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릇을 깨자
“그릇을 깨자!” 어느 유명가수는 그릇을 깨뜨리자고 노래 했습니다. 그릇은 깨질 운명에 있습니다. 숫따니빠따 ‘화살의 경’에 따르면 “옹기장이가 빚어낸 질그릇이 마침내 모두 깨어지고 말듯이, 사람의 목숨도 또한 그렇습니다.” (stn577) 라 했습니다. 도자기를 사람에 비유했습니다. 그리고 도자기가 깨지는 것을 죽음에 비유했습니다.
그릇은 언제 깨질지 모릅니다. 어느 날 갑자기 깨집니다. 대게 설거지 할 때 입니다. 애지중지하던 고급도자기도 언젠가는 깨질 운명에 처해 있습니다. 목숨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수명이라는 것이 정해져 있지 않아서 언제 어떻게 죽을지 알 수 없습니다.그래서 “세상에서 결국 죽어야만 하는 사람의 목숨은 정해져 있지 않아 알 수 없고 애처롭고 짧아 고통으로 엉켜 있습니다.” (stn574) 라 했습니다. 부처님도 분명히 목숨은 정해져 있지 않다고 했습니다.
그릇이나 목숨이나 공통적으로 똑 같은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언제 어떻게 부서질지 기한을 알 수 없다는 것입니다. 누구도 나의 안전을 책임져 주지 않듯이, 어느 누구도 나의 수명을 보장해 주지 않습니다. 인간은 업대로 살기 때문입니다. 과거의 지은 행위가 익었을 때 어떤 과보를 받을지 모릅니다. 지금 착하게 살고 있다고 하더라도 과거 전생에 어떤 악행을 저질렀는지 알 수 없어서 수명은 보장 되어 있지 않습니다. 오늘밤이 최후가 될지, 아니면 10년 후가 될지, 20년 후가 될지, 30년 후가 될지 아무도 모릅니다. 보험을 드는 것도 미래가 불확실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테리가타에 “그대는 젊고 아름답다. 그대가 출가하여 무엇을 할 것인가? 가사와 법복을 버리고 와서 꽃이 핀 숲속에서 즐겨봅시다.”(Thig.370) 라는 게송이 있습니다. 악한 한량이 수바비구니에게 한말입니다. 수바비구니의 미모에 반하여 젊었을 때 인생을 즐기자고 유혹하는 장면입니다. 언제 죽을지 모름에도 젊음을 즐기고자 한 말입니다.
수행을 늙어서도 할 수 있을 겁니다. 젊었을 때 마음껏 즐기다가 더 이상 즐길 수 없는 나이가 되었을 때 수행해도 늦지는 않을 겁니다. 나이 들어 출가할 수도 있을 겁니다. 젊었을 때 해야 할 일을 다 마친 다음에 더 이상 할 일이 없을 때 출가할 수도 있을 겁니다. 젊었을 때 청춘의 황금기를 마음껏 구가하다가 늙어서 혐오스런 모습이 되었을 때 출가 할수도 있을 겁니다. 그러나 시간은 기다려 주지 않습니다. 도기가 언제 깨질지 알 수 없듯이 사람 목숨 또한 언제 죽을지 알 수 없습니다. 지금 빛나는 청춘이라 하여 내일이 오리라는 보장이 없습니다. 오늘 밤이 최후의 날이라면 즐기는 삶을 살 수 없습니다. 지금 당장 가부좌를 틀어야 할 것입니다. 지금 당장 나의 행위를 제3자의 눈으로 관찰해야 될 것입니다.
배운자에게는 학식의 교만이 있고, 가진자에게는 부자의 교만이 있습니다. 바라문 같은 성직자에게는 태생의 교만이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청춘에게는 젊음의 교만이 있고, 강건한 자에는 건강의 교만이 있습니다. 그래서일까 세상은 온통 “즐기자!”라고 외치는 것 같습니다. TV를 보면 온통 먹거리 프로입니다. TV에서는 끊임 없이 시각적으로 유혹하는 장면을 내 보냅니다. 감각을 자극하는 것입니다. 그래서일까 사회풍조가 조금이라도 젊었을 때 즐겨야 한다고 말 합니다. 늙어서 가장 후회 되는 것이 즐겁게 살지 못한 것이라고 한탄합니다. 정말 맞는 말일까요?
부처님 가르침은 늘 세간과 반대로 갑니다. 세간에서 “지금 이 순간을 즐겨요” 라 했을 때 결국 괴로움만 야기하고 말 것이라 합니다. 그래서 즐거운 것을 괴로운 것으로 보자고 합니다. 세상의 흐름과는 거꾸로 가는 것입니다. 세상에서는 욕망으로 살아 갑니다. 그러나 출세간에서는 이와 정반대로 살아 갑니다. 그래서 부처님 가르침을 ‘역류도(逆流道: paṭisotagāmī)’라 합니다.
역류도로서의 부처님 가르침은 세상사람들이 생각하는 것과는 정반대 입니다. 모두들 즐기는 삶을 이야기 할 때 감각적 쾌락의 추구에서 오는 재난을 경고합니다. 젊었을 때 공부하고, 힘이 있을 때 수행하는 것은 매우 현명합니다. 그릇이 언제 깨질지 모르듯이, 목숨 또한 언제 죽을지 알 수 없는 것이라면 한가롭게 여유부릴 시간이 없습니다.
그릇은 깨지기 위해 있는 것이라 했습니다. 깨질 운명을 타고 난 것입니다. 수명도 그릇 같은 것이라면 언제 죽을지 알 수 없습니다. 오늘 밤이 최후의 날이 될 수 있습니다. 먹고 마시고 취하고 즐기는 삶을 살 수 없습니다. 흐리멍덩한 상태로 최후를 맞는 다면 악처에 떨어질 것임에 틀림 없습니다.
그릇은 깨질 수밖에 없습니다. 마음의 그릇 역시 언젠가는 깨질 것입니다. 그런데 그릇은 깨지기 위해 존재 합니다. 한번 형성된 마음의 그릇도 언젠가 깨질 것입니다. 타고난 마음의 그릇을 안고 평생 살아 가지만 몸이 부서질 때 마음의 그릇도 깨질 것입니다. 이왕 깨지는 것이 마음의 그릇이라면 미리 깨뜨리는 것도 나을 것입니다. 좀 더 큰 그릇을 만들기 위함입니다. 마치 병아리가 부화 할 때 알껍질을 깨고 나오듯이, 한세계를 파괴 하는 것입니다. 자신을 단단히 둘러 싸고 있는 욕망의 세계를 파괴 하는 것입니다. 작은 그릇을 깨고 큰 그릇을 만드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을 모두 포용하고도 남을 큰 그릇이 되는 것입니다.
악한 한량은 비구니의 미모에 반했습니다. 특히 눈에 반했습니다. 그래서 “그대의 두 눈을 보면 볼수록, 나의 감각적 욕망의 대상이 증가 합니다.”(Thig.382) 라든가, “그대보다 더 사랑스런 눈을 가진 자는 없습니다.”(Thig.383) 라 합니다. 수바비구니는 “부처님의 딸을 유혹하다니”라고 말하며 “스승에게 가르침을 못한 자가 있다면, 그대는 그와 같은 여자를 유혹하십시오.”(Thig.387) 라고 말합니다. 그리고서는 다음과 같은 게송을 말합니다.
“끈과 막대로 엮어 졌는데,
갖가지로 춤을 추는,
나무막대로 만든 잘 채색된
꼭두각시의 작은 인형들을 나는 보았습니다.
그 끈과 막대를 뽑아 던지고
자르고 흩어지게 하고,
발견할 수 없게 하고, 조각낸다면,
그 가운데 어디에 정신을 묶어야 할까요?
이 작은 몸뚱이도 그와 같으니,
그러한 사실들이 없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러한 사실들이 없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 가운데 어디에 정신을 묶어야 할까요?
노란 웅황으로 칠해진
벽 위에 그린 그림을 보는 것처럼,
그대의 시각은 혼란되었으니,
인간의 지각은 쓸모가 없습니다.
눈앞에 있는 환영과 같고,
꿈꾸는 끝에 보이는 황금나무 같고,
사람들 가운데 인형극과 같은,
눈먼 자여, 당신은 헛된 것을 쫓아갑니다.”
(Thig.390-394, 테리가타 14장 삼십련시집, 쑤바 지바깜바바니까 장로니의 시, 전재성님역)
수바비구니는 한량에게 눈을 뽑아 줍니다. 눈에 애착을 갖는 자에게, 눈에 매혹된 자에게 장로니는 “자, 당신을 위해 눈을 가지시오.”라고 말하며 자신의 안구를 뽑아 줍니다. 그러자 그 즉시 악한은 욕망이 식어 버렸습니다. 그리고 장로니에게 용서를 빌었습니다. 그리고 “이와 같은 사람을 해치려하다니, 마치 타오르는 불길을 끌어안고 독사뱀을 붙잡으려 하는 것과 같습니다. 부디 안녕하시길, 나를 용서해 주시오.”(Thig.398) 라고 말합니다.
부처님 여제자는 젊은 나이에 출가 했습니다. 꽃다운 나이에 출가한 것은 감각적 욕망에서 재난을 보았기 때문 입니다. 젊은 나이에 세상의 흐름과는 반대로 간 것은 자신의 그릇을 깨기 위해서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릇은 언젠가는 깨집니다. 깨질 것이라면 지금 깨뜨려 더 큰 그릇을 만들어야 합니다. 부처님 기르침은 큰 그릇으로 거듭나기 위한 가르침이라 볼 수 있습니다.
2017-01-11
진흙속의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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