편으로는 그들을 질투하면서도 또 한편으로 따라하는 것을 보면 열등감이 작용한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그런 것 중에 대표적으로 기도가 있습니다. 불교에 불공이나 법회라는 좋은 말이 있음에도 굳이 관음기도, 지장기도 등 유신론적이고 타력적인 말을 사용하는 것은 어떤 이유일까요? 불공이라는 말보다 기도라는 말을 사용하면 기도발이 더 잘 먹히는 것일까요? 그래서인지 몰라도 절의 달력을 보면 온통 기도뿐입니다. 전형적인 기독교따라하기 입니다.

 

스님들의 법문에 유신론적이고 타력적인 이야기를 종종 들을 수 있습니다. 부처님이 다 지켜보고 계시다는 말이 대표적입니다. 부처님의 몸은 허공이라 부처님이 계시지 않은 곳이 없어서 우리의 일거수 일투족을 다 지켜 보고 있어서 마치 카메라촬영하듯이 낱낱이 다 찍고 있다고 합니다. 아마 화엄경에서 허공의 몸과 금강경에서 실지실견이라는 말을 믹스해서 만든 법문 같습니다. 그런데 이와 같은 유신론적이고 타력적인 법문에서 부처님 대신 하나님이라는 말을 집어 넣으면 그대로 교회목사의 설교와 하나도 다를 바 없다는 사실입니다. 이런 법문도 전형적인 기독교따라하기 일 것입니다.

 

기독교따라하기

 

기독교따라하기는 여기서 그치지 않습니다. 최근 법보신문에서는 불자로 삽시다라는 켐페인을 시작했습니다. 이에 불교신문도 동조하여 지난 3월 총무원청사 로비에서 총무원장스님을 모셔 놓고 발대식을 한바 있습니다. 모두 37개 항목으로 이루어져 있는 불자답게사는 삶에 대한 것을 보면 재가불자로서 지켜야할 덕목과 실천사항 등이 망라 되어 있습니다. 내용을 보면 전형적인 기독교따라하기 입니다. 재적사찰갖기. 법회참석하기, 찬불가배우기, 가족법회열기, 내 가족 전법하기, 식사전 공양게 하기 등을 보면 이전에 기독교인들이 실천했던 것을 용어만 바꾸어 놓은 것 같습니다.

 

불자답게 살기 운동 37개 항목중에 기독교따라하기의 본보기가 하나 있습니다. 34번째 항목으로 손목에 단주차기(차량 염주, 불자의 집)”가 바로 그것입니다. 이는 불자임을 스스로 드러내라는 말과 같습니다. 마치 기독교인들이 십자가목걸이를 차는 것처럼 손목에 단주를 차서 불자임을 드러내자는 말과 같습니다. 차량에도 염주걸이를 하자고 합니다. 신심 있는 불자들은 차에 연꽃걸이를 달고 다닙니다. 이를 더욱 확대하여 모든 불자들마다 차량에 염주걸이를 하고 다니자고 합니다. 더구나 각 집 앞에 불자임을 나타내는 불자의 집표시를 하자고 합니다. 천주교인의 집을 보면 십자가와 함께 천주교인의 집이라고 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를 불교에도 도입하자고 합니다.

 

한국불교기독종?

 

불자로 삽시다운동은 불자들에게 불자로서 긍지와 자부심을 심어 줄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부작용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것은 차별화 하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불자이다’ ‘우리는 하나이다라는 것입니다. 이는 다름 아닌 기독교인들의 전략과 하등 다를 바 없습니다.

 

독선적 교리와 배타적 구원관으로 무장된 기독교인들은 선택받은 자들이라 생각하며 국민을 대상으로 선교하고 가르치려 하는 무례를 범하고 있습니다. 기도세레모니나 길거리선교가 대표적입니다. 이런 것을 받아 들일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불자답게 캠페인을 보면 은연중에 우리는 특별나다는 것을 드러내자고 말하는 것 같습니다. 이는 기독교적 사고방식과 다름 없습니다.

 

한국불교에는 기독교식 사고방식이 상당부분 침투해 있습니다. 기도라는 말이 대표적입니다. 해탈과 열반을 추구하는 자력의 종교인 불교에서 기도가 왠말입니까? 유신론적이고 타력적인 기도라는 말은 한국불교가 기독교와 그다지 다를 바 없음을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일까 어떤 스님은 ‘대한불교기독종이라는 말까지 했습니다. 한국불교, 언제까지 기독교따라하기 해야 할까요? 법보신문과 불교신문, 그리고 조계종에서 주관하는 불자답게 캠페인은 기독교따라하기의 전형이라 보여집니다.

 

 

2016-08-22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