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은 어디쯤에 있을까? 욕망의 거친 행복과 무욕의 잔잔한 행복
우리가 사는 세계를 ‘욕계(kāmaloka)’라 합니다. 욕망으로 가득한 세상입니다. 욕계가 있다면 욕망을 벗어난 세계도 있습니다. 색계(rūpaloka)라 합니다. 욕계와 색계의 차이는 욕망이 있느냐 없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욕망을 뜻하는 ‘까마(kām)’는 ‘pleasure; lust; enjoyment; an object of sexual enjoyment’의 뜻으로 쾌락, 욕망, 즐김, 성적즐거움의 대상이라는 의미입니다.
흔히 수행한다고 합니다. 대체 왜 수행하는 것일까요? 힘들게 다리꼬고 앉아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색계 선정을 맛보기 위해서라 볼 수 있습니다. 욕망의 세계를 떠나고자 함입니다. 이는 네 가지 선정 정형구에서도 확인 됩니다.
세속에서는 이루고자 하는 욕망으로 살아 갑니다. 목표를 정해 놓고 성취하는 것 입니다. 그런데 출세간에서는 정반대 입니다. 이루고자 하는 욕망이 개입된다면 그 욕망 때문에 번뇌만 일어날 뿐 입니다. 이럴 때는 내려 놓아야 합니다. 욕망을 내려 놓았을 때 이루어질 수 있음을 말합니다. 세상에서 생각하는 것과 정확하게 반대입니다.
흔히 ‘행복’ ‘행복’을 말합니다. 행복에는 세간적 행복이 있고 출세간적 행복이 있습니다. 세간의 행복은 거칠고 일시적 입니다. 그러나 출세간적 행복은 잔잔하며 꽤 오래 유지됩니다. 맛있는 음식을 먹을 때 사람들은 행복해 합니다. 남녀가 사랑할 때 역시 행복하다고 합니다. 무언가 소유하고 쟁취 했을 때도 행복하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때뿐입니다. 조건이 바뀌면 이전의 행복이 되어 버립니다.
욕망으로 이룬 행복은 일시적이고 거칠기 짝이 없습니다. 어느 자원봉사자가 있습니다. 봉사활동을 마치고 귀가 길에 느끼는 행복감이 있습니다. 잔잔한 행복입니다. 보시를 하거나 봉사를 함으로 인해 얻는 행복은 자신의 이익만을 위해 얻는 거친 행복과는 비교되지 않습니다. 자애와 연민에 바탕을 둔 무욕의 행복은 미세하지만 그 여운이 오래 갑니다.
사람들은 대게 오욕락을 행복이라 여깁니다. 눈, 귀, 코 등 감각기관을 만족시켜 주는 감각적 행복을 행복이라 생각합니다. 또 식욕, 성욕, 안락욕, 재물욕, 명예욕 이른바 오욕락을 행복이라 여깁니다. 모두 욕망에 바탕을 둔 행복으로서 이루고 쟁취하고 획득한 것들 입니다. 그러나 거꾸로 오욕과 오욕락을 놓아 버렸을 때도 충분히 행복할 수 있다는 사실 입니다. 아니 오욕락의 행복과 비교가 안될 정도로 미세하고 잔잔한 행복입니다. 초기경전에서 초선정에 대한 것을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So kho ahaṃ brāhmaṇa vivicceva kāmehi vivicca akusalehi dhammehi savitakkaṃ savicāraṃ vivekajaṃ pītisukhaṃ paṭhamaṃ jhānaṃ upasampajja vihāsiṃ.
바라문이여, 나는 감각적 쾌락의 욕망을 버리고 악하고 불건전한 상태를 떠나서, 사유를 갖추고 숙고를 갖추고, 멀리 떠남에서 생겨난 희열과 행복을 갖춘 첫 번째 선정을 성취했습니다. (M4)
초기경전에서 초선정에 대한 정형구입니다. 가장 먼저 ‘감각적 쾌락에 대한 욕망(kāma)’을 버린다고 했습니다. 두 번째로 ‘악하고 불건전한 상태(akusala)’를 버린다고 했습니다. 욕망을 내려놓고 불선법을 버렸을 때 비로서 행복을 맛 볼 수 있다고 했습니다.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버리고 없애는 삶을 실천하는 것이라 했습니다. 그런데 부처님은 이런 삶에 대하여 “고귀한 자의 계율에서는 지금 여기에서의 행복한 삶이라고 부른다.(Diṭṭhadhammasukhavihārā ete ariyassa vinaye vuccanti.)” (M8) 라 했습니다. 행복은 저 멀리 어딘가에 있어서 욕망으로 쟁취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욕망을 놓아 버렸을 때 지금 여기서 맛볼 수 있다는 뜻입니다.
선정에 들기 위해서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오욕에 대한 욕망을 내려 놓는 것 입니다. 선정도 성취해야 할 대상이라 여기며 욕심을 낸다면 결코 성취할 수 없음을 말합니다. 세상의 흐름과는 거꾸로 가기 때문에 욕망은 장애 요소 입니다. 그래서 가장 먼저 욕망을 내려 놓는 것입니다. 그런데 욕망을 내려 놓았을 때 비로소 행복이 찾아 온다는 사실입니다. 무욕의 행복 입니다. 마치 보시를 하거나 자원봉사를 하여 느끼는 잔잔한 행복과 같습니다. 이기적 욕구충족의 행복이 아니라 욕망을 내려 놓았을 때 행복입니다.
사람들은 자신과 가족의 행복을 위해 열심히 기도합니다. 아름다운 마음임에 틀림 없지만 분명한 사실은 욕망을 바탕으로 한 것 입니다. 욕망이 개입되었을 때 욕계를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거꾸로 욕망을 여의었을 때 오는 행복도 있다는 사실입니다. 선정에서의 행복입니다. 수행으로 이룰 수 있습니다.
욕망을 여읜 행복은 욕망으로 이루어진 거친 행복과 비교할 바가 아니라는 사실 입니다. 황제식과 같은 진수성찬을 대했을 때의 행복감보다 좋은 일 했을 때 느끼는 잔잔한 행복감은 훨씬 더 오래 갑니다. 선정에서의 행복은 기쁨을 먹고 사는 것과 같습니다.
기쁨을 먹고 살 수 있을까요? 초기경에 따르면 기쁨을 먹고 사는 존재에 대한 표현이 있습니다. 디가니까야에 이런 표현이 있습니다.
“바쎗타여, 언제 어느 때인가 오랜 세월이 지나서 이 세계가 괴멸하는 시기가 있다. 세상이 괴멸할 때에 대부분 뭇삶들은 빛이 흐르는 신들의 하느님의 세계에 태어난다. 그들은 거기서 정신으로 이루어진 자로서, 기쁨을 먹고 지내고, 스스로 빛을 내고, 허공을 날며, 영광스럽게 오랜 세월을 산다. (D27)”
색계존재들은 기쁨을 먹고 산다고 했습니다. 몸이 깃털처럼 가벼워서 하늘을 날아다닌다고 합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요? 그것은 다름아닌 욕망을 내려 놓았기 때문입니다. 욕망으로 이루어진 존재는 무거워서 땅에 발을 붙이고 살지만 욕망에서 자유로운 존재는 하늘을 날아 다닙니다. 욕망의 존재는 거친 식사를 하지만 하늘의 존재는 기쁨을 먹고 살기 때문에 식사 하지 않습니다. 욕망의 존재는 거친사랑을 하지만 하늘의 존재는 성이 없어서 육체적 사랑이 있을 수 없습니다.
욕계에서는 소유하고 이루어져야 행복이라 합니다. 그러나 색계에서는 욕망을 여의었기 때문에 소유할 것도 이룰 것도 없습니다. 욕망을 내려 놓았기 때문에 행복한 것 입니다. 비록 한끼를 먹어도 얼굴이 맑고 누더기를 걸쳤어도 행복한 것입니다. 기도는 욕망을 이루고자 함이지만, 수행은 욕망에서 벗어나고자 함입니다. 기복의 종교에서는 욕계에 머물고자 하지만, 수행의 종교에서는 욕계를 벗어나고자 합니다.
“아, 우리는 안락하게 산다.
열망하는 자들 속에서 열망을 여의고
열망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우리는 열망을 여읜 자로서 지낸다.” (Dhp199)
2016-08-30
진흙속의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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