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금님귀는 당나귀귀라고 외쳤건만, 1차 촛불집회에 참가하고
게시판에 이상한 소문이
참으로 이상 했습니다. 세월호사건이 일어 났을 때 모든 것이 의문투성이었습니다. 세월호가족들이 대통령 면담을 요청하면서 청운동 동사무소 앞에서 수 십일 동안 노숙을 했지만 끝내 들어 주지 않았습니다. 이 뿐만이 아닙니다. 가족들이 국회로 찾아가 뜻을 전하려 했지만 외면 했습니다. 그렇게 까지 외면할 필요가 있었을까요? 이에 대하여 한겨레신문에서는 “참으로 야멸차고 매정하며, 독하고 냉정하다.(한겨레, 2014-08-25)”라고 표현 했습니다. 또 “백성의 눈물을 닦아주기는커녕 그들의 눈에서 더욱 피눈물을 짜내고 있다”라고 했습니다. 이것도 비선실세의 작품이었을까요?
이 정부가 출범하고 인터넷게시판에서 종종 이상한 이야기가 돌았습니다. 대통령이 무당의 지시를 받고 있다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반신반의했습니다. 반을 믿은 것은 대통령의 무능과 관계되는 것입니다. 장관들의 결재서류를 서면 보고 하라는 것이 도무지 이해 되지 않았습니다. 회사에서도 사장에게 보고 할 때 결재서류를 직접 들고가 소상하게 설명합니다. 하물며 한나라의 정책을 결정하는 서류를 서면 보고한다고 하니 아무리 이해하려 해도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사실상 국정을 포기한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누군가 서류를 검토했음에 틀림 없습니다. 서면보고와 무당이 매칭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무당에게 지시를 받는 다는 말에 ‘반신(半信)’했습니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반은 의심한 것입니다. 한나라의 대통령이 무당의 지시를 받는 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있을 수 없는 일이라 생각했습니다. 후자쪽에 무게를 두었습니다.
설마가 사실로 드러났습니다. 마음의 의혹은 씻어 버리기 어렵습니다. 영 믿기지 않았습니다. 아무리 좋게 생각하려 해도 마음 한켠에 또아리를 틀고 있는 의혹은 어쩔 수 없었습니다. 믿겨야 믿는다는 말이 있듯이, 믿기지 않으니 믿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려가 현실로 되고 말았습니다. 올 것이 오고 만 것입니다.
“형님 이번주 토요일 광화문에서 만날래요?”
알고 지내는 법우님으로부터 “형님 이번주 토요일 광화문에서 만날래요?”라는 카톡을 하나 받았습니다. 비선실세와 관련하여 처음으로 열리는 본격적인 촛불집회를 말합니다. 이전에 세월호와 국정원대선개입 촛불집회도 여러 차례 참석한 바 있습니다. 2008년 광우병 관련 촛불문화제부터 큰 집회에서 틈틈히 참여 해 왔습니다.
법우님은 법회모임에서 막내에 해당됩니다. 법회모임에서 한번 막내면 영원한 막내입니다. 신입을 받지 않기 때문입니다. 12년전 불교교양대학 멤버들입니다. 그때 당시 30대 후반이었던 법우님은 이제 오십이 되었습니다. 대체로 보수적 성향의 법회모임에서 진보성향의 법우님은 여전히 막내입니다.
10월 29일 청계광장으로 향했습니다. 오후 3시 영통에서 조카결혼식 참석하고 도착하니 거의 저녁 7시가 다 되었습니다. 시청역에서 내려 청계광장 쪽으로 이동하니 사람들로 가득합니다. 원래 11월 12일 큰 촛불이 예정 되어 있어서 예비성격의 작은 촛불이 되리라고 예상했습니다. 그러나 완전히 빗나갔습니다. 촛불집회가 열리는 청계광장은 인파로 인하여 들어 갈 수 없었습니다. 사람들로 빼곡하여 도저히 비집고 들어 갈 공간이 없었던 것입니다.
여러 차례 촛불문화제에 참석했습니다. 그리고 기록를 남겼습니다. 그런데 이번 촛불의 경우 이전과 분위기가 달랐습니다. 세월호나 국정원대선개입과는 확연하게 달랐습니다. 이전에는 주로 진보성향의 사람들이 모였다면 이번에는 보수와 진보의 구별이 없는 듯 했습니다. 그래서일까 어떤 피켓을 보면 “4년 전, 박근혜를 찍은 것에 대한 국민 여러분께 죄책감과 책임감을 가지고 오늘 이 자리에 박근혜를 찍어내러 왔습니다.”라 되어 있습니다. 남녀노소, 각계각층이 모두 모여 든 것 같았습니다.
법우님을 만나지 못했습니다. 사람이 너무 많아 만나는 것을 포기 했습니다. 지난 2013년 국정원대선개입관련 촛불문화제에서 법우님을 우연히 만났습니다. 12년간 법회모임에서 활동 했지만 촛불문화제에서 만난 것은 처음이었습니다. 법우님은 김대중과 노무현 두 대통령을 존경하여 자전거를 타고 하의도와 봉하마을을 다녀 오기도 했습니다.
역사는 기록하는 자의 것
역사는 기록하는 자의 것이라 했습니다. 삼국사기나 삼국유사를 보면 기록하는 자가 있었기 때문에 오늘날까지 전승되어 왔습니다. 각종 문집이나 일기 등도 기록문화 입니다. 기록해 놓으면 그때 당시 시대상황을 알 수 있습니다. 옛날뿐만 아니라 요즘도 일기가 공개 되기도 합니다. 누군가 4.19당시를 기록해 놓았다면 그 때 당시의 분위기를 알 수 있습니다. 개인의 느낌과 생각을 기록해 놓은 것에 지나지 않을 지라도 시간이 지나면 역사적 자료로서 가치가 있음을 말합니다. 시국관련 촛불문화제도 마찬가지 일 것입니다.
어떤 이는 블로그에 시국관련 이야기를 쓰면 불편하게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정치이야기를 하지 말자는 것입니다. 일리가 있는 말입니다. 불특정 다수를 대상으로 하는 글쓰기에서 정치성향을 드러낸다는 것은 이익 될 것이 없습니다. 양비론이나 양시론적 이야기를 쓰면 무난할 것입니다. 그러나 아예 쓰지 않는 것이 나을 것입니다. 흔히 요즘 하는 말에 어떤 모임에서든지 정치이야기, 지역이야기, 여자이야기, 종교이야기를 하면 본전도 찾지 못한다고 합니다. 분위기만 썰렁하게 하고 동조도 받지 못함을 말합니다. 그럼에도 시국관련 이야기를 종종 올리는 것은 일종의 기록으로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삼십대가 많아
청계광장안으로 들어 갈 수 없어서 우회했습니다. 뒤쪽으로 간 것입니다. 뒷 쪽 큰 도로 역시 사람들로 가득 했습니다. 대체로 젊은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특히 이삼십대가 눈에 많이 띄었습니다. 촛불을 든 자도 있지만 들지 않은 자가 훨씬 더 많습니다. 모두가 자발적 참여자들로 보입니다. 조직화 되지 않았고 동원되지 않았음을 말합니다.
소위 비선실세관련 촛불집회가 본격적으로 열린 것은 이날이 처음일 것입니다. 앞으로 대형집회를 앞두고 예비성격의 집회입니다. 주최측에서는 당초 삼사천명 모일 것으로 예상했으나 크게 빗나갔습니다. 예상한 숫자의 열배 가량 모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일까 촛불 든 사람은 적었습니다. 그런데 이 와중에서 상술에 밝은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촛불을 판매 하는 것입니다. 촛불 한 개에 천원 합니다.
저녁 7시 30분 가량 되자 행진이 시작 되었습니다. 종로 2가 종각사거리를 거쳐 광화문으로 이동하는 코스입니다. 뻬곡하게 움직이는 것이 마치 거대한 강물이 흘러 가는 듯 합니다. 구호는 “박근혜는 하야하라” “박근혜는 퇴진하라”라고 통일 되어 있었습니다. 행진에는 유모차를 몰고 나온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인도에도 사람들이 가득했습니다.
행렬은 도중에서 막혔습니다. 광화문으로 통하는 종로길에 차벽을 설치해 놓은 것입니다. 그러나 이전과 다른 양상입니다. 경찰이 적극적으로 막지 않은 것입니다. 예상 보다 열배 많은 사람들이 모여 경찰을 압도한 것도 큰 이유이긴 하지만 무엇 보다 막을 명분이 없었던 것입니다. 경찰이 만들어 놓은 차벽은 도저히 통과할 수 없습니다. 차와 차사이 간격이 십센티도 안되기 때문에 차벽을 넘을 수 없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차벽을 우회하여 속속 광화문 광장으로 모여 들었습니다.
이순신장군 동상을 넘어
차벽을 우회하여 광화문 광장으로 나아 갔습니다. 광화문 광장은 마치 해방구같았습니다. 이전 촛불문화제를 떠 올리게 합니다. 그때 당시에도 이순신 장군이 서 있는 세종로를 활보 했습니다. 그러나 이순신장군 동상을 넘어 가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이순신 장군 동상을 넘어 세종대왕 동상에 이르렀습니다.
촛불문화제에서 거리 행진을 하면 이순신장군 동상을 넘어서기 힘듭니다. 대게 진보성향의 사람들이기 때문이어서인지 압도적인 경찰병력으로 해산시켜 버립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달랐습니다. 이순신 장군을 넘어 세종대왕에 이르기 까지 사람들로 가득했습니다. 세종문화회관 계단에도 사람들로 빼곡했습니다.
세종대왕동상이 마지노선입니다. 더 이상 넘어 갈 수 없도록 해 놓았습니다. 이에 사람들은 “비켜라, 비켜라,..”라며 길을 터 줄 것을 요구했습니다. 여기까지 보고 귀가 했습니다.
임금님귀는 당나귀귀라고 외쳤건만
필요할 때 힘이 되어 주는 친구가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필요할 때 집회에 참가합니다. 힘을 실어 주기 위함입니다. 효과는 있었던 것 같습니다. 다음 날 뉴스에 거국내각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것도 집권당에서 주장한 것입니다. 종편에서는 “총리가 국정을 보게하자”라는 사회자의 멘트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문제가 되는 인사들이 사퇴했습니다. 아마 29일 집회가 큰 영향을 끼쳤을 것입니다. 만일 주최측 예상 대로 삼사천명 모여 외쳤다면 예전처럼 그냥 뭉게기로 버텼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열 배 가량의 사람들이 모이자 당황 했던 것 같습니다. 더구나 대학생을 포함 하여 이삼십대 젊은 층에서 대거 참여했고 그것도 진보와 보수를 아울렀습니다.
모든 것이 드러나 버렸습니다. 지금까지 임금님귀는 당나귀귀라고 외쳤건만 아무도 듣지 않았고 들으려 하지도 않았습니다. 오히려 욕하기까지 했습니다. 이미지에 속은 것입니다. 박정희시대의 향수를 가진 사람들, 그리고 불쌍하게 여긴 사람들이 대통령을 만들어 주었습니다. 그러나 결과는 참담했습니다. 자신의 힘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모습을 보았을 때, 더구나 무당의 지시를 받는다고 소문난 것이 현실화 되었을 때 사람들은 거리로 나오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세월호, 국정원대선개입사건 때 참여해서 힘을 실어 주었습니다. 더 멀리는 20008년 광우병 관련 촛불문화제에 참여했습니다. 참여 해서 반드시 소감문을 작성하여 사진과 함께 블로그에 올려 놓았습니다. 한 개인의 기록에 불과한 것이지만 세월이 흐르면 역사적 사료로서 가치를 인정받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2016-10-31
진흙속의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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