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에 의한 청정은 없다
잘못된 믿음이 있습니다. 또한 잘못된 수행방법이 있습니다. 이를 ‘계금취견(戒禁取見)’이라 합니다. 계율과 의식에 집착하는 견해를 말하는데 불교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는 사견입니다. 계금취견은 종교적인 금계와 의식을 지킴으로써 청정해질 수 있고 해탈할 수 있다고 믿고, 자신이 속한 집단의 금계와 의식만이 옳다고 집착하는 그릇된 견해를 말합니다.
물속에 들어간 바라문을 보고
계금취견은 중생을 삼계에 붙들어 매는 10가지 족쇄 중의 하나입니다. 특히 유신견과 회의적 의심과 함께 성자의 흐름에 들어 가는데 방해가 되는 세 가지 족쇄 중의 하나로서 반드시 타파 되어야 합니다. 이와 같은 계금취와 관련하여 테리가타에 게송이 있습니다. 뿐니까 장로니는 목욕하는 바라문을 보고서 다음과 같은 게송을 읊었습니다.
Udahārī ahaṃ sīte,
sadā udakamotariṃ;
Ayyānaṃ daṇḍabhayabhītā,
vācādosabhayaṭṭitā.
“나는 물 긷는 하녀였는데,
귀부인의 처벌에 두려워하고 떨면서
화내는 말의 공포를 시달리며
추울 때에도 물속에 들어갔다.” (Thig.237)
Kassa brāhmaṇa tvaṃ bhīto,
sadā udakamotari;
Vedhamānehi gattehi,
sītaṃ vedayase bhusaṃ
“존귀한 자여, 무엇이 두려워
항상 물속에 들어가는가?
사지를 떨면서도
그대는 심한 추위를 견뎌낸다.” (Thig.238)
전재성님 번역입니다. 최근 전재성님은 테리가타 주석을 포함하여 국내최초로 완역했습니다.
뿐니까 장로니는 출가전에 ‘하녀’였습니다. 주인마님의 명령으로 추운 겨울날에도 물속에 들어가 물긷는 일을 했습니다. 말을 듣지 않으면 처벌 받는 것이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바라문은 스스로 물에 들어가 목욕합니다. 그것도 추운 겨울날 사시나무 떨 듯 물속에 들어갑니다.
폭발해 버린 마님
물 긷는 하녀는 귀부인의 화내는 말에 두려워 물속에 들어 갔다고 했습니다. 화내는 마님과 하녀의 이야기가 맛지마니까야에도 실려 있습니다. 영리하고 지혜로운 하녀가 품위 있어 보이는 마님을 시험하는 장면입니다.
외부 사람들이 보기에 마님은 우아하고 아름답고 품위 있고 정숙해서 명성이 자자했습니다. 하녀가 보기에도 마님은 결코 화내는 것을 볼 수 없었습니다. 하녀는 어느 날 “내가 귀부인을 더 테스트해보면 어떨까?”(M21) 라는 마음이 일어납니다.
어느 날 하녀는 일부로 늦게 일어났습니다. 그러자 마님은 분노의 마음이 일어나 노려보았습니다. 두 번째는 더 늦게 일어났습니다. 그러자 마님은 점점 폭발해 갑니다. 마침내 욕지거리가 나왔습니다. 하녀는 더 테스트해보기로 합니다. 이번에는 해가 중천일 때 일어났습니다. 마침내 마님이 폭발했습니다.
마님은 늦게 일어난 하녀를 향하여 나무못을 던졌습니다. 그러자 하녀의 머리가 깨져서 피가 흘렀습니다. 이로서 우아하고 정중하고 정숙한 귀부인의 본래 모습이 드러났습니다.
부처님은 하녀와 마님의 이야기를 수행승들에게 들려 주었습니다. 그리고서 님은 “어떤 수행승은 불쾌한 말을 만나지 않는 한, 지극히 친절한 자이고, 지극히 겸손한 자이고, 지극히 정숙한 자이다.”라 했습니다. 사람은 상황에 처해 봐야 알 수 있음을 말합니다. 나에게 모욕적인 말이나 욕지거리를 했을 때 까지는 정숙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 다음이 문제입니다.
하녀는 마님을 시험에 들게 했습니다. 해가 중천에 이를 때 까지 일어나지 않자마님이 폭발했습니다. 아무리 품위 있고 정중해 보이는 사람일지라도 경계에 부딪치면 본성이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제자들에게 “그러나 수행승들이여, 그 수행승은 불쾌한 말을 하는 자와 만나더라도, 지극히 친절한 자로 알려져야 하고, 지극히 겸손한 자로 알려져야 하고, 지극히 정숙한 자로 알려져야 한다.”(M21) 라 했습니다. 경계에 부딛쳐도 폭발해야 하지 않음을 말합니다.
세례(洗禮)하면 악업에서 벗어난다?
뿐니까 장로니는 옛일을 회상하면서 바라문의 행위에 대하여 연민의 마음을 내었습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게송으로 말 했습니다.
Yo ca vuddho daharo vā
pāpakamma pakubbatī,
Dakābhisecanā sopi
pāpakammā pamuccati.
“노인이건 젊은이건
악한 행위를 하는 자는
목욕재계하면,
악한 업에서 벗어난다.” (Thig.239)
바라문은 목욕하면 악업에서 벗어난다고 했습니다. 이런 믿음이 있어서 추운 겨울날 물속에 들어가 사사나무 떨 듯 목욕합니다. 그런데 바로 이런 믿음과 행위가 대표적인 계금취견이라 할 수 있습니다. 금계와 의식을 지킴으로써 청정해질 수 있다고 믿는 견해입니다. 한마디로 ‘세례하면 악업에서 벗어난다’는 잘못된 믿음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개구리, 거북이, 그리고 용, 악어, 다른 수생생물들도”
바라문은 목욕하면 악업에서 벗어나 해탈할 수 있다고 확고한 믿음을 가졌습니다. 하지만 잘못된 잘못된 집착이고 그릇된 견해입니다. 이에 대하여 뿐니까 장로니는 다음과 같은 멋진 게송으로 반박합니다.
Saggaṃ nūna gamissanti
sabbe maṇḍukakacchapā,
Nakkā ca suṃsumārā ca
ye caññe udake carā.
“일체의 개구리, 거북이,
그리고 용, 악어,
다른 수생생물들도
천상세계로 갈 수 있겠네요?” (Thig.241)
Orabbhikā sūkarikā
macchakā migabandhakā,
Corā ca vajjhaghātā ca
yecaññepāpakammino,
Dakābhisecanā tepi
pāpakammā pamuccare.
“또한 양도살자, 돼지도살자,
어부, 사슴사냥꾼,
도적, 사형집행인과
다른 악한 자들조차도
목욕재계만으로도
악한 업에서 벗어나겠군요.” (Thig.242)
참으로 멋진 반격입니다. 목욕해서 죄가 씻어질 수 있다면 누구나 죄로부터 해방될 것입니다. 일주일 내내 죄를 짓다가 일요일 하루 회개 한다고 해서 죄가 사해지는 것과 같습니다. 일생동안 죄를 짓고 산 자가 세례식을 통하여 그 동안 지은 죄가 모두 없어진다면 누구나 세례를 받으려 할 것입니다. 그러나 ‘사기’에 지나지 않습니다. 한번 지은 행위는 반드시 과보를 받게 되어 있습니다. 만일 물로 씻어서 죄가 없어진다고 믿는다면 물속에 사는 물고기가 가장 청정할 것이라고 장로니가 말합니다. 만일 그런 논리라면 매일 악행을 일삼는 자들은 죄악에서 자유로울 것입니다.
“공덕도 씻어낼 것이니”
뿐니까 장로니는 세례만으로 악업이 없어지지 않음을 말했습니다. 만일 목욕해서 죄가 없어진다면 이 세상은 불공평하고 불공정한 세상이 될 것입니다. 만일 세례로 죄가 없어진다면 그 동안 쌓은 공덕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요? 이에 대하여 뿐니까 장로니는 결정타를 날리듯이 다음과 같은 멋진 게송으로 말합니다.
Sace imā nadiyo te
pāpaṃ pubbe kataṃ vahuṃ,
Puññānimāni vaheyyuṃ
tena tvaṃ paribāhiro.
“이 강물에 예전에 지은
그대의 악업을 씻어낸다면,
공덕도 씻어낼 것이니.
그러면 그대는 소외자가 될 뿐이오.” (Thig.243)
Yassa brāhmaṇa tvaṃ bhīto
sadā udakamotari,
Tameva brahme mākāsi
mā te sītaṃ chaviṃ hanī.
“존귀한 자여, 그대는 떨면서
항상 물속에 들어가는데,
존귀한 자여, 그만 두시오.
냉기가 피부를 상하게 하지 마시오.” (Thig.244)
뿐니까 장로니가 날린 결정타는 “공덕도 씻어낼 것이니(Puññānimāni vaheyyuṃ)”라는 말입니다. 세례할 때 악업(papa)을 씻어낸다면 똑같이 선행공덕(puññā) 역시 씻겨 내려 갈 것이라는 멋진 말입니다. 그래서 소외자가 될 것이라 했습니다.
여기서 소외자는 ‘paribāhiro’를 번역한 말로 영어로 ‘External’의 뜻입니다. 국외자 또는 아웃사이더라 볼 수 있습니다. 국외자가 된다는 것은 바라문의 주장이 타당하지 않음을 말합니다. 목욕재계한다고 공덕이 없어지지 않는 것처럼 죄악 또한 없어지지 않음을 말합니다. 그렇다면 죄악을 없어지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가르침 만이 악업을 씻어 낼 수 있다
우다나에도 세례와 관련된 게송이 있습니다. 우다나에 ‘결발행자의 경’(Ud.6)이 있습니다. 긴머리를 묶은 고행자들이 머리를 빡빡 깍은 바라문들과 가야 나룻터에서 뒤섞여 목욕을 하고 있었습니다. 북인도에서 가장 추운 기간인 정월보름과 2월 보름 사이인 8일간의 기간입니다. 이들 모두 추운 겨울날에 물속에 들어간 것은 ‘악에 의한 오염으로부터 청정해진다.’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결발행자들은 ‘악을 씻어 냄으로써 윤회로부터 청정해진다’는 소위 윤회청정설을 믿고 있었던 것입니다.
결발행자들은 물에 의한 청정과 불에 의한 청정 두 가지를 믿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눈 내리는 차가운 날씨에 물속으로 들어 갔다가 나오면서 자맥질도 하고 물을 몸에 쏟아 붓는 의식을 행했습니다. 동시에 화신에게 헌공도 했습니다. 이런 광경을 지켜 본 부처님은 감흥어로 이렇게 읊었습니다.
Na udakena suci hoti
bavhettha nahāyatī jano
Yamhi saccañ-ca dhammo ca
so sucī so ca brāhmaṇo
“많은 사람이 그 속에서 목욕하는
그 물로 청정해지지 않는다.
진실과 원리가 있다면,
청정해지니, 그가 거룩한 님이다.”(Ud.6)
부처님은 결발행자들에게 물로 청정해지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만일 물로 청정해진다면 물고기는 오래 전에 해탈 했을 것입니다. 또 물로서 오염을 씻어 낼 수 있다면 어머니를 죽인 극악한 자들도 청정해질 것입니다. 그러나 부처님은 그렇지 않다고 했습니다. 왜 그렇지 않을까요? 주석에 따르면 “목욕은 악의 근원의 반대(paṭipakkha)가 아니기 때문이다.” (UdA.76) 라 했습니다.
어둠의 반대는 빛입니다. 무지의 반대는 앎입니다. 마찬가지로 목욕이 악의 반대가 될 수 없습니다. 부처님은 진실(sacca)과 원리(dhamma)로 청정해진다고 했습니다. 악의 반대는 목욕이 아니라 진실과 원리라는 말입니다. 부처님 가르침 만이 악업을 씻어 낼 수 있음을 말합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고행과 청정한 삶은 물이 필요 없는 목욕이네.”(S1.58) 라 했습니다. 결론적으로 물에 의한 청정은 없음을 말합니다.
물에 의한 청정은 없다
부처님은 진실(sacca)과 원리(dhamma)로써 청정해질 수 있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진실은 주석에 따르면, 거짓말을 삼가는 언어적 진리 또는 인식적 진리와 궁극적 진리를 말합니다. 또 원리는 고귀한 길의 원리와 경지의 원리를 말합니다. 가르침을 실천하여 성자의 경지에 들어서야 청정해질 수 있음을 말합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잘못된 믿음이나 잘못된 수행방법을 버려야 합니다. ‘계율과 의식에 집착하는 견해(sīlabbata-parāmāsa diṭṭhi)’를 버려야 함을 말합니다.
종교적 금계와 의식에 집착하면 결코 청정해질 수 없습니다. 또한 성자의 초보단계인 수다원도에도 들어갈 수 없습니다. 그래서일까 뿐니까 장로니는 바라문에게 “냉기가 피부를 상하게 하지 마시오.”라며 건강을 염려 했습니다. 추운 겨울날 물속에 들어가 자맥질을 하고 물을 끼얹는 행위를 해보았자 청정해지지도 않을뿐더러 감기만 걸릴 뿐이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장로니는 다음과 같은 게송으로 충고합니다.
“공개적으로나 비밀리에나
악한 행위를 하지 마시오.
그대가 악한 행위를
만약에 하려거나 한다면,” (Thig.247)
“날아가거나 도주하더라도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대가 괴로움을 두려워한다면,
만약 괴로움을 싫어한다면,” (Thig.248)
“여여한 깨달은 님과
가르침과 참모임에 귀의하시오.
그리고 계행을 지키시오.
그대에게 이익이 될 것이오.” (Thig.249)
2017-0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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