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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경전은 훌륭한 SF영화의 소재, 영화 ‘맨 오브 스틸(Man of Steel)’을 보고

담마다사 이병욱 2017. 6. 15. 12:06

 

초기경전은 훌륭한 SF영화의 소재, 영화 맨 오브 스틸(Man of Steel)’을 보고

 

 

요즘 영화를 즐겨 보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영화관에서 돈 내고 보는 것이 아닙니다. 케이블채널에서 제공되는 무료영화입니다. CGV, 씨네프 등 여러 영화채널이 있어서 채널이 돌아 가는 대로 봅니다. 그러다 보니 장르를 가리지 않습니다. 눈길을 끌면 그대로 보게 됩니다. 그런 것 중의 하나가 맨 오브 스틸(Man of Steel, 2013)’입니다.

 

 

 

 

 

 

영화 맨 오브 스틸

 

영화 맨 오브 스틸을 굳이 우리말로 표현하자면 강철인간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예전에 TV로 방영되었던 수퍼맨을 연상케 합니다. 실제로 영화에서 수퍼맨이라 부릅니다. 그런데 이 영화를 보면 탄생배경이 역사에서 있어서 신화를 보는 듯합니다. 그것은 영웅의 탄생설화 같은 것입니다.

 

어느 나라에서나 역사서를 보면 나라를 건국한 시조는 좀 특별난데가 있었습니다. 보통사람들과 달리 하늘의 자손이라는 이야기가 많습니다. 인간이 아닌 외계에서 건너 온 특별한 능력을 가진 자로부터 역사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에서도 단군왕검에 대한 신화를 보면 하늘사람과 관련이 있습니다. 영화 맨 오브 스틸역시 고도로 문명이 발달한 우주의 어느 종족이 등장합니다.

 

영화에서 아이는 초능력을 가졌습니다. 인간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볼 뿐만 아니라 듣지 못하는 것도 듣습니다. 이런 능력을 가진 것은 외계에서 캡슐로 보내졌기 때문입니다. 캡슐이 미국 캔자스 어느 농민의 집에 떨어졌는데 그 안에는 간난아기가 있었습니다.

 

아이는 자라면서 자신이 다른 아이들과는 다른 능력을 가진 것을 알게 됩니다. 이런 사실을 알고 괴로워합니다. 다른 사람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고 다른 사람이 듣지 못하는 것을 듣는 것이 고통스런 것입니다. 이에 양아버지는 감각에 집중하라라며 벗어나는 방법을 알려 줍니다. 영화에서 이 대사는 마치 명상을 해라라는 말과 같이 들립니다. 마음을 대상에 집중하는 일종의 사마타수행이라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일까 아이는 감각대상에 집중함으로 인하여 보는 것과 듣는 것의 장애를 극복합니다. 마치 부처님이 어린 시절 성밖에 나가서 생, 노, 병, 사를 목격하고 괴로워 하다 선정에 들어 마음의 평온을 찾는 것 같습니다.ㅣ

 

영화는 통속적입니다. 초능력을 가진 자가 지구를 정복하는 외계의 문명과 싸워서 이긴다는 줄거리입니다. 그런데 초능력을 마음대로 구사하는 이 영화를 보는 내내 종교의 창시자 예수나 붓다를 떠 올렸습니다. 경전에서 보는 예수나 붓다는 초능력자였기 때문입니다. 다름 아닌 수퍼맨이었습니다.

 

부처님은 초능력자

 

초기경전에서 보는 부처님은 초능력자입니다. 영화에서 수퍼맨과 같습니다. 초기경전에 따르면 부처님은 숙명통과 천안통을 가졌습니다. 또한 타인의 마음을 알 수 있는 타심통, 마음대로 이동할 수 있는 신족통 등 육신통을 자유자재로 구사했습니다. 이러한 신통으로 외도를 제압했습니다.

 

부처님의 신통에 대한 이야기는 니까야(율장)와 위나야(율장) 도처에서 볼 수 있습니다. 니까야에서는 그는 하나에서 여럿이 되며, 여럿에서 하나가 된다. 나타나기도 하고 사라지기도 하고 자유로운 공간처럼 집착 없이 담을 통과하고 성벽을 통과하고 산을 통과해서 간다. 물속에서처럼 땅속을 드나든다. 땅 위에서처럼 물에서도 빠지지 않고 걷는다. 날개 달린 새처럼 공중에서 앉은 채 움직인다. 손으로 이처럼 큰 위력을 지니고, 이처럼 큰 능력을 지닌 달과 해를 만지고 쓰다듬는다.” (M12) 라는 문구로 정형화 되어 있습니다.

 

부처님은 불을 섬기는 외도 깟싸빠 삼형제를 신통으로 굴복시켰습니다. 연쇄살인자 앙굴리말라 역시 부처님의 신통에 굴복했습니다. 초기경전에 부처님은 순식간에 나타났다가 사라지기도 합니다. 이에 대하여 마치 힘센 사람이 굽혀진 팔을 펴고 펴진 팔을 굽히는 듯한 사이에 모습을 나타냈다.”라는 정형구로 표현 되어 있습니다.

 

쌍신변(雙身變: yamaka-pāihāriya)에 대하여

 

온갖 신통을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부처님은 쌍신변(雙身變: yamaka-pāihāriya)에 능합니다. 마치 손오공이 여러 개의 분신을 만드는 것 같습니다. 쌍신변에 대한 이야기는 법구경 Dhp.181번 인연담 쌍신변과 관련된 이야기에서 알 수 있습니다. 부처님이 외도를 조복받기 위한 쌍신변을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쌍신변의 기적을 행했다. 상반신에서는 불꽃의 다발이 나왔고 하반신에서는 물결의 흐름이 솟아나왔다. 하반신에서는 불꽃의 다발이 나왔고 상반신에서는 물결의 흐름이 솟아나왔다. 전반신에서는 불꽃의 다발이 나왔고 후반신에서는 물결의 흐름이 솟아나왔다. 후반신에서는 불꽃의 다발이 나왔고 전반신에서는 물결의 흐름이 솟아나왔다. 이처럼 오른쪽 눈과 왼쪽 눈, 오른쪽 귀와 왼쪽 귀, 오른쪽 콧구명과 왼쪽 콧구명, 오른쪽 어깨와 왼쪽 어깨, 오른쪽 옆구리와 왼쪽 옆구리, 오른쪽 발과 왼쪽 발, 손가락 끝과 손가락 뿌리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몸의 모든 구멍에서는 물결의 흐름이 솟아나왔다. 그것들은 여섯가지 색깔-청황적백과 주황색과 광채-을 띄었다. 부처님께서 걸으면, 영상(nimitta)은 서 있거나 앉거나 누웠다. 영상이 누우면, 부처님께서는 걷거나 서거나 앉았다. 그날 부처님께서는 쌍신변을 행하면서 대중들에게 가르침을 설했다.”(법구경 Dhp.181번 인연담 쌍신변과 관련된 이야기’, 전재성님역)

 

 

마치 손오공의 한장면을 보는 듯 합니다. 아마 손오공 저자가 법구경 인연담 쌍신변과 관련된 이야기를 이야기를 보고 모티브를 얻었을지 모릅니다. 그런 쌍신변은 부처님께서 걸으면, 영상(nimitta)은 서 있거나 앉거나 누웠다. 영상이 누우면, 부처님께서는 걷거나 서거나 앉았다.”라는 표현으로 잘 나타나 있습니다. 똑같이 닮은 표상이 하나 더 있어서 완전히 다른 사람처럼 행동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영어로 쌍신변에 대하여 “double appearances”라 표현합니다.

 

초기경전에 등장하는 우주적 스케일의 이야기와 신통을 영화화 한다면 훌륭한 SF영화가 될지 모릅니다. 아마 손오공은 초기경전에 등장하는 신통과 우주적 스케일의 이야기에 감동받아 만들어졌는지 모릅니다. 초기경전에 등장하는 하느님(Brahma: 梵天)이나 제석천, 마라(악마) 등 갖가지 초월적 존재가 등장하는데 아마 후대 손오공이라는 소설의 좋은 모티브가 된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저 그러려니하면서

 

어떤 이들은 초기경전에 등장하는 초월적이고 신비적인 이야기에 대하여 허구라 말합니다. 자신의 감각적 인지에서 벗어나는 것은 모두 부정하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이것 제하고 저것 제하다 보니 수행관련 가르침 등 몇 가지 남지 않습니다. 마치 빈데 잡으려다 초가삼간 태우는 격입니다. 신통 등 초월적인 내용이 들어가 있다고 하여 배척하다 보면 중요한 메시지를 놓치게 됩니다.

 

초기경전에서는 수 많은 초월적 존재가 등장합니다. 그리고 시공간을 넘나드는 우주적 스케일이 이야기가 전개됩니다. 자신의 감각적 인지를 초월하고 과학으로도 증명되지 않는 이야기가 많지만 그렇다고 모두 부정할 수 없습니다. 마치 돼지의 눈과 사람의 눈이 다른 것과 같습니다.

 

돼지의 눈에는 돼지가 인식하는 세상이 보이고, 개의 눈에는 개가 인식하는 세상이 보입니다. 사람의 눈에는 사람이 인식하는 세상이 보일 것입니다. 부처의 눈에는 역시 부처가 인식하는 세상이 보일 것입니다. 부처님은 부처의 눈으로 바라 본 세상을 경전에서 말씀 했습니다.

 

부처의 눈이 되어 보지 않은 자가 초월적 존재나 신비한 이야기에 대하여 허구라 하여 배척하는 것은 대단히 경솔합니다. 자신의 감각적 인지를 벗어났다고 해서 배척한다면 자신만 손해일 것입니다. 그저 그러려니하면서 경전을 접했을 때 부처님에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접할 수 있습니다.

 

고장난 녹음기처럼

 

초기경전에서 볼 수 있는 신통에 대한 이야기는 본질이 아닙니다. 본질을 설명하기 위한 일종의 예비설명이라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회의론자들은 이것 저것 빼 버리고 오로지 현재만 이야기합니다. 그러다 보니 이것 뿐입니다. 이것 외에 다른 것 없습니다.”라며 책상을 주먹으로 탕탕치거나 종소리를 들려 줍니다. 말로서 논리적으로 깨달은 것을 설명하지 못하니 이것 뿐이야, 이것뿐이라니까라는 말만 되풀이 합니다. 이런 현상에 대하여 원담스님은 수행일기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오월의 마지막 날. 계절은 오고가도 숲은 하늘은 그대로. 물상이 변화무쌍해도 공간은 그대로다. 그렇다고 상대유한적인 것의 배후에 숨어서 이 모든 변화를 관조하며 목격하는 하나의 그 무엇이 있다고 생각하지 말라. 이것은 형이상학자들과 초월적 실재론자들의 치명적인 결함이다.

 

그들은 무상한 것들의 배후에서 영원한 어떤 것을 찾아내 존재의 확실성을 추구하려한다. 그 결과로서 나온 것이 궁극적 일자’, ‘참 나’, ‘불변의 실체’, ‘유일론-그것이 유물론이든지 유심론이든지 유신론이든지간에. 상일주재의 일자를 설정하여 만물의 다양성과 무상성이 불러일으키는 불안을 해소하려고 들고 나온 개념이다.

 

그들은 왜 사물의 다양성, 복잡성, 무상성을 불편하게 여겨서 항상하며 변하지 않는, 그러면서 복잡다단한 개개의 현상을 산출한 모태가 되며 근거가 되는 것을 설정하려할까? 그렇게 하는 것이 지적 능력이 낮은 사람들에게는 이해하기 편하기 때문이다.

 

엄마나 아빠 같은 어떤 하나의 존재가 있어 이렇게 다양하고 변화무쌍한 만물을 낳거나 만들었다고 생각하든지, 온갖 물줄기가 원천의 샘물에서 흘러나오듯 삼라만상이 하나의 근원에서 나왔다고 생각하는 것이 얼마나 이해하기 쉬운가? 더구나 엄마아빠 같은 존재와 샘물 같은 근원을 찾아서 거기로 돌아가기만 하면 그것과 함께 영원히 존재할 수 있으니까 얼마나 위안이 되겠는가? 불교적으로 보면 그게 바로 자아의 영속성과 초월성을 확보하려는 술책이니, 아집에 다름이 아니다. 존재의 확실성, 자아의 영속성을 추구하려는 짓이다.

 

존재의 근원, 최초의 원인, 궁극의 실체, 포괄적 일자, 지적인 설계자, 우주적 관조자 등등 이런 개념들은 유치한 수준의 관념적 유희이다. 거기에 물들면 이것 밖에 없다느니, ‘오직 이것 뿐’, ‘이것만 알면 끝’, ‘이것만 믿으면 구원이라는 손쉬운 가르침과 수행론에 빠지게 된다. 또 복잡다기한 현상들을 최초의 원인이나 基體기체(바탕이나 토대가 되는 실체)로 환원하여 이해하려 한다. 그리고 최초의 원인으로 돌아가거나(還元) 기체와 합일하는 것으로 과정의 완성을 꾀한다. 이러한 시도 또한 불교 안에서도 일어났다. 부처님께서 開示개시한 지견을 배우고 익히며, 佛知見대로 사유하고 실천하는 것이 수행이다. 이러한 생각이 떠오른 것을 정리해본다.

 

숲길에 산딸기가 빨갛게 익어가고, 두릅순은 거칠어져 간다. 올빼미가 우는 밤의 숲은 더욱 고적하다.

 

(원담스님, 수행일기 2017 하안거-3)

 

 

부처님의 가르침을 모르는 자들은 한결 같이 하는 말이 있습니다. 그것은 이것 밖에 없다느니, ‘오직 이것 뿐’, ‘이것만 알면 끝’, ‘이것만 믿으면 구원이라는 말입니다. 자칭타칭 깨달았다는 도인들이 하는 말은 자신의 생각을 말할 뿐입니다. 교리도 모르고 가르침도 모르니 그저 하는 말이 이것 뿐이라니까. 이것 뿐이거든말만 고장난 녹음기처럼 되풀이 합니다.

 

원담스님에 따르면 부처님 가르침대로 따르는 것이 수행이라 했습니다. 가르침을 모르는 자들이 이것만 알면 모든 것이 끝난다고 떠 벌리지만 삿된 견해에 지나지 않음을 말합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 개시(開示)한 지견을 배우고 익히며, 불지견(佛知見)대로 사유하고 실천하는 것이 수행이다.”라고 결론적으로 말했습니다.

 

초기경전은 훌륭한 SF영화의 소재

 

초기경전에서 접한 부처님은 수퍼맨입니다. 인간과는 다른 능력을 가진 초능력자입니다. 부처님의 초월적 능력은 경전 도처에서 다양하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영화 맨 오브 스틸을 보면서 내내 초기경전에서 본 초월적 존재와 초능력을 떠 올렸습니다.

 

돼지의 눈에는 돼지의 세상만 보이듯이, 부처의 눈에는 부처의 세상만이 보입니다. 그래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접하여 가르침을 이해하면 법안(法眼)이 생겨난다고 했습니다. 열리는 것이 아니라 생겨나는 것입니다. 이는 초전법륜경에서 또한 그 가르침을 설할 때에 존자 꼰당냐에게 무엇이든 생겨난 것은 그 모두가 소멸하는 것이다.’라고 순수하고 때묻지 않은 진리의 눈이 생겨났다.”라는 대목에서도 알 수 있습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이해 했을 때 법안, 즉 진리의 눈(dhammacakkhu)이 새롭게 생겨난 것입니다. 여기서 생겨나다는 빠알리어 ‘udapādi’를 번역한 것입니다. 빠알리어 ‘udapādi’‘uppajjati’의 형태로서 ‘to be born’의 뜻입니다.  없던 것이 새롭게 생겨난 것을 말합니다.

 

부처님은 초월적 진리를 알려 주었습니다. 그것은 일반세상사람들이 추구하는 삶의 방식과는 다른 것입니다. 남자와 여자로 구분되어 있는 세상에서는 욕망을 극복할 수 없어서 욕망대로 살아갑니다. 그러나 부처님은 욕망의 세계를 벗어난 세계가 있다고 말씀 하시면서 그 세계로 가기 위한 방법을 일러 주었습니다. 이를 설명하기 위해서일까 초기경전에는 하느님(Brahma), 제석천, 악마 등 초월적 존재와 갖가지 신비로운 이야기가 등장합니다. 이를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고 그저 그러려니하면서 받아들입니다.

 

영화 맨 오브 스틸을 보면서 부처님은 초능력자이고 구원자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범부의 눈으로 볼 수 없는 부처님의 세계가 초기경전에서 전개 됩니다. 소설 손오공이 초기경전을 모티브로 했듯이, 어쩌면 초기경전은 훌륭한 SF영화의 소재가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 보게 됩니다.

 

 

2017-06-15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