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에서 해법을 찾기로, 13년간 함께 한 작은 법회모임
작은 법회모임에서 총무를 맡고 있습니다. 임기 3년의 총무에서 이제 3년차에 접어 들었으니 올해만 넘기면 소임이 끝납니다. 사실 이제까지 모임이나 단체에서 살림을 책임지는 역할을 맡아 본 적이 없습니다. 사람관리에서부터 돈관리까지, 그리고 모든 행사의 시작과 끝을 책임지고 완수해야 하는 총무라는 소임은 참으로 험난합니다.
총무라는 소임은
총무로서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이 인원파악입니다. 모임이 열리면 몇 명이 참석할 것인지 알아내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인원파악이 되어야 그 숫자에 맞게 도시락 주문을 할 수 있고 인원에 맞게 준비하고 갖추어야 될 것이 많습니다. 그러나 인원파악 과정에서 마음속으로 분노와 모멸감을 받기도 합니다. 아마 총무라는 직책을 맡아 본 사람들은 공통적으로 느끼는 현상일 것입니다. 특히 전화를 받지 않을 때 그렇습니다. 그것도 한번도 아니고 두 번, 세 번 전화 받지 않을 때 무시당하는 기분입니다.
강한 굴욕감, 모욕감, 모멸감 등으로 마음속에 분노가 일어납니다. 그러나 대부분 법우님들이 잘 협조해 줍니다. 요즈음은 ‘카톡’의 시대라 인원파악하기가 매우 용이해졌습니다. 공지사항을 알리고 참석여부를 묻습니다. 부득이한 사정으로 참석하지 못할 경우도 있을 것입니다. 이런 경우는 참석 못한다고 한마디만 의사표현 하면 끝납니다. 그러나 가장 굴욕감을 느낄 때는 아무 응답이 없을 때 입니다. 재차 삼차 물어 보아도 답이 없을 때 모멸감을 넘어 마음의 분노가 일어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것 같습니다.
이득이 없을 때
작은 법회모임 멤버는 30명 이내 입니다. 대부분 적극적으로 참여하지만 일부 법우님은 경계가 모호한 경우도 있습니다. 그날의 기분에 따라 참석할 수도 안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초기와 달리 왜 이렇게 법우님들이 많이 빠져 나갔을까요? 그것은 한마디로 ‘이득’이 없기 때문일 것입니다. 여러 모임에 참여 하고 있지만 뜻이 맞지 않거나 이득이 되지 않을 때 발길을 멀리 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현상인 것 같습니다.
시간이 돈인 세상에서 일부로 시간 내서 법회에 참석한다는 것은 큰 마음을 내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흔히 말해서 돈도 안되는 법회에 참석하는 것에 대하여 시간낭비로 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건질 것이 없다고 판단되면 발길을 멀리 하는 것이 보통입니다. 그래서일까 13년 전 결성된 법회모임에서 참여하는 법우님은 10%가 되지 않습니다.
불교에서 해법을 찾기로
법우님들과의 인연은 13년 되었습니다. 2004년 능인선원 불교교양대학과 인연을 맺은 것이 시초입니다. 그때 당시 방황했었습니다. 인생이 뜻대로 되지 않은 것입니다. 생각과는 다르게 자꾸 빗나가는 것이었습니다. 급기야 “어쩌다 이렇게 되었지?”라는 의문이 들었습니다. 이에 대한 해결이 필요 했습니다. 꼬인 인생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책도 보았지만 근본적인 답이 되지 못했습니다. 그때 늘 떠 올리던 것은 ‘불교’이었습니다. 불교에서 해법을 찾기로 한 것입니다.
불교와의 인연은 중학교로 거슬러 올라 갑니다. 중학교를 ‘불교학교’에 다녔기 때문입니다. 그때 당시 종로5가 부근 연지동에 있었던 ‘동대부중’에 배치 받았습니다.
중학교에서 처음으로 불교를 접했습니다. 중학교 1학년 때 불교시간에 ‘부처님의 일생’을 배웠습니다. 그때 당시 불교선생님, 즉 교법사는 동국대교수를 지낸 바 있는 ‘조용길’선생님이었습니다. 아마 서른 안팍의 나이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조용길선생님을 2004년 불교교양대학에서 보았습니다. 매주 두 번 있는 강좌에서 한 강좌를 맡아 진행한 것입니다. 그때 당시에는 멀리 앉아 있었기 때문에 몰랐습니다. 나중에 몇 년 지나고 난 다음 알게 되었습니다. 중학교 때 맺은 인연이 30년이 지난 후 불교교양대학에서 또 다시 보게 된 것입니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불교와 인연이 닿지 않았습니다. 그러다 보니 대불련활동도 없었습니다. 다시 불교와 인연을 맺은 것은 삶이 꼬일대로 꼬여 더 이상 어찌 해 볼 도리가 없어 졌을 때 불교에서 해법을 찾기로 한 것이 주요인연입니다. 중학교 다닐 때 부처님일생을 공부한 것이 먼 요인이 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열대과일 위주로
작은 법회모임의 총무소임은 부담스런 것입니다. 특히 모임을 앞두고 그 스트레스는 극에 달합니다. 이럴 때 제사 준비하는 여성들의 심정을 이해할 듯 합니다. 가장 먼저 인원파악을 해야 하고, 그 다음에 법회 자료를 만들어야 합니다. 그리고 도시락과 공양물을 챙겨야 합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손이 가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그런 과정에서 ‘마음의 상처’도 받습니다. 그럼에도 맡겨진 소임을 무리 없이 잘 소화해 내어야 합니다.
올해 들어 처음 열리는 정기법회모임에서 공양물을 다른 시각으로 바라 보았습니다. 불단에 올리는 공양물은 최상품으로 하는 것이 원칙입니다. 집에서 제사지낼 때 최상품으로 올리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대게 과일과 떡을 준비합니다. 이번에는 약간 바꾸어 보았습니다.
먼저 과일의 경우 열대과일 위주로 했습니다. 최상품의 배와 바나나, 자몽, 한라봉, 망고로 준비 했습니다. 고르다 보니 모두 노랑색 일색입니다. 특히 망고의 경우 우리나라에서 나지 않는 귀한 열대과일입니다. 어른 손바닥 만한 것 크기의 망고가격은 상품 사과 여러 개 가격과 맞먹습니다. 그럼에도 망고를 준비한 것은 부처님 당시를 떠 올리게 하는 과일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초기경전에도 나오는 과일이기도 합니다.
망고의 경(Ambasutta, A4.106)에서
망고에 대한 이야기는 초기경전 도처에서 볼 수 있습니다. 우다나에는 “이 망고나무 숲은 아름답고 즐길만하다. 이 망고나무 숲은 정진하길 원하는 가문의 아들이 정진하기에 알맞다.”(Ud34) 라는 내용이 있습니다. 망고숲이 아름답게 묘사 되어 있습니다. 메기야존자가 부처님에게 아름다운 망고동산에서 홀로 떨어져 정진하기를 간청하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앙굿따라니까야에는 ‘망고의 경(Ambasutta, A4.106)’이라 하여 망고의 비유를 들어 설한 부처님의 가르침이 있습니다.
부처님은 네 가지 망고가 있다고 했습니다. 부처님은 “풋것이지만 익어 보이는 것, 익었지만 풋것으로 보이는 것, 풋것이라 풋것으로 보이는 것, 익었으므로 익어 보이는 것이 있다.”(A4.106)라 하여 네 종류의 망고가 있다고 했습니다. 네 종류의 망고를 사람으로 비유했습니다. 그래서 “풋내기지만 익어 보이는 사람, 익었지만 풋내기로 보이는 사람, 풋내기라 풋내기로 보이는 사람, 익었으므로 익어 보이는 사람이 있다.” (A4.106)라 했습니다. 그렇다면 어떤 사람이 가장 바람직할까요? 이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씀 했습니다.
“수행승들이여, 어떻게 사람이 익었으므로 익어 보이는가? 수행승들이여, 세상에 어떤 사람은 나아가고 물러나고 쳐다보고 돌아보고 구부리고 펴고 가사와 발우와 의복을 지닐 때에도 품위가 있다. 또한 그는 ‘이것이 괴로움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분명히 알고, ‘이것이 괴로움의 발생이다.’ 라고 있는 그대로 분명히 알고, ‘이것이 괴로움의 소멸이다.’ 라고 있는 그대로 분명히 알고, ‘이것이 괴로움의 소멸로 이끄는 길이다.’ 라고 있는 그대로 분명히 안다.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이 사람은 익었으므로 익어 보인다. 수행승들이여, 예를 들어, 익었으므로 익어 보이는 망고가 있는데 수행승들이여, 이러한 사람에 대하여 수행승들이여, 세상에는 망고에 비유할 수 있는 이와 같은 네 종류의 사람이 있다.”(A4.106, 전재성님역)
부처님은 망고의 익음의 정도에 따라 수행승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사성제를 있는 그대로 볼 줄 아는 수행승에 대하여 익은 망고와 같다고 보았습니다. 그러나 사성제를 있는 그대로 볼 줄 모르는 수행승은 풋내기라 하여 설익은 망고와 같은 것으로 보았습니다.
우리 속담에 ‘벼가 익으면 고개를 숙인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부처님은 망고의 익음에 따라 풋내기인지 아닌지 알 수 있다고 했습니다. 풋내기들은 품위가 없어 보이지만 잘 익은 수행승은 ‘행주좌와어묵동정’간에도 품위가 있어 보인다는 말입니다. 마치 잘 익은 망고와 같은 것이라 했습니다.
떡 대신 케이크를
떡 대신 케이크를 준비했습니다. 절에서는 공양물로서 과일과 떡을 준비하는 것이 보통입니다. 이는 아마 육법공양의 산물이라 보여집니다. 한국불교에서는 부처님전에 등, 향, 차, 꽃, 과일, 쌀을 공양하는데 이를 육법공양물이라 합니다. 떡은 쌀로 만들었기 때문에 아마 과일과 함께 떡을 공양하는 듯 합니다. 이런 상식을 깨기로 했습니다. 떡은 매번 공양물로 올라 가지만 이번에는 방법을 달리 하여 떡 대신 케이크를 올리기로 한 것입니다. 특별한 뜻은 없습니다. 참여한 모든 이들의 올 한해 생일 축하하는 의미도 있고 또한 불교와 13년 째 인연을 맺는 날이기도 합니다.
공양물을 불단에 올려 놓았습니다. 최상품의 과일과 열대과일, 그리고 케이크가 불단에 올라갔습니다. 여기에 하나 더 추가하여 ‘음악씨디’가 올라갔습니다. 참여한 법우님들에게 선물하기 위하여 비매품으로 만든 것입니다. ‘대비주’가 세 곡 들어 있는데 들으면 기쁨과 환희를 주는 불교명상음악씨디입니다.
여법하게 법회를 봉행하고
법회가 시작 되었습니다. 주문한 도시락으로 저녁식사를 마친 법우님들이 소법당으로 올라 왔습니다. 13년 전이나 지금이나 늘 변함 없는 자리입니다. 법회라 하여 따로 법사의 주도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불교교양대학 동기들이 스스로 만들어 하는 것입니다. 총무역할을 맡은 자가 의식을 진행합니다. 가장 먼저 삼귀의부터 시작해서 산회가를 제창으로 법회를 마칩니다.
스님없이 진행하는 재가불자들의 법회는 늘 식순에 따라 삼귀의, 천수경, 반야심경 순으로 여법하게 진행됩니다. 총무소임을 맡고 나서 식순에 하나 더 집어 넣었습니다. 반야심경을 독송하고 난 다음 초기경전을 독송하는 것입니다. 대게 ‘자애경’이나 ‘축복경’입니다. 이번에는 ‘초전법륜경(S56.11)’을 넣었습니다. 그러나 초전법륜경은 매우 긴 경입니다. ‘사성제’부분만 넣었습니다. 법우님들과 함께 다음과 같이 낭송했습니다.
“수행승들이여,
괴로움의 거룩한 진리란 이와 같다.
태어남도 괴로움이고
늙는 것도 병드는 것도 괴로움이고
죽는 것도 괴로움이고
슬픔, 비탄, 고통, 근심, 절망도 괴로움이다.
사랑하지 않는 것과 만나는 것도 괴로움이고
사랑하는 것과 헤어지는 것도 괴로움이고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것도 괴로움이다.
줄여서 말하지면 다섯가지 존재의 집착다발이 모두 괴로움이다.
.
수행승들이여,
괴로움의 발생의 거룩한 진리란 이와 같다.
그것은 바로 쾌락과 탐욕을 갖추고
여기저기에 환희하며 미래의 존재를 일으키는 갈애이다.
곧, 감각적 쾌락의 욕망에 대한 갈애,
존재에 대한 갈애, 비존재에 대한 갈애이다.
수행승들이여,
괴로움의 소멸의 거룩한 진리란 이와 같다.
그것은 갈애를 남김없이 사라지게 하고 소멸시키고
포기하고 버려서 집착 없이 해탈하는 것이다.
수행승들이여,
괴로움의 소멸로 이끄는 길의 거룩한 진리란 이와 같다.
그것은 바로 여덟 가지 고귀한 길이다.
곧, 올바른 견해, 올바른 사유, 올바른 언어, 올바른 행위,
올바른 생활, 올바른 정진, 올바른 새김, 올바른 집중이다.”(S56.11, 전재성님역)
경조사는 늘 챙겨야 하는 것
여법하게 의식을 마쳤습니다. 이어서 지난해 활동결과와 올 한해 활동계획에 대해 설명했습니다. 지난해 한 해를 돌아 보니 경조사가 눈에 뜨입니다. 주로 자녀 결혼과 부모 사망에 대한 것입니다. 기쁜 일은 축하해주고, 슬픈 일은 함께 위로 해주는것도 모임의 역할일 것입니다. 작년 결혼식은 1건 있었고 장례식은 3건 있었습니다.
올해 계획을 말씀 드렸습니다. 주요일정으로 4월에는 ‘가족과 함께’ 하는 순례법회와 8월에는 ‘1박2일’ 템플스테이를 계획했습니다. 5월에는 두 분 법우님 아들 결혼식이 있습니다. 그러나 언제 어느 때 조사가 있을지 모릅니다. 경사와 조사를 늘 챙겨야 하는 총무입장에서 조사는 언제 닥칠지 알 수 없습니다. 오늘 밥을 잘 드시던 노인이 다음날 어떻게 될지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경사는 날자가 확정되어 있지만 조사는 확정되어 있지 않습니다. 이럴 때 숫따니빠따 ‘화살의 경’에서 “사람의 목숨은 정해져 있지 않아 알 수 없고”(stn574) 라는 말이 틀림 없음을 다시 한번 확인합니다.
공양물을 함께 나누고
재가자들끼리의 법회모임에서는 별도로 법문이 없습니다. 오랜 만에 모여서 서로 담소하는 것이 가장 큰 의미를 갖습니다. 두 달에 한번 꼴로 만나는 일정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크게 부담이 없습니다. 올 계획에 대한 설명이 끝나자 자리를 준비했습니다. 부처님전에 올린 공양물을 함께 나누는 자리입니다.
음식을 나눌 때는 공부하는 책상이 용도를 달리 합니다. 탁자를 어떻게 활용하느냐에 따라 ‘책상’이 되기도 하고 ‘밥상’이 되기도 하고 ‘찻상’이 되기도 합니다. 준비한 최상품의 공양물을 나누었습니다. 여기에 준비하는 법우님들도 있습니다. 스스로 봉사를 자처 하는 법우님들입니다.
마침내 공양물을 함께 나누는 자리가 마련되었습니다. 최상품의 과일과 열대과일이 탁자에 즐비 합니다. 여기에 케이크까지 마련 되어 있어서 보기에도 푸짐해 보입니다. 일부로 먼 길을 마다하지 않고 시간을 내어서 찾아 온 법우님들에 대한 최대한 예우라 생각합니다.
법우님들은 과일과 케이크를 들면서 환담하고 담소합니다. 이런 모습이 가장 보기 좋습니다. 법사를 초청하여 법문을 듣는 것도 좋지만 13년지기 법우님들과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는 자리야말로 법문 보다 더 나아 보입니다.
“기적 같다”
법우님들은 세월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누구나 할 것 없이 세월이 빨리 흘러 간다고 합니다. 불교에 정식으로 입문할 당시에는 40대 이었으나 이제 환갑이 되었다고 하는 법우님도 있습니다. 13년이라는 세월은 이제 40대를 60대로 만들어 놓은 것입니다. 그렇다고 헛되이 산 것은 아닙니다. 자신의 분야에서 나름대로 최선을 다한 삶입니다. 이렇게 모여서 음식을 함께 나누는 것에 대하여 어느 법우님은 “기적 같다”라고 했습니다.
작은법회모임을 뿌리로
올해 처음 열린 법회에서 한 동안 얼굴이 보이지 않던 법우님이 오셨습니다. 건강이 좋지 않아서 참석하지 못한 것입니다. 오랜 만에 보니 건강은 좋아 진 것 같습니다. 법우님은 초기경전에 관심이 많은 것 같습니다. 아마 카톡방에 올린 글의 영향일 것입니다. 블로그에 올린 글 중에 일부를 카톡방에 공유하고 있는데 일부 법우님은 ‘잘 보고 있다’라며 종종이야기합니다. 어느 법우님은 점심에 초대하겠다고 이야기하기도 합니다.
법회가 끝나고 일부법우님들과 초기경전에 대하여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자연스럽게 니까야강독모임에 대하여 이야기하게 되었습니다. 한달에 두 번 있는 전재성박사의 니까야강독모임에 참여를 권유했습니다. 이에 두 분 법우님이 흔쾌히 동의했습니다.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라 봅니다.
법우님들은 불교에 입문할 때 부터 지금까지 13년간 늘 함께 했습니다. 그래서 모든 과정을 다 알고 있습니다. 마치 태어나서 걸음마를 하고 유치원을 가는 등 지금까지 모든 과정을 다 아는 법우님들입니다. 그러고 보니 법우님들과 함께 성장한 것 같습니다. 작은법회 모임은 현재 오늘을 있게 한 모태와 같습니다. 블로그에 글을 쓰고 교계신문에 칼럼을 연재하여 필명이 알려진 것도 작은법회모임을 뿌리로 한 것입니다.
2017-0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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