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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일공경’이 왜 단멸론적 견해인가? 작론(作論)을 설한 부처님

담마다사 이병욱 2017. 6. 1. 11:23

 

제일공경이 왜 단멸론적 견해인가? 작론(作論)을 설한 부처님

 

 

어느 날 새벽에 잠이 깨었습니다. TV를 켰더니 케이블채널에서 쇼생크 탈출(1994, The Shawshank Redemption)’이 방영되고 있었습니다. 마침 늘 마음에 두고 있었던 장면이 보였습니다. 대사가 매우 인상 깊어서 글을 쓸 때 종종 인용했습니다. 그러나 정확한 것은 아닙니다. 이번에는 제대로 인용하고 싶어 스마트폰 카메라를 대었으나 포착에 실패 했습니다. 기억나는 것을 스마트폰 메모에 쳐 두었습니다. 그 장면은 40년 수감생활을 한 흑인의 말입니다. 가석방 여부를 판단하기 위한 청문에서 흑인은 매우 인상적인 말을 했습니다.

 

해당 대사를 찾아 보니

 

다음 날 인터넷에서 해당 장면을 찾아 보기로 했습니다. 유튜브에 영화 명대사 장면이 짤막하게 나와 있습니다. 영어로 된 장면이라서 우리말로 해석하기가 어려웠습니다. 인터넷에 쇼생크 탈출 명장면 명대사라는 키워드를 넣자 원하는 대사를 찾을 수 있었습니다. 다음으로 영문을 찾아 보았습니다. 그 장면에 대한 영문도 찾을 수 있었습니다. 대사를 옮겨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There's not a day goes by I don't feel regret. Not because I'm in here, because you think I should. I look back on the way I was then: a young, stupid kid who committed that terrible crime. I want to talk to him. I want to try to talk some sense to him, tell him the way things are. But I can't. That kid's long gone, and this old man is all that's left. I got to live with that.”

 

단하루도 내가 후회를 느끼지 않는 날이 없소. 내가 여기 있어서라거나 그래야 한다고 당신이 강요했기 때문은 아니오. 옛날의 나를 돌아보지. 젊고 바보 같은 녀석이 끔찍한 죄를 저지른 거야. 그놈과 말하고 싶어. 정신차리라고 하고 싶어. 지금 현실을 말해주고 싶어. 하지만 그럴 수 없지. 그 젊은 녀석은 오래전에 사라지고 이 늙은 놈만 남았지. 그렇게 살 수밖에 없어.”(레드의 독백)

 

 

 

 

 

 

 

이것이 찾고자 하는 대사입니다. 40년을 복역중인 흑인 죄수 레드(Red)가 자신의 젊은 시절을 회상하는 장면입니다. 레드는 마치 타인을 지칭하듯이 젊은 시절 자신에 대하여 그놈(him)’이라 합니다. 그놈은 젊고 바보 같은 녀석(a young, stupid kid)’이었습니다. 아마 스무살 안팍의 나이였던 것 같습니다. 그놈이 저지른 끔찍한 범죄로 인하여 40년을 복역 중에 있었던 것입니다.

 

영화에서 레드의 독백을 보면 인과의 엄중함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업이 자신의 주인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본다면 젊은 시절 그놈과 현재의 레드는 같은 사람입니다. 그러나 영화의 대사를 보면 그 젊은 녀석은 오래전에 사라지고 이 늙은 놈만 남았지(That kid's long gone, and this old man is all that's left)”라 한 것으로 보아 서로 다른 사람처럼 보입니다.

 

행위자와 경험자에 대하여

 

영화속에서 젊은 시절 그놈은 오간데 없고 늙은 몸만 남았습니다. 그렇다면 40년 전의 레드와 현재의 레드는 같은 사람일까 다른 사람일까? 상윳따니까야 아쩰라 깟싸빠의 경에 이런 가르침이 있습니다.

 

 

“So karoti so paisavediyatī”ti kho kassapa, ādito sato “saya kata dukkha”nti iti vadasassata eta pareti.“Añño karoti añño paisavediyatī”ti kho kassapa, vedanāhitunnassa sato “parakata dukkha”nti iti vada uccheda eta pareti.

 

[세존]

“깟싸빠여, ‘행위하는 자와 경험하는 자가 동일하다’고 한다면, 그것은 처음부터 괴로움이 있는 것과 관련하여 ‘괴로움은 자신이 만든 것이다.’라는 것과 같습니다. 그렇게 주장한다면, 그것은 영원주의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깟싸빠여, ‘행위하는 자와 경험하는 자가 다르다’고 한다면, 그것은 처음부터 괴로움을 당한 것과 관련하여 ‘괴로움은 다른 사람이 만든 것이다.’라는 것과 같습니다. 그렇게 주장한다면, 그것은 허무주의에 해당하는 것입니다.(S12.17, 전재성님역)

 

 

행위자와 경험자에 대한 것입니다. 행위자와 경험자를 동일시 하면 영원주의이고 다르게 보면 허무주의라는 것입니다. 이전의 행위자와 현재 경험자가 동일 하다고 보면 고정불변의 영혼을 가정하여 아뜨만이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반면 다르게 본다면 이전의 나는 내가 아니다.”가 되어 고정불변한 영혼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 되어 버립니다. 이 번역과 관련하여 초불연 각묵스님은 다음과 같이 번역했습니다.

 

 

깟사빠여, ‘그가 짓고 그가 [그 과보를] 경험한다.’고 한다면 처음부터 존재했던 [괴로움을 상정하여] ‘괴로움은 스스로 짓는다.’라고 주장하는 것이 되어 이것은 상[]에 떨어지고 만다. 깟사빠여, ‘다른 사람이 짓고 다른 사람이 [그 과보를] 경험한다.’고 한다면 느낌에 압도된 자가 괴로움은 남이 짓는다.’라고 주장하는 것이 되어 이것은 단[]에 떨어지고 만다.”(S12.17, 각묵스님역)

 

 

각묵스님은 각주에서 ādito sato’에 대하여 처음부터 존재하는 것이라 번역했고 이를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번역이 달라진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역자는 보디스님의 설명을 참조하여 본문처럼 옮기는 것이 문맥에 더 잘 어울린다고 판단하여 이렇게 옮겼다.”(초불연 상윳다2 123번각주, 각묵스님)라 각주했습니다.

 

빠알리어 ādito sato’에서 ādito’의 뜻은 ‘at first; from the beginning’의 의미입니다. 이는 처음을 가정한 것입니다. 하나의 원인을 가정 하는 것과 같습니다. 마치 신이 있어서 세상을 창조했다고 가정하는 것과 같습니다. 행위자와 경험자(작자)가 일치하면 영원주의(상견)이고, 반대로 행위자와 경험자가 다르면 허무주의(단견)입니다. 이는 양극단입니다.

 

빅쿠보디의 영역을 보니

 

초불연 각묵스님은 빅쿠보디의 영역을 참고했다고 했습니다. 빅쿠보디의 영역본 cdb를 찾아 보니 다음과 같은 내용입니다.

 

 

“Kassapa, [if one thinks,] ‘The one who acts is the same as the one who experiences [the result],’ [then one asserts] with reference to one existing from the beginning: ‘Suffering is created by oneself.’ When one asserts thus, this amounts to etemalism. But, Kassapa, [if one thinks,] ‘The one who acts is one, the one who experiences [the result] is another,’ [then one asserts] with reference to one stricken by feeling: ‘Suffering is created by another.’ When one asserts thus, this amounts to annihilationism.”(cdb. 빅쿠보디역)

 

 

빅쿠보디역을 보면 각묵스님번역과 스타일이 일치합니다. 빅쿠보디는 대괄호를 이용하여 ‘[if one thinks,]’라 했는데, 각묵스님도 똑같이 대괄호를 사용하여[괴로움을 상정하여]’라고 번역했습니다. 빅쿠보디는 etemalism’이라 하여 영원주의로, annihilationism이라 하여 허무주의로 번역했습니다. 그러나 각묵스님은 이를 []’[]’이라 하여 대괄호를 이용하여 달리 번역한 것이 차이날 뿐입니다.

 

빅쿠보디의 영원주의(etemalism) 각주

 

각묵스님은 빅쿠보디의 영역을 참고해서 번역했다고 합니다. 이는 초불연 각주에서 보디 스님의 설명을 참조하여”(123번 각주)라 한 것에서 알 수 있습니다. 빅쿠보디의 영역본 CDB 각주를 찾아 보았습니다. 영원주의에 대한 각주를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Spk glosses ādito sato as ādimhi yeva, and explains it as meaning “(if) at the beginning (one thinks). ...”It seems to me more likely that this phrase is part of the eternalist view itself and means “of one existing from the beginning” i.e., of a being that has always existed.

 

This interpretation can marshal support from the fact that the phrase is omitted just below in the corresponding restatement of the annihilationist view, which is otherwise constructed according to the same logic and thus, if Spk were correct, should include ādito sato. Spk says “it should be brought in,” but the fact that the text replaces it by another phrase is strong evidence that it does not belong there; see n. 40.

 

Spk: If at the beginning (one thinks), “The one who acts is the same as the one who experiences (the result),” in such a case the belief (laddhi) afterwards follows, “Suffering is created by oneself.” And here, what is meant by suffering is the suffering of the round (vaṭṭadukkha).

 

Asserting thus, from the beginning one declares eternalism, one grasps hold of eternalism. Why? Because that view of his amounts to this. Eternalism comes upon one who conceives the agent and the experiencer to be one and the same.

 

Spk-pt: Prior to the belief that suffering is created by oneself there are the distortions of perception and of mind (saññācittavipallāsā) in the notion, “The one who acts is the same as the one who experiences (the result),” and then a wrong adherence to these distortions develops, namely the belief “Suffering is created by oneself”(a distortion of views, diṭṭhivipallāsā).

 

On the three levels of distortion with their four modes, see AN I1 52.

(cdb, 39번 각주, 빅쿠보디)

 

 

괴로움은 자신의 의해 만들어진다거나 그가 짓고 그가 경험한다라고 하는 것은 처음부터 영원주의를 가정하는 것이 됩니다. 마치 천주교에서 내 탓이요!”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는 행위자와 경험자가 동일한 자아라고 생각하는 것에서 유래합니다. 하지만 이는 잘못된 인식입니다.

 

빅쿠보디는 각주 말미에 ‘see AN I1 52’라 했습니다. 앙굿따라니까야 전도의 경(A4.49)’입니다. 세 가지 전도에 대하여 네 가지 양상에 대한 것을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세 가지 전도는 지각의 전도, 마음의 전도, 견해의 전도입니다. 네 가지 양상은 무상에 대하여 항상하다고 여기는 것, 괴로움에 대하여 즐겁다고 여기는 것, 실체 없음에 대하여 실체가 있다고 여기는 것, 더러운 것에 대하여 청정하게 여기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무상에 대하여 항상하다고 여기는 지각의 전도, 마음의 전도, 견해의 전도가 있다.”(A4.49)라는 식으로 나머지 세 가지 양상도 설명되어 있습니다.

 

빅쿠보디는 영원주의에 대하여 전도된 인식(diṭṭhivipallāsā)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는 Suffering is created by oneself”라 하여 괴로움은 스스로 만든 것이라는 인식을 말합니다. 행위자와 경험자가 동일하기 때문에 내 탓이요!”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빅쿠보디의 허무주의(annihilationism) 각주

 

천주교에서는 내 탓이요!”운동을 하 바 있습니다. 이는 행위자와 경험자를 동일시함으로 인한 영원주의적 관점입니다. 반면 누군가 네 탓이야!”라고 책임을 회피할 수 있습니다. 이는 행위자와 경험자를 일치 시키지 않는 단멸론에 입각한 허무주의적 관점이라 볼 수 있습니다. 허무주의에 대하여 빅쿠보디는 다음과 같이 각주 했습니다.

 

 

In this passage the phrase ādito sato found in the preceding statement of eternalism is replaced by vedanābhitunnassa sato, which countermands Spk's proposal that ādito sato should be brought in here. Spk interprets the sentence as stating that the annihilationist view is held by one who experiences the feeling associated with the view, but I understand the point to be that the view is held with reference to one “stricken by feeling,” perhaps by painful feeling.

 

Spk: If at the beginning (one thinks), “The one who acts is one, the one who experiences (the result) is another,” in such a case afterwards there comes the belief, “Suffering is created by another,” held by one stricken by-that is, pierced by-the feeling associated with the annihilationist view that arises thus: “The agent is annihilated right here, and someone else (‘another’) experiences (the results) of his deeds.” Asserting thus, from the beginning one declares annihilationism, one grasps hold of annihilationism. Why? Because the view one holds amounts to this. Annihilationism comes upon him.

(cdb, 40번 각주, 빅쿠보디)

 

 

지금 겪고 있는 괴로움이 타자에 의한 것이라면 네 탓이요!”가 됩니다. 주석에 따르면 괴로움이 타자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라고 주장하면 처음부터 허무주의를 주장하는 것이 되어 버려 허무주의에 집착하게 됩니다. 행위자와 경험자를 다른 자로 본다면, 경험자가 겪고 있는 괴로움은 타자에 의한 것으로 됩니다.

 

내 탓이요!” “네 탓이야!”

 

괴로움은 지금 여기서 경험되는 것입니다. 그런 괴로움은 어디서 온 것일까요? 두 가지 관점이 있습니다. 하나는 괴로움은 자신이 만든 것이다 (saya kata dukkha)”괴로움은 다른 사람이 만든 것이다 (parakata dukkha)”입니다. 전자는 내 탓이요!”가 되고, 후자는 네 탓이야!”가 됩니다. 부처님 가르침에 따르면 이 두 가지 견해는 극단적입니다. 전자는 행위자와 경험자가 일치되어 영원주의적 견해가 되고, 후자는 행위자와 경험자가 다른 자가 되어 허무주의적 견해가 됩니다.

 

영원주의와 허무주의는 양극단입니다. 부처님은 양극단을 떠나 중도를 설했습니다. 그래서일까 쩰라 깟싸빠의 경따르면 부처님은 괴로움과 관련하여 영원주의와 허무주의에 대하여 깟싸빠여, 여래는 양극단을 떠나서 중도로 가르침을 설합니다. 무명을 조건으로 형성이 생겨나고,… (te te kassapa, ubho ante anupagamma majjhena tathāgato dhamma deseti: avijjāpaccayā sakhārā)(S12.17)라 했습니다.

 

양극단은 모두 연기법으로 논파 됩니다. 조건 발생하면 허무주의가 논파되고, 조건 소멸하면 영원주의가 논파 됩니다. 영원주의라는 극단과 허무주의라는 극단은 있을 수 없는 것이 됩니다. 괴로움을 겪는 자가 내 탓이요!”라고 해도 맞지 않고, 반면에 네 탓이야!”라고 해도 맞지 않습니다. 모든 괴로움은 조건에 따라 발생하고, 조건에 따라 소멸할 뿐입니다.

 

중도와 중간

 

부처님은 극단을 떠나서 중도로 가르침을 설합니다. (bho ante anupagamma majjhena tathāgato dhamma deseti)라 했습니다. 여기서 중도라는 말은 ‘majjhena’입니다. 빠알리어 ‘majjhena’‘the middle’의 뜻입니다. 그래서일까 초불연에서는 중간[]’이라고 번역했습니다. 이에 대하여 각묵스님은 역자는 중간과 중도를 엄격히 구분해야 한다고 생각한다.”(초불연상윳따 2 108번 각주)라 했습니다. 그렇다면 초불연에서 중도와 중간으로 엄격히 구분해야 한다고 했을까요? 각주를 옮겨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주석서 문헌을 제외한 모든 초기불전에서는 중도는 팔정도를 뜻한다고 이해해도 무방하다. 그러므로 역자는 중간과 중도를 엄격히 구분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중간은 본경에서처럼 유무의 양극단의 중간이며 고락과 단상의 양극단의 중간으로 바른 견해의 내용이지만, 중도는 팔정도 전체를 뜻하는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초불연상윳따 2 108번 각주, 각묵스님)

 

 

전재성님은 ‘majjhena’를 중도로 번역했습니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면 (the middle)’입니다. 중도는 초전법륜경에서 등장합니다. 초전법륜경에서 그 중도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여덟 가지 고귀한 길이다.”라며 중도가 팔정도임을 선언한 것입니다. 여기서 중도는 majjhimā paipadā’로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깟짜야나곳따의 경(S12.15)’에서 유무중도나 아쩰라 깟싸빠의 경(S12.17)’에서 단상중도는 모두 ‘majjhena’로 되어 있고 연기의 유전문과 환멸문을 설하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초전법륜경에서 중도가 팔정도를 설한 것과 대조됩니다. 이런 이유로 각묵스님은 중도는 팔정도를 말하고, 중은 양극단의 중간의 의미의 뜻이기 때문에 중간[]’으로 번역한다고 했습니다.

 

전재성님은 ‘majjhena’에 대하여 중도로 번역했습니다. 고락중도(S56.11)는 팔정도를 설하고 있지만. 유무중도(S12.15)와 단상중도(S12.17)에서는 십이연기를 설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각묵스님의 주장대로 중도는 팔정도이다라고 선언하면 중도는 오로지 고락중도만을 의미하는 것이 되어 버립니다. 이는 모순입니다. 양극단은 모두 십이연기로 논파됩니다. 고락중도가 팔정도라고는 하지만, 팔정도의 정견이 사성제이고, 사성제는 고와 고의 소멸이라는 연기법으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결국 고락중도는 연기를 설한 것과 같습니다. 그럼에도 각묵스님은 중도는 팔정도를 말한다.”(108번 각주)라 한다면 중도의 범위를 오로지 고락중도에 한정시켜 버렸습니다.

 

부처님은 고와 고의 소멸에 대하여 설했습니다. 사성제가 대표적입니다. 그런데 사성제를 확장하면 십이연기의 유전문과 환멸문이 됩니다. 부처님이 고와 락, 유와 무, ()과 단()이라는 양극단을 떠나서 중도로서 가르침을 설합니다.”(S12.17)라 했을 때 이는 연기법을 말합니다. 조건발생과 조건소멸로 고락, 유무, 상단이라는 양극단을 논파한 것입니다.

 

그 젊은 녀석은 오래전에 사라지고

 

지금 괴로움을 겪고 있는 자가 있습니다. 영화 쇼생크의 탈출에서 40년동안 복역하고 있는 흑인 레드는 젊은 시절 흉악한 범죄를 저질러 평생 감옥에 살고 있습니다. 그리고 범죄행위를 후회하고 있습니다. 레드는 마치 남에게 이야기 하듯이 젊고 바보 같은 녀석이 끔찍한 죄를 저지른 거야.”라 했습니다. 만일 그 상황으로 돌아 간다면 그놈과 말하고 싶어. 정신차리라고 하고 싶어.”라 합니다. 자신이 처한 현실을 말해 주고 싶은 것입니다. 그러나 그 젊은 놈은 오로지 기억 속에만 있을 뿐입니다. 그래서 그 젊은 녀석은 오래전에 사라지고 이 늙은 놈만 남았지.”라 합니다.

 

영화속 대사를 보면 불교의 연기법을 잘 설명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업과 업의 과보에 대한 것입니다. 부처님은 바라문 청년에게 뭇삶들은 자신의 업을 소유하는 자이고, 그 업을 상속하는 자이며, 그 업을 모태로 하는 자이며, 그 업을 친지로 하는 자입니다. 업이 뭇삶들을 차별하여 천하고 귀한 상태가 생겨납니다.”(M135)라 했습니다. 지금 고통 받고 있는 것은 자신이 이전에 저지른 행위에 대한 과보입니다. 그럼에도 대승에서는 이를 부정합니다. 오로지 아함경에서만 보이는 제일공경에 유업보이무작자(有業報而無作者)”라는 말이 대표적입니다.

 

제일공경이 왜 단멸론적 견해인가?

 

전남대 이중표교수는 강연에서 태어남도 없고 죽음도 없고 열반도 없다고 했습니다. 있다면 현재 행위하는 것만 있을 뿐이라 합니다. 명사는 관념적이고 개념적인 것으로 실재하지 않고 오로지 동사적인 행위만 의미 있을 뿐이라 합니다. ‘비가 온다고 했을 때 비가 와야 의미 있는 것이지 명사라는 말은 있을 수 없다는 말입니다. 이런 논리를 적용하면 반야심경에서 말하는 도 없고 도 없습니다. 오로지 단어로서만 존재합니다. ‘열반도 있을 수 없습니다. 열반은 열반하다와 같이 동사로서만 의미 있을 뿐이라 합니다. 그런데 이중표 교수가 강연에서 자주 인용하는 말이 유업보이무작자(有業報而無作者)”입니다.

 

제일공경은 공()에 대한 교리를 설명해 놓은 경입니다. 오로지 대승경전 아함경에서만 볼 수 있고 빠알리니까야에는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의 유업보이무작자(有業報而無作者)”는 단멸론적 견해라는 사실입니다. 이 말은업보는 있으나 작자는 없다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유업보이무작자(有業報而無作者)”라는 문구는 아쩰라 깟싸빠의 경에서 행위하는 자와 경험하는 자가 다르다(Añño karoti añño paisavediyatī)” (S12.17)와 정확하게 일치합니다. 부처님은 이런 견해에 대하여 그렇게 주장한다면, 그것은 허무주의에 해당하는 것입니다.(S12.17)라고 분명히 말씀 했습니다.

 

공의 교리를 설명하는 제일공경은 초기불교 입장에서 본다면 허무주의적 견해입니다. 이는유업보이무작자(有業報而無作者)”라는 말이 과거와 미래는 현재처럼 실재하지 않으며 오직 현재만이 존재한다.”라는 바수반두의 지론에 따른 것입니다. 오로지 현재만이 존재한다면 명사로 된 것은 실재하지 않는 관념적인 것이 되어 버립니다. 반야심경에서와 같이 모두 무()자로 부정됩니다. 태어남도 없고 죽음도 없고 열반도 없습니다. 그러나 태어난다’ ‘죽는다’ ‘열반한다는 있게 됩니다. 동사만 허용되고 명사는 허용되지 않는 것입니다. 오로지 현재만 인정되니 삼세양중인과가 부정됩니다. 당연이 윤회도 부정됩니다.

 

사건과 사건들로

 

영화 쇼생크의 탈출에서 40년을 복역한 흑인 레드는 마침내 가석방됩니다. 그러나 한정된 지역에서 살아야 합니다. 40년동안 복역해서일까 잘 적응하지 못합니다. 화장실에 가는 것까지 매니저에게 가도 좋은지 물어 봅니다. 너무 오랫동안 감옥에 있어서 길들여진 것입니다. 그런데 레드는 다시 감옥으로 돌아가고자 합니다. 세상에서 힘겹게 사는 것 보다 감옥이 더 편한 것입니다. 그래서 감옥으로 돌아 갈 궁리만 합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또 다른 범죄를 저질러야 합니다. 마침내 레드는 지역을 벗어납니다. 가석방 상태이기 때문에 지역을 벗어나는 것은 범죄행위로 간주하여 수감됩니다. 탈출에 성공한 영화속 주인공을 만나기 위해 버스를 타고 가는 것으로 영화는 끝나갑니다. 앞으로 또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릅니다.

 

오늘은 어제의 연속입니다. 내일은 오늘이 있기에 성립합니다. 과거와 현재, 미래가 단지 선과 같은 시간속에서만 있는 것이 아니라 사건과 사건들로 이루어졌다고 볼 수 있습니다. 영화에서 흑인 레드는 40년동안 복역한 것은 과거 젊은 시절 끔찍한 범죄에 대한 과보입니다. 그래서 젊고 바보 같은 녀석(a young, stupid kid)’이 끔찍한 범죄를 저질렀다고 합니다. 타자처럼 말하지만 동일인입니다. 그러나 그 젊은 녀석은 오래전에 사라지고 이 늙은 놈만 남았지라고 말하는 것으로 보아서는 동일인이 아닙니다. 사건과 사건의 연속입니다.

 

부처님은 작론자(kiriyavādin)

 

늘 현재를 살아 갑니다. 과거는 이미 지나갔고 미래는 오지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지나간 과거나 미래는 없고 오로지 현재만 있다고 말한다면 단멸론적 견해가 되기 쉽습니다. 제일공경에서와 같이 유업보이무작자(有業報而無作者)”라하여 업보는 있으나 작자는 없다라 하여 무작론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부처님 가르침에 따르면 이는 명백히 단멸론입니다.

 

원인과 결과, 업과 업의 과보가 작용하지 않아 무작론(akiriyā-diṭṭhi)이라 합니다. 무작론은 해롭거나 유익한 업의 효용성을 부정하는 것입니다. 대표적으로 모든 것은 전생이라는 원인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라는 숙작인설(pubbekatahetūvāda), 모든 것은 절대자라는 원인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라는 존우화작설(issaranimmāahetuvāda), 모든 것은 원인 없이 조건 없이 만들어진 것이라는 무인론(ahetuavāda)입니다.

 

제일의 공경에 실려 있는 “유업보이무작자 (有業報而無作者)”라는 말도 역시 무작론입니다. 반면 부처님은 업과 업의 작용을 설했기 때문에 스스로 ‘작론자(kiriyavādin)’라 했습니다. 이는 수행승들이여, 과거세의 거룩한 님, 올바로 원만히 깨달은 님이었던 세존들도 업을 설하고 업의 과보를 설하고 정진을 설하였다.”(A3.135)라고 작론을 설하신 것에서 알 수 있습니다.

 

양극단을 떠나 중도로서

 

괴로움에 대하여 내 탓이요!”라며 행위자와 경험자를 동일시하면 영원주의 견해입니다. 또한 괴로움에 대하여 네 탓이야!”라며 행위자와 경험자를 다르다고 본다면 허무주의적 견해입니다. 영원주의와 허무주의는 양극단으로 성립할 수 없습니다. 양극단을 가지면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양극단을 떠나 중도로서 가르침을 설한다고 했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연기법입니다. 부처님은 연기의 유전문과 환멸문으로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했습니다.

 

 

깟싸빠여, 여래는 이러한 양극단을 떠나서 중도로서 가르침을 설합니다. 무명을 조건으로 형성이 생겨나고, 형성을 조건으로 의식이 생겨나며, 의식을 조건으로 명색이 생겨나고, 명색을 조건으로 여섯 감역이 생겨나며, 여섯 감역을 조건으로 접촉이 생겨나고, 접촉을 조건으로 느낌이 생겨나고, 느낌을 조건으로 갈애가 생겨나고, 갈애를 조건으로 집착이 생겨나며, 집착을 조건으로 존재가 생겨나고, 존재를 조건으로 태어남이 생겨나고, 태어남을 조건으로 늙음과 죽음, 슬픔, 비탄, 고통, 근심, 절망이 생겨납니다다. 이 모든 괴로움의 다발들은 이와 같이 생겨납니다.

 

그러나 무명이 남김없이 사라져 소멸하면 형성이 소멸하고, 형성이 소멸하면 의식이 소멸하고, 의식이 소멸하면 명색이 소멸하고, 명색이 소멸하면 여섯 감역이 소멸하고, 여섯 감역이 소멸하면 접촉이 소멸하고, 접촉이 소멸하면 느낌이 소멸하고, 느낌이 소멸하면 갈애가 소멸하고, 갈애가 소멸하면 집착이 소멸하고, 집착이 소멸하면 존재가 소멸하고, 존재가 소멸하면 태어남이 소멸하고, 태어남이 소멸하면 늙음과 죽음, 슬픔, 비탄, 고통, 근심, 절망이 소멸합니다. 이 모든 모든 괴로움의 다발들은 이와 같이 해서 소멸합니다.”(S12.17, 전재성님역)

 

 

2017-06-01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