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속의연꽃

“죽어가는 자의 얼굴에서 너 자신을 보라.” 매일매일 구업지으며

담마다사 이병욱 2017. 5. 26. 08:34

 

죽어가는 자의 얼굴에서 너 자신을 보라.” 매일매일 구업지으며

 

 

몇 일전 대단히 불쾌한 댓글을 받았습니다. 요지는 의미가 없다.”는 말입니다. 올린 글에 대하여 자신의 견해를 표현하고 난 다음 결론적으로 이런 논의는 의미가 없다고 했을 때 사실상 모든 것을 부정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것도 한번도 아니고 몇 일 사이로 두 번 부정당했을 때 불선심(不善心)이 일어났습니다.

 

건관자(乾觀者)

 

테라와다불교에 대하여 호감을 가지고 있습니다. 도이법사의 초대로 테라와다불교 법회에 참석한 바도 있습니다. 어느 법회에 참석해도 글을 남깁니다. 어느 행사나 어떤 곳에 가도 인상적인 장면을 기록해 놓습니다. 그날 처음 그를 보았습니다.

 

그의 글은 매우 날카롭기 때문에 베일 것 같습니다. 논리정연하고 한치도 오차도 없어 보이는 글은 마치 기계장치를 보는 것 같습니다. 누구든지 그의 글에 걸려 들면 베일 것 같습니다. 특히 그와 견해가 달랐을 때, 그의 견해와 맞지 않았을 때 베이고 맙니다.

 

인터넷에 매일 글을 쓰고 있습니다. 오로지 필명으로만 소통합니다. 만나 본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 보면 글이 날카롭다고 합니다. 그런데 막상 만나보면 그렇지 않은 것 같다고 합니다. 글과 얼굴이 잘 매칭이 안되는 것 같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미디어붓다에 올린 글에 대하여 비난 받은 적이 있습니다. 그때 M스님은 건관자(乾觀者)’라는 표현을 사용했습니다. 글만 번지르하지 실천이 따르지 않으면 메마른 지혜를 지닌 것에 지나지 않다고 했습니다. 원래 건관자라는 말은 위빠사나용어입니다. 위빠사나 수행으로 통찰지를 얻은 자에 대하여 ‘sukkhavipassata’라 하며 한자어로는 ‘건관자(乾觀者)’라 합니다. 그렇다고 위빠사나 통찰지를 얻은 것은 아닙니다. 선정수행 없이 단지 글만 쓰는 것에 대한 비판이라 볼 수 있습니다.

 

선정이 없는 건조한 통찰자를 건관자라 합니다. 건관자라 하면 왠지 메마르다는 느낌부터 다가옵니다. ‘정서가 메마르다라는 말도 떠 오릅니다. ‘감성이 풍부하다는 말과 대조됩니다. 매사를 있는 그대로 보는 위빠사나 수행이 마치정서가 메말라 보이는 것 같은 느낌은 어쩔 수 없는 것 같습니다.

 

부정문에 대하여

 

글을 올리면 수 많은 사람들이 댓을 올립니다. 관심을 가지고 늘 지켜 보고 있는 것에 대하여 대단히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대부분 긍정적인 글입니다. 때로 감사의 메시지를 전하고 격려하기도 합니다. 이런 글을 접할 때 힘을 받습니다. 감사의 마음으로 답장을 해야 하나 여러가지 여건상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 대신 새로운 글을 매일 올리는 것으로 답을 대신하고 있습니다.

 

댓글을 받을 때 긍정적은 글을 접하면 분발됩니다. 힘을 받고 탄력을 받습니다. 그러나 때로 부정문도 받습니다. 그것도 전면 부정하는 글입니다. 심지어 어떤 때는 출가하라고 까지 말하고 있습니다. 재가로 살면서 글쓰는 행위가 맞지 않다는 것입니다. 초기경전은 출가에 대한 것이 대부분인데 재가자가 재가의 삶을 살면서 출가자의 삶에 대하여 이야기한다는 것이 논리적으로 맞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출가를 요구했습니다. 이런 글을 접했을 때 역시 불선심이 일어났습니다. 무례함에 대하여 사과를 요구하기 했지만 아직까지 정식으로 사과의 메시지를 받은 바 없습니다.

 

이번 댓글을 보면서 자신을 돌아 보게 되었습니다. 혹시 올린 글로 인하여 불편함과 불쾌감을 느낄 사람도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글이라는 것이 싫으면 안보면 그만이지만 글로서 남긴 사람들도 있습니다. 대게 부정문입니다.

 

대부분의 글은 긍정문 아니면 부정문입니다. 누군가에 대하여 글을 써야겠다고 마음 먹으면 긍정적으로 표현할 것인가 부정적으로 표현할 것인가 두 갈래의 길에 직면하게 됩니다. 작심하고 비판하기로 마음 먹는다면 부정적인 내용을 가득합니다. 그것도 한번이 아니고 지속적 부정문을 접했을 때 하나의 부정적 이미지가 형성됩니다.

 

부정적 댓글을 접하면서 글쓰기에 대하여 되돌아 보았습니다. 남의 글을 통하여 신을 되돌아 본 것입니다. 나도 저와 같은 글을 썼을 때 상대방도 충분히 불편함과 불쾌감을 느꼈을 것이라 생각하니 부끄러워졌습니다.

 

죽어가는 자의 얼굴에서 너 자신을 보라.”

 

최근 전재성박사의 인터뷰에서 죽어가는 자의 얼굴에서 너 자신을 보라.”라는 말을 접했습니다. 이 말은 니까야강독모임에서도 한말입니다. 법구경에 있는 말이라 하여 찾아 보니 “어느 누구나 폭력을 무서워한다. 모든 존재들에게 죽음은 두렵기 때문이다. 그들 속에서 너 자신을 인식하라. 괴롭히지도 말고 죽이지도 말라. (Dhp129) 라는 게송입니다.

 

누군가 폭력을 행사하면 죽음의 공포에 떨 것입니다. 때린 자와 맞는 자와의 관계는 극과 극입니다. 힘있는 자가 힘 없는 자에게 폭력을 행사했을 때, 힘 없는 자는 맞을 수밖에 없습니다. 더구나 죽도록 맞았을 때 처참한 몰골일 것입니다. 그런 모습을 인식한다면 더 이상 폭력을 행사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죽어가는 자의 얼굴에서 너 자신을 보라는 말은 입장을 바꾸어 놓고 보라는 말과 같습니다. 죽음의 침상에 누워 있는 자의 얼굴에서 자신을 본다는 것은 언젠가 자신도 죽음의 침상에 누워 있게 됨을 말합니다. 이런 관점은 늙은 자나 병자에게도 적용할 수 있습니다.

 

맛지마니까야 천사의 경(M130)’에 따르면 보아야 할 얼굴이 있습니다. 똥과 오줌으로 분칠하며 누워 있는 갓난 아이, 허리가 구부러진 늙은이, 병들어 괴로워하는 병자, 갖가지 형벌로 고통받는 죄수, 그리고 마지막으로 죽어서 부풀어 오르고 고름이 생겨난 죽은자입니다. 이 다섯에 대하여 부처님은 천사(天使: devadūta)라 했습니다. 하늘에서 온 사절이라는 뜻입니다. 초불연에서는 저승사자라고 번역했습니다.

 

천사는 사람들에게 실상을 알려 주고자 했습니다. 오로지 즐거움만 찾는 사람들에게 태어남이 괴로운 것이고, 늙음도 괴로움이고, 병드는 것도 괴로움이고, 죽는 것도 괴로움이라고 알려 주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이런 사실을 애써 외면 하고 볼려고 하지 않습니다.

 

천사(天使)의 경고

 

하늘의 사절(天使)은 인간에게 경고했습니다. 추하게 늙어 가는 자의 얼굴에서 자신의 얼굴을 보라고 경고했고, 병들어 고통스러워 하는 자의 얼굴에서 자신의 얼굴을 보라고 경고했고, 죽어서 썩은 자의 얼굴에서 자신의 얼굴을 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애써 보려 하지 않습니다. 천사의 경고를 무시하는 사람들에 대하여 부처님은 이렇게 게송으로 말씀 했습니다.

 

 

천사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어리석은 자는 방일하네.

비속한 몸을 받는 사람들

그들은 오랜 세월 슬퍼한다.”(M130)

 

 

지금 이순간에도 하늘의 사절은 경고하고 있습니다. 그 천사는 다름 아닌 똥오줌으로 분칠을 하고 있는 갓난아기, 추한 모습으로 늙어 버린 노인, 병들어 신음하는 환자, 갖가지 형벌에 시달리는 죄수, 처참한 모습의 시체입니다. 그들의 얼굴에서 나 자신을 보라고 했습니다.

 

매일매일 구업지으며

 

글을 쓰면서 매일매일 구업을 짓고 있습니다. 글쓰기를 필업이라 합니다. 일반적으로 필업은 구업에 속한다고 합니다. 누군가에게는 도움이 될 수도 있지만 또한편 누군가에게는 불편한 글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놓지 못하는 것은 습관이라 볼 수 있습니다.

 

 

 

 

 

 

글쓰기가 가급적 선업이 되기를 바랍니다. 불편과 불쾌를 초래하는 글이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마른 지혜라거나 건관자라거나 하여 메마르다거나 하는 말을 듣지 않기를 바랍니다. 또 글이 너무 날카로워 베일 것같다는 말도 듣지 않기 바랍니다. 가급적이면 감성이 있는 글, 자비로운 글이 되기를 바랍니다. 누군가에는 도움이 되는 글이 되기를 바랍니다. 또한 건질 것이 있는 글이 되기를 바랍니다.

 

 

거짓말을 버리고, 거짓말을 떠나고, 진실을 말하고, 신뢰할 만하고, 의지할 만하고, 세상을 속이지 않습니다. 중상을 버리고, 중상에서 떠나고, 여기서 듣고 저기에 옮겨 사람들 사이를 이간함이 없이, 저기서 듣고 여기에 옮겨서 사람들 사이를 이간함이 없이, 그래서 사이가 멀어진 자를 화해시키고, 화해한 자를 돕고, 화해에 흐뭇해하고, 화해를 즐기고, 화해를 기뻐하고, 화해하는 말을 합니다. 욕지거리를 버리고 욕지거리에서 떠나고 온화하여 귀에 듣기 좋고 사랑스럽고 흐뭇하고 우아하고 많은 사람이 좋아하고 많은 사람이 마음에 들어 하는 그러한 말을 합니다. 꾸며대는 말을 버리고, 꾸며대는 말을 떠나고, 적당한 때에 말하고, 사실을 말하고, 유익한 말을 하고, 가르침을 말하고, 계율을 말하고, 새길 가치가 있고, 이유가 있고, 신중하고, 이익을 가져오는 말을 때에 맞춰 합니다.”(M76)

 

 

 

2017-05-26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