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속의연꽃

강호의 숨은 고수들은 무엇하는가?

담마다사 이병욱 2017. 6. 9. 16:36

 

강호의 숨은 고수들은 무엇하는가? 

 

 

혼자 일하는 자는 몹시 바쁩니다. 모든 것을 혼자서 해야 합니다. 당연히 일도 혼자 해야 합니다. 일거리가 있을 때 미루지 않고 즉시에 해야 합니다. 미루어서 좋을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하나를 끝내 놓고 잽싸게 또 다른 일을 해야 하는 것이 남는 장사이기 때문입니다. 누가 시켜서 하는 일이 아니라 내가 아니면 할 사람이 없기 때문에 해야 하는 일입니다. 화분에 물주는 것, 휴지통 비우는 것, 커피나 차를 타서 마시는 것, 전자계산서 처리하는 것 등 모든 것을 혼자 해야 합니다.

 

잃은 것은 세월이고 얻은 것은 나이뿐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았을 때 대가는 매우 큽니다. 육개월에 한번씩 있는 부가세신고기간을 놓쳐 버리면 벌금폭탄을 맞아야 합니다. 나가지 않아야 할 돈이, 그것도 많이 나갈 때는 한푼 두푼 아낀 것이 허사가 되는 듯합니다. 작은 것을 아끼다가 때를 놓쳐 큰 손실이 났을 때 게으름을 탓하게 됩니다. 정신 똑 바로 차리지 않으면 도처에 손실요인이 있습니다. 원금도 타먹지 못하는 보험을 십년간, 그것도 상당한 금액이 매월 빠져 나갔을 때 참으로 아까웠습니다. 확인하고 점검하지 않고 대충 넘어가면 손해 보는 세상입니다. 그러나 무엇 보다 아까운 것은 세월입니다.

 

세상사람 사는 방식대로 세상을 살았을 때 후회하는 날이 옵니다. 단지 생존하기 위하여 돈의 노예처럼 세월을 보냈을 때 아까운 생각이 들어갑니다. 월급받아 먹는 재미로 하루일과 대부분을 보냈을 때 세월은 훌쩍 지나갑니다. 밤낮없이, 주말없이, 휴가없이 오로지 앞만 보고 세월을 보냈을 때 더 이상 쓸모 없는 사람이 되어 있습니다. 그렇다고 크게 벌어 놓은 것도 없습니다. 잃은 것은 세월이고 얻은 것은 차곡차곡 쌓인 나이뿐입니다. 일이 벌어지고 난 다음 자신의 처지를 보았을 때 이제까지 살아온 삶의 방식이 모두 잘못되었음을 알게 됩니다.

 

모든 것이 다 잘못되었다!

 

인생비육십(人生非六十)이라 합니다. 나이 육십이 되어 어느 날 문득 생각해 보니 모두 잘못되었다는 것입니다. 너무 늦었다고 볼 수도 있고 이제부터 시작이라 볼 수도 있습니다. 더 일찍 알았더라면 인생이 달라졌을지 모른다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인생을 다 살고 난 다음 잘못된 것을 알았을 때 날이 샌 것 같은 느낌일 것입니다. 그러나 늦었을 때가 가장 빠른 것이라 합니다.

 

인생의 변곡점이 생긴 것은 십이년전입니다. 더 이상 월급생활자가 될 수 없어서 일인사업자의 길로 가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개인적으로 전화위복입니다. 월급타먹는 재미로 계속 조직생활을 했더라면 나의 모든 시간은 빼앗기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어쩌면 다행히도 홀로 되었을 때 비로소 나의 시간을 갖게 되었습니다. 늦게 가르침을 접하여 가르침에 빠져 사는 세월이 결코 아깝지 않습니다. 이럴 줄 알았더라면 십이년전이 아니라 이십년 전에 잘렸더라면 더 좋았을 것이라는 생각도 해봅니다.

 

글을 하나 받았는데

 

인터넷에 글쓰기 하면서 하루를 보내고 있습니다. 십년이상 쓰고 있다보니 이제 생활화가 되어서 매우 자연스럽습니다. 생활의 달인처럼 글쓰기 달인이 된 듯한 느낌입니다. 생각 먹은 것은 무엇이든지 글로 표현 되는 능력을 갖추게 된 것입니다. 만시간 법칙이라 하여 하루 서너시간씩 십년 하면 전문가가 된다고 합니다. 하루 반나절을 매일 그것도 십년간 글을 썼으니 만시간 법칙에 따른다면 전문가라 볼 수 있습니다. 이런 표현에 대하여 누군가는 자만이라 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댓글을 하나 받았습니다. 오로지 글만 쓰는 자에 대한 따끔한 질책성 글이라 볼 수 있습니다.

 

 

서가세존의 기르침인 불교는 테크닉도 과학도 철학도 종교도 아닙니다
서가세존의 가르침인 불교는 인간이라면 누구나 깨달아 부처가 되어 윤회를 벗어나라는 가르침인 것입니다
말과 글 언어와 문자에 얽매이거나 어느 하나의 입장에 서기보다는 침묵하며 자신을 냉엄하게 돌아보는 것이 학인의 입장 수행자의 마음가짐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아직은 서가세존과 같은 깨달음에 이르지 못하였기에 감히 이렇다 저렇다 하는 것이 사뭇 부담스럽지만 진흙속의 연꽃이기에 감히 용기를 내어 몇 자 적어봅니다

오랜 가뭄 끝에 단비는 아쉬운듯 차창을 스쳐가고
지식의 홍수는 차고 넘치나 마실 물은 못되나 봅니다
불어오는 바람에 저리듯 스며드는 미세먼지와 황사는
정상에 가까울수록 폐부에 깊숙이 파고들지만 반갑지만은 않습니다

 

(J법우님)

 

 

이런 류의 댓글을 종종받습니다. 대체로 처음 방문하는 사람들이라 볼 수 있습니다. 견해가 맞지 않아서 일수도 있습니다. 또한 많이 배운 사람들일 수 있습니다. 한수행 했다는 사람일 수 있습니다. 분명한 사실은 부정문입니다.

 

부정적인 글을 주시는 분들은 공통적으로 언어와 문자에 매여 있다는 것을 지적합니다. 아마 불립문자, 사교입선, 직지인심 등 동아시아 불교전통에 따른 것이기도 할 것입니다. 꿀맛은 꿀을 먹어 본 자만이 알 수 있듯이, 진리라는 것이 아무리 언어와 문자를 사용하여 표현한다고 해도 체험하지 않는 한 알 수 없음을 말합니다. 이런 주장에 공감합니다.

 

삼류, 비급, 비주류 정신을 지향하며

 

사람들은 보통불자의 글에 대하여 과대평가하는 듯합니다. 집중수행 한번 해 본적이 없는 자가 경전만 보고서 쓴 글에 대하여 높이 평가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일을 하지 않으면 삶을 영위할 수 없는 생활인이 시간 내서 쓴 글은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럼에도 오로지 학문만 하는 자나 오로지 수행만 하는 자의 눈높이에서 평가하려는 경향이 있는 것 같습니다.

 

올린 글은 학자들의 논문도 아니고, 스님들의 법문도 아닙니다. 현실의 삶을 살아가는 생활인이 일상에서 보고 듣고 느낀 것을 경전을 바탕으로 쓴 글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늘 삼류, 비급, 비주류 정신을 지향합니다. 학자들은 시간 있으면 논문 쓰려 할 것입니다. 스님들은 시간 있으면 책을 쓰려 할 것입니다. 그래서일까 인터넷에서는 학자들이나 스님들의 글이 보이지 않습니다. 아마 인터넷에 글을 쓰는 것에 대하여 잡문이라 여겨 시간낭비로 보는 것 같습니다.

 

말하듯이 쓰면 된다

 

사람들은 글쓰기에 대하여 대단히 어려워하는 것 같습니다. 글은 작가나 기자, 학자 등 글을 써서 먹고 사는 사람들이나 쓰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남이 쓴 글이나 읽고 마는 것이 보통입니다. 스스로 글을 써 보겠다는 엄두를 내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정치인에서 작가로 변신한 유시민님에 따르면 글은 말하듯이 쓰면 된다고 했습니다. 글을 잘 쓰려고 하면 한 줄도 나갈 수 없지만 말 하듯이 쓰면 얼마든지 쓸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말에 공감합니다.

 

처음부터 글을 잘 쓰지 못했습니다. 쓰다보니 늘게 된 것입니다. 직장 다닐 때 까지만 해도 기안서 외에는 글이라고는 써 본적이 없습니다. 아무 것도 할 것이 없게 되었을 때, 오로지 인터넷 밖에 할 것이 없었을 때 글이라는 것을 한번 써 볼까?”라며 2005년 당시 유행하던 블로그를 만들어 글을 써 본 것이 처음입니다.

 

강호의 숨은 고수들에게

 

세상에는 훌륭한 분들이 많습니다. 강호에는 숨은 고수들이 많습니다. 모든 것이 오픈되고 공유되는 인터넷과 정보통신시대에 강호의 숨은 고수들이 활약하는 그날이 왔으면 좋겠습니다. 그 동안 배우고 경험한 것을 회향하는 의미에서 인터넷에 글쓰기 하기를 바랍니다. 학자들은 논문에만 신경 쓸 것이 아니라 인터넷에 일주일에 한번 만이라도 글을 올려 놓는다면 가르침에 갈망하는 불자들에게 감로수가 될 것입니다. 스님들은 깨달음의 경지를 법문형식으로 유튜브에 일주일에 한번 이라도 올려 놓는 다면 불자들의 삶이 풍요로워질 것입니다.

 

나는 한 자도 설한 바 없다?

 

수행도 해 보지 않은 자가 인터넷에 글을 쓴다고 종종 비난 받습니다. 그러나 경전을 근거로 하기 때문에 글을 쓸 수 있습니다. 만일 내 생각을 글로 쓰라고 한다면 몇 번 쓰지 않아 바닥이 날 것입니다. 그러나 부처님의 가르침은 무궁무진하여 아무리 퍼도 마르지 않는 것 같습니다. 수십권에 달하는 방대한 빠알리니까야를 접하면 몰랐던 것으로 가득합니다. 수 천년 전에 이런 생각을 했다는 것이 놀랍습니다. 어느 것 하나 버릴 것이 없습니다. 그러다 보니 매일 글을 쓰게 되었습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빠알리니까야에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부처님은 45년 동안 설법한 것에 대하여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수행승들이여, 여래는 위없이 바르고 원만한 깨달음을 올바로 원만히 깨달은 밤부터, 잔여 없는 열반에 세계로 완전한 열반에 든 밤에 이르기까지,

그 사이에 대화하고 말하고 설한 모든 것이 이와 같고, 다른 것과 같지 않다. 그러므로 여래라 한다. (It.121)

 

 

 

 

 

부처님은 깨달은 해부터 열반에 든 해까지 45년동안 계속 설법했습니다. 오늘날 보는 빠알리니까야에 고스란히 남아 있습니다. 대승경전 능가경에 따르면 “나는 한 자도 설한 바 없다.”라 했습니다. 이는 깨달음이라는 것이 언어와 문자로는 표현할 수 없는 것이고 오로지 마음과 뜻으로만 전승되는 것임을 나타내기 위한 말로 보입니다. 그러나 부처님은 45년 동안 쉼 없이 설했습니다. 부처님은 경, 응송, 수기, 게송, 감흥어, 여시어, 전생담, 미증유법, 교리문답이라는 구분교 형식으로 방대한 가르침을 남겼습니다. 이런 일은 부처님만이 가능한 일 입니다.

 

정득각자이기에 가능한 일

 

연각불은 연기법을 깨달아 부처가 된 자를 말합니다. 그러나 연각불은 설법을 할 수 없습니다. 깨달음에 대하여 한마디도 말할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단지 체험해 보면 안다거나, 선승이 깨달음의 경지를 말로 표현 할 수 없어서 이나 을 사용하는 것 정도일 것입니다. 반면 부처님은 깨달음의 경지를 언어나 말로 표현했습니다. 누구나 알아 들을 수 있는 언어로 표현할 수 있어서 정등각자(Sammasambuddha)라 합니다.

 

오로지 정등각자만이 깨달음의 경지를 언어나 말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부처님은 한마디 설한바 없다가 아니라, 디가니까야에서 “아난다여, 나는 안팍의 차별을 두지 않고 가르침을 다 설했다. 아난다여, 여래의 가르침에 감추어진 사권은 없다.(D16) 라 한 것처럼 남김 없이 다 설했습니다. 이는 이띠붓따까에서 깨달은 밤부터, 잔여 없는 열반에 세계로 완전한 열반에 든 밤에 이르기까지, 그 사이에 대화하고 말하고 설한 모든 것이 이와 같고, 다른 것과 같지 않다.” (It.121)라 하여 끊임 없이 설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부처님은 45년동안 쉼없이 말을 한 것입니다. 정득각자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입니다. 그런 가르침이 우리말로 번역되어 유통되고 있습니다.

 

학습만 하는 자에 대하여

 

늘 가르침과 함께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경전은 언어나 문자적으로만 아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언어와 문자를 넘어 체험 해 보아야 합니다. 그래서일까 부처님은 앙굿따라니까야 가르침을 명상하는 자의 경에서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수행승들이여, 세상에 수행승이 가르침들, 즉 경, 응송, 수기, 게송, 감흥어, 여시어, 전생담, 미증유법, 교리문답을 학습한다. 그는 그 가르침을 학습하면서 하루를 다 보낸다. 그는 홀로 있는 것을 피하고 안으로 마음의 멈춤에 들지 않는다. 수행승이여, 그는 많이 학습한 자이지, 가르침을 명상하는 자는 아닌 것이다.”(A5.73)

 

 

부처님은 부처님이 설한 것에 대하여 학습만 하는 것을 경계했습니다. 가르침을알리면서 하루를 다 보내거나, 가르침을 암송하면서 하루를 다 보내거나, 가르침을 사유하면서 다 보내지 말라고 했습니다. 가르침을 아는 것도 좋지만 더 좋은 것은 명상하는 것입니다그래서 한적한 숲속에 홀로 들어가서 마음을 멈추는 수행을 하라고 했습니다. 다름 아닌 선정수행입니다.

 

교학승과 수행승이 다투었는데

 

새는 좌우 양날개로 날아 갑니다. 부처님 가르침 역시 교학과 수행이라는 양날개를 필요로 합니다. 한쪽 날개로 날 수 없듯이, 오로지 교학이나 오로지 수행만으로 가르침을 완전히 알 수 없습니다.

 

앙굿따라니까야 마하쭌다의 경에 따르면 교학승과 수행승이 다투는 장면이 있습니다. 그들은 서로 단점을 말하면서 비난합니다. 교학승은 수행승에게 이들은 도대체 무슨 선정에 든단 말인가? 도대체 어떻게 선정에 든단 말인가?”(A6.46) 라며 헐뜯고 비난했습니다. 반면 수행승들은 교학승들을 향해 들뜨고 오만하고 동요하고 수다스럽고 쓸데없이 지껄이고 새김을 잃고 올바로 알아차리지 못하고 산만하고 마음이 혼란되고 감관이 거칠다.” (A6.46) 라며 헐뜯고 비난했습니다.

 

교학승과 수행승들은 서로 단점만 보면서 비난했습니다. 이에 마하쭌다 존자는 두 수행승에게 장점을 보라고 했습니다. 단점만 보면 비난 하지만 장점을 보면 존경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마하쭌다는 수행승의 장점으로 “세상에 이러한 불사의 세계를 몸으로 접촉하고 있는 놀라운 사람들을 세상에서 만나기 힘들기 때문입니다. (A6.46)라 하여 열반을 체득할 수 있음을 들었습니다. 반면 교학승의 장점으로는 “세상에 이러한 심오한 의취를 지혜로 꿰뚫고 있는 놀라운 사람들을 세상에서 만나기 힘들기 때문입니다. (A6.46)라 하여 통찰지를 얻을 수 있는 것을 들었습니다. 수행승은 교학승이 얻을 수 없는 열반의 경지를 체득할 수 있고, 교학승은 수행승이 얻을 수 없는 위빠사나 통찰지를 얻을 수 있음을 말합니다.

 

교학보다 수행

 

부처님은 팔만사천법문을 설했습니다. 그렇다고 팔만사천법문만 배우고 가르쳐주고 암송하고 사유만 한다면 부처님 가르침을 다 아는 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마음을 닦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씀 했습니다.

 

 

수행승이여, 이와 같이 나는 많이 학습하는 자에 대하여 가르쳤고, 많이 알려주는 자에 대하여 가르쳤고, 많이 암송하는 자에 대하여 가르쳤고, 많이 사유하는 자에 대하여 가르쳤고, 가르침을 명상하는 자에 대하여 가르쳤다.

 

수행승이여, 제자들의 이익을 위하고 제자들을 애민히 여기는 스승으로서 나는 그대들을 애민히 여겨 해야 할 일을 그대들을 위하여 했다. 수행승이여, 여기 나무 아래의 주처들이 있고 여기 빈 집들이 있다. 수행승이여, 선정을 닦아라. 방일하지 말라. 나중에 후회하지 말라. 이것이 그대들에게 주는 가르침이다.”(A5.74)

 

 

부처님은 선정에 들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방일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가르침만 하루 종일 학습할 것이 아니라 명상수행을 병행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교학과 명상을 병행하는 것에 대하여 숫따니빠따 셀라의 경에서는 나는 곧바로 알아야 할 것을 곧바로 알았고, 닦아야 할 것을 이미 닦았으며, 버려야 할 것을 이미 버렸습니다. 그러므로 바라문이여, 나는 깨달은 님입니다.”(stn558)라 했습니다. 여기서 알아야 할 것은 사성제를 말하고, 닦아야 할 것은 팔정도를 말합니다. 사성제를 아는 것이 교학이고, 팔정도를 닦는 것이 수행입니다. 이렇게 부처님 가르침은 교학과 수행 양날개로 이루어집니다. 그러나 초기경전에서 부처님이 강조한 것은 교학보다 수행입니다.

 

강호의 숨은 고수들이 나서 주기를

 

종종 글을 받습니다. 처음 방문하는 사람들 중에는 많이 배운 자들도 있고 수행의 경지가 높은 자들도 있습니다. 그 중에는 보통불자의 글쓰기를 못마땅하고 불편하게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거나 말거나 오늘도 내일도 쓸 뿐입니다. 그런 글은 논문도 아니고 법문도 아닙니다. 보통불자가 일상에서 보고 듣고 느낀 것을 경전에 근거해서 적은 것입니다. 그날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이 대상이 됩니다.

 

언제까지 글만 쓰고 있을 수는 없을 것입니다. 때로 명상도 병행해야 할 것입니다. 비록 집중수행에 참가한 적은 없지만 그 동안 배운 것을 바탕으로 나름대로 시행 해 보고 있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항상 가르침과 함께 하는 것입니다. 마음이 산란하고 혼탁해졌을 때 명상하는 것도 좋지만 경을 읽는 것도 그에 못지 않게 좋습니다. 더 좋은 것은 자신의 생각을 글로 써 보는 것입니다. 물론 경전에 근거한 것입니다.

 

보통불자의 글쓰기는 한계가 있습니다. 그러나 능력껏 보시한다는 말이 있듯이, 아는 만큼 알려 주는 것입니다. ‘상구보리하화중생이라는 말이 있듯이 깨달음을 이룬 자가 알려 주는 것이 가장 이상적입니다. 이는 맛지마니까야 버리고 없애는 삶의 경에서 스스로 진흙에 빠진 사람이 다른 진흙에 빠진 사람을 건져 올린다는 것은 불가능하다.”(M8) 라 했듯이, 물에 빠진 자가 물에 빠진 자를 구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아는 만큼 알려 줄 수는 있을 것입니다.

 

대학을 졸업한 자가 소정의 교육을 이수하면 나이가 젊어도 교단에 설 수 있듯이, 아는 만큼 능력껏 가르쳐 줄 수 있습니다. 그것은 경전에 바탕을 두기 때문에 가능한 일입니다. 그러나 가장 이상적인 것은 학자들과 스님들이 나서는 것입니다. 또 강호의 숨은고수들이 나서는 것입니다. 이들이 자비의 마음으로 일주일에 한번이라도 자료를 올려 준다면 말과 글 언어와 문자에 얽매이거나 어느 하나의 입장에 서기보다는 침묵하며 자신을 냉엄하게 돌아보는 것이 학인의 입장 수행자의 마음가짐이라는 소리를 보통불자가 듣지 않을 것입니다.

 

 

2017-06-09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