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은 행위와 흔적을 남긴다, 제사의 당위성에 대하여
“거기 일어서지 마세요. 다쳐요”버스기사가 하는 말입니다. 걸쭉한 입담의 시골버스 기사는 폭군같습니다. 시골 노인들이 내리려고 일어서려 하면 가만 있으라고 야단칩니다. 말 잘 듣는 사람에게는 정거장이 아님에도 목적지에 내려다 줍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내맘대로 인께”라 합니다.
일년에 한번 시골가는 날입니다. 조부모와 백부백모의 합동제사가 있는 날입니다. 매월 이맘때가 되면 전국각지에 흩어져 사는 사촌들이 모이는 날입니다. 전남 함평에 있는 고향마을로 가기 위해 KTX를 탔습니다. 최첨단 교통수단은 광명역에서 광주송정역까지 불과 1시간 30여분만에 데려다 주었습니다. 마치 비행기 탄 것 같기도 하고 때로 순식간에 공간이동한 듯합니다.
고향가는 길에
고향마을로 가기 위해서는 시외버스를 타고 또 한참 걸어가야 합니다. 광주송정역에서 지하철로 한정거장 거리에 있는 송정공원역에서 영광가는 500번 시외버스를 탔습니다. 도시를 벗어나자 시원한 평야지대가 나타납니다. 호남곡창지대입니다.
버스타고 가다 보면 늘 보는 하천이 있습니다. 하천은 언제 보아도 물이 풍부합니다. 요즘 가뭄 때문에 물걱정 하지만 이곳 하천은 넘실대는 물이 보기만 해도 마음을 풍족하게 합니다. 그러나 집안에는 비극의 강입니다. 사촌형이 재수할 때 이곳에서 멱감다고 죽은 곳이기도 합니다. 늘 이곳을 지날 때면 넘실대는 물이 약간은 공포스럽기도합니다.
버스는 약 사십분 가량 달려 문장에 도착했습니다. 문장은 공영터미널이 있는 리(里)급의 교통의 요충지입니다. 문장에서 영광까지 50리, 송정까지 50리, 장성까지 50리라 합니다. 큰도시로 가려면 반드시 이곳을 거쳐 가야 합니다. 일단 이곳까지 걸어 온 다음에 버스를 타면 큰도시로 갈 수 있습니다.
문장에서 고향마을까지는 약 3키로 정로 걸립니다. 택시를 타거나 먼저 온 사촌형에게 픽업 요청할 수 있지만 걸어가기로 했습니다. 일년에 한번 정도는 고향의 흙길을 걷는 것도 의미 있는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길을 타박타박 걸어 갔습니다. 이른 아침 유월의 햇볕이 따사롭습니다. 주변을 보니 온통 초록의 세상입니다. 모내기를 이제 갓 마친 논에는 백로가 보이고 온통 새소리로 요란합니다. 옛날에는 신작로라 해서 비만 오면 발이 빠지는 황토길이었으나 이제 깨끗이 포장 되어 걸을만합니다. 시골길에는 사람보기 힘듭니다. 가끔 자동차만 쌩하고 지나갈 뿐입니다.
문장삼일만세탑
포장길을 조금 걷다 보니 기념동상이 보입니다. 이름 하여 ‘문장삼일만세탑’입니다. 예전에는 없었던 것인데 역사바로세우기 일환으로 십 수년전에 세워졌습니다. 교통의 요충지 문장에서 1919년 만세운동이 일어난 것입니다. 이를 기리기 위해 동상이 세워지고 성역화 작업이 이루어진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만세탑을 본 것은 걸어 갔기 때문에 가능한 일입니다. 자동차를 타고 지나갔다면 일부로 세워서 보지 않는 한 알 수 없습니다. 한적한 길을 유유하게 걷는 나그네가 일 없이 안내문을 읽어 보았습니다. 일제강점기 당시 1919년 4월 8일(음력 3월 8일)에 봉기가 있었습니다. 삼일만세운동이 이곳 머나먼 남쪽 외진 지역에 까지 미쳤음을 알 수 있습니다.
설명문을 보았습니다. 놀랍게도 그 옛날 이곳에서도 수 많은 희생자가 있었습니다. 애국지사라 하여 24인의 명단이 실려 있습니다. 그렇다면 지금으로부터 98년 1919년에 이곳에서 어떤 일이 있었던 것일까 일부를 옮겨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오후 2시에 일제히 봉기하여 만세를 부르며 문장리에 있던 헌병분소를 기습하고 일진은 함평쪽, 일진은 영광쪽, 일진은 송정리쪽으로 행진하였다. 이에 일본경찰대와 헌병이 총검으로 대오를 해산하려 했으며 구밀교에서 공사를 하던 일본잡역부들이 쇠망치를 휘두르며 무자비한 폭력으로 거리를 피로 물들게 되었다.”(문자삼일만세탑)
아마 그때 당시 생생한 증언을 바탕으로 쓰여진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이로 알 수 있는 것은 이곳은 일본헌병대가 주둔하고 있을 정도로 요충지이었고 일제 수탈의 현장이기도 했습니다. 또한 일본사람들이 많이 살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일까 만세탑이 있는 곳에는 일본소학교가 있었다고 합니다. 지금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없지만 이곳에는 일본인들이 집단을 이루고 산 곳이라 볼 수 있습니다.
일제시대 때 이국인들이 들어왔습니다. 그들은 모든 것을 차지하고 수탈해 갔습니다. 이에 반발하여 농민들이 죽창으로 봉기한 것입니다. 농민들은 영광, 송정, 장성 등지로 행진했다고 하는데 그 과정에서 24명이나 희생되었다고 합니다. 이런 역사적 사실을 길이 기억하고자 후대 사람들이 기념탑을 건립한 것입니다.
농촌풍광을 크게 바꾸어 놓은 것들
탁트인 들길을 타박타박 계속 걸어 갔습니다. 목적지까지는 걸어서 약 40분 가량 걸립니다. 도시라면 교통혼잡으로 인하여 걸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가도가도 사람보기 힘든 현대판신작로 길을 걷는 것은 가능합니다. 걷는 도중에 ‘한밭들’을 지나게 되었습니다. 예덕리 저수지가 있어서 풍요로운 들판입니다. 그러나 기름진 문전옥답은 이제 잔디밭으로 변했습니다. 벼농사 대신 잔디농사를 짓는 것입니다.
세월에 따라 농촌의 풍광도 바뀌는 것 같습니다. 아무리 가물다고 하지만 저수지가 있고 수로에는 물이 끊임 없이 흘러 내림에도 기름진 문전옥답에는 벼가 자라는 것이 아니라 온통잔디 뿐입니다. 한밭들 거의 칠팔십프로가 잔디밭입니다. 벼농사를 짓는 것 보다 잔디농사를 짓는 것이 더 수지타산이 맞아서 일 것입니다.
농촌풍광을 크게 바꾸어 놓은 것이 또 하나 있습니다. 최근 우후 죽순격으로 들어선 공장식축사입니다. ‘함평한우’라 하여 한우를 키우는 축사가 이곳저곳에 들어선 것입니다. 마치 커다란 공장 같은 건물 안에는 한우가 가득한데 오로지 먹고 싸고를 반복할 뿐입니다. 평화롭던 농촌마을에 “움메~”하며 한우 우는 소리가 처량하게 들립니다.
고향마을을 가려면 기름졌던 넓은 한밭들을 지나야 합니다. 한밭들 가운데에는 1학때 까지 다녔던 초등학교가 있습니다. 지금은 폐교되어 공장이 들어서 있습니다. 단층 교사 건물은 김치공장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간판만 보일 뿐 가동하는 것 같지 않습니다. 한때 아이들로 바글바글 했던 학교는 적막하기만 합니다.
대규모 공단이 건설되고 있다는데
불과 삼사십년 만에 농촌 풍광이 몰라 보게 달라졌습니다. 특히 최근 변화는 매우 두드러진 것 같습니다. 다른 곳은 다 변하고 개발되어도 이곳만큼은 옛모습을 그대로 지키고 있을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개발의 거센 바람의 소용돌이에 있는 듯합니다. 사촌형님에 따르면 동쪽 마을 산너에 대규모 공단이 건설되고 있다고 합니다. 공단이름은 ‘빛그린산단’이라 합니다. 그결과 땅값이 오르고 땅을 내놓는 즉시 팔린 다고 합니다.
마을사람들은 개발로 인한 이익에 부풀어 있는 듯합니다. 만일 개발되어 이곳이 아파트 단지가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언제까지나 고향마을은 그대로 있어 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개발되면 고향이 사라질지 모릅니다. 동쪽으로부터 불어 닥치는 개발열풍이 이곳에까지 영향이 미치지 않을까 염려 됩니다.
시골집에는
마을에 도착했습니다. 먼저 와 계신 사촌들이 반겨줍니다. 사촌들은 나이가 많아서 막내에 해당됩니다. 나이가 가장 많은 사촌형님은 거의 부모뻘 되는 나이라 대하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그러나 매년 일년에 한번 있는 합동제사에 지난 수년간 참여하게 됨에 따라 이제 익숙하게 되었습니다.
사람이 살지 않는 시골집은 갈수록 허물어져 갑니다. 방에 달력이 있는데 2001년11월 달력입니다. 큰어머니가 2001년 돌아가신후 사람이 살지 않는 집이 되어 시간이 멈추어 있는 것이나 다름 없습니다. 그러나 빈집에 초목들은 멋대로 자라고 꽃은 계절에 따라 피고집니다. 사람은 오래 전에 사라졌지만 남긴 흔적이 있습니다. 큰어머니의 글씨가 그것입니다. 큰어머니가 시집 오기 전에 썼다는데 ‘백살경’이라 합니다. 사람이 백살까지 산 것에 대한 이야기라 합니다. 약 80년 전에 쓴 것인데 그때 당시 여자가 글을 알았다는 것도 놀랍고 더구나 글로서 남긴 것도 놀랍습니다
시골집에 가면 가장 먼저 확인하는 것이 있습니다. 집 뒤켠에 있는 호랑가시나무 입니다. 이곳 지역에서만 자란다는 천연기념물입니다. 큰아버지가 살아 있을 때 씨앗을 버린 것이 발아 하여 이십년 만에 이제 큰 나무로 성장한 것입니다. 목대가 이제는 어른 팔뚝만하게 굵어져서 위용을 갖추어 가는 것 같습니다. 부엌 옆에는 수 십 년 된 커다란 석류나무가 있습니다. 석류꽃이 한창입니다.
땅의 신에게
어느 모임이나 단체에서도 늘 앞장서고 일을 가장 많이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일년에 한번 있는 제사모임을 준비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시골에서 평생사는 사촌누님내외와 부천에 사는 사촌형님내외입니다. 나머지는 어쩌면 객에 불과합니다. 준비하는 사람 따로 있고, 참여하기만 하는 사람 따로 있는 식입니다. 그럼에도 일년에 한번 모여서 제사를 지내고 밥을 함께 먹는다는데 큰 의미가 있습니다.
정성껏 차린 제사상이 마련되었습니다. 이런 상이 있기 까지 네 분의 노고가 큽니다. 특히 옆 마을에 사는 사촌누님의 노고가 없다면 아마 인터넷으로 주문한 제사상을 마련하게 되었을지도 모릅니다. 한평생 농사만 짓고 살며 고향을 지키며 사는 사촌누님 내외분은 선한 사람의 표본과도 같습니다.
제사상에 늘 빠지지 않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제사상 옆에 작은 상이 하나 더 있는 것입니다. 이를 ‘성주상’이라 합니다. 이곳에서는 제사 지낼 때 빠지지 않는 상입니다. 부모나 조상의 제사를 지낼 때 반드시 함께 차리는 상입니다.
성주상은 일종의 땅의 신을 위한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땅에서 사는 사람들이 땅의 고마움을 작은 상차림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사람들이 이 땅에 태어나서 살다고 죽어서 사라지지만, 이곳 땅을 지키고 있는 땅의 신만큼은 영원히 이곳에 산다고 보기 때문일 것입니다.
예덕리고분군
이번 고향방문에서 꼭 보고 싶은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예덕리고분군’입니다. 요즘 새정부가 들어선 후 ‘가야사’를 복원한다고 하는데 가장 먼저 고분발굴로부터 시작될 것입니다. 그런데 이곳에도 가야사 못지 않게 놀랄만한 역사적 사실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예덕리고분군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예덕리 고분군은 마을에서 가까운 곳에 있습니다. 형님들 말에 따르면 어렸을 적부터 보아 오던 것이라 합니다. 그런데 십여년전 KBS 역사다큐 프로에서 예덕리 고분군을 특집으로 다룬 바 있습니다. 고분발굴을 해 보니 마한시대의 것으로 이곳에서만 볼 수 있는 독특한 형태의 ‘옹관묘’라 합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일본에도 옹관묘형태가 발견된다고 합니다. 영산강 평야지대에서 하나의 소왕국이 있어서 일본과 교류한 흔적이라 설명합니다.
들판에는 여러 기의 고분군이 있습니다. 설명문에 따르면 “4세기부터 5세기에 걸친 백제시대의 옹관묘군”이라 합니다. 크기는 가로가 약 이삽심미터이고 높이가 3미터 정도에 달하는 길쭉한 타원형이 많습니다. 이곳이 묘인지 모르는 사람들이 보았을 때는 작은 동산처럼 보일 것입니다.
옹관묘란 사람의 시체를 독에 넣은 묘를 말합니다. 커다란 독을 만들어 시체를 넣고 타원형의 길다랗고 높은 무덤을 만드는 것입니다. 이러한 옹관묘는 영산강 하류에 집중적으로 분포되어 있다고 합니다. 이로 알 수 있는 것은 이곳 영산강 평야지대에 상당한 정도의 문화가 발달한 나라가 있었음에 틀림 없습니다.
“올 것이 왔다”
유년기 시절을 시골에서 보냈습니다. 초등학교 일학년 때 까지 다녔으니 유년기의 추억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곳입니다. 그런 고향은 늘 포근한 느낌입니다. 그러나 산업화시대를 비켜 갈 수 없는 것 같습니다. 기름진 들에는 벼농사대신 잔디농사를 짓고, 한우를 생산한다 하여 공장식 축사가 이곳저곳에서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우려스러운 것은 인근에 ‘빛그린산단’ 이라는 이름의 거대한 공단이 들어서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특히 새정부가 들어선 이후 본격화 조짐을 보이고 있는데 이럴 때 드는 생각은 “올 것이 왔다”입니다.
유년기 시절의 고향은 아름답고 풍요로웠습니다. 그때 당시 보리고개라 하여 어려운 시절이었습니다. 몇 년 동안 가뭄이 들어 농민들은 농사를 포기하고 마치 아일랜드 이민자처럼 남부여대하고 무작정 도시로 떠난 대한해(大旱害)의 시기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의 눈에 비친 세상은 가장 평화롭고 풍요로운 세상이었습니다. 이런 세상이 늘 변함 없이 그대로 있었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그러나 세월은 이를 내버려 두지 않는 것 같습니다.
잔디농사, 공장식축사 보다 더 무서운 것이 개발열풍입니다. 평화로운 이곳에 아파트단지가 들어서면 고향을 잃게 됩니다. 그에 따라 추억도 사라질 것입니다. 동쪽 마을의 개발소식이 이곳에 까지 영향을 미칠지 알 수 없습니다. 한가지 간절한 바램이 있다면 지금 이대로 그냥 있었으면 좋겠다는 것입니다.
제사의 당위성에 대하여
사람들은 죽은 자를 위하여 제사를 지냅니다. 그러나 언제 까지 계속될지 알 수 없습니다. 사람들은 회오리바람처럼 오가지만 한가지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땅의 신일 것입니다. 아무리 아파트 단지가 들어선다고 해도 땅을 기반으로 한 것입니다. 그런 아파트도 언젠가는 무너지고 말 것입니다. 무너진 땅위에 누군가 또 삶의 터전을 이루고 살아 갈 것입니다. 이 모든 과정을 땅은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일까 각가정마다 제사지낼 때 ‘성주상’이 빠지지 않는 것 같습니다.
사람들은 삶을 살면서 어떤 식으로든지 흔적을 남깁니다. 그것은 삶의 과정에서 일어났던 행위에 대한 것입니다. 행위는 결과로서 나타납니다. 이전에 죽은 자가 남긴 행위는 후대에 영향을 줄 수 있습니다. 마치 주파수스펙트럼을 한눈에 볼 수 있는 것과 같습니다.
전자제품 개발장비 중에 ‘스펙트럼아날라이져’가 있습니다. 주파수분석기라 합니다. 이 장비를 활용하면 동시에 모든 주파수를 한꺼번에 볼 수 있습니다. 태어나서 죽을 때 까지 전과정이 인생의 스펙트럼입니다. 이를 조상까지 확장하여 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수 천년의 역사를 지금 이순간에 보는 것입니다. 법성게에서 ‘일념즉시무량겁(一念卽時無量劫)’이라는 말이 실감납니다.
지금 한 공간에 살았던 모든 사람들을 볼 수 있다면 그것은 시간의 구애를 받지 않을 것입니다. 아마 제사를 지내는 목적이라 볼 수 있습니다. 조상들과 교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일까 예경지송 추모경송품에 나오는 ‘담장 밖의 경’이 오늘날 제사 지내는 당위성에 대하여 잘 말해 주는 것 같습니다.
담장 밖의 경
담장 밖의 거리
모퉁이에 있으면서
가신 친지들이 자기 집을 찾아와서
문기둥에 서있나이다.
여러 가지 음식과
많은 음료를 차렸으나
뭇삶들의 업으로 인해
아무도 님들을 알아채지 못하나이다.
연민에 가득 차서
가신 친지들에게
제 철의 정갈하고 훌륭하고
알맞은 음식과 음료를 헌공하오니,
가신 친지들을 위한 것이니
친지들께서는 행복하소서.
여기에 모여 친지의 가신 님들도 함께 했으니
풍요로운 음식의 성찬에 진실로 기뻐하소서.
‘우리가 얻었으니
우리의 친지들은 오래 살리라.
우리에게 헌공했으니
시주에게 과보가 없지 않으리.’
가신 님들이 사는 곳
거기에는 농사도 없고 목축도 없고
장사도 없고 황금의 거래도 없이
보시 받은 것으로 연명하나니.
물이 높은 곳에서 떨어져
계곡으로 흐르듯
이처럼 참으로 보시가 이루어졌으니
가신 님들을 위해 유익한 것이나이다.
넘치는 강물이
바다를 채우듯
이처럼 참으로 보시가 이루어졌으니
가신 님들을 위해 유익한 것이나이다.
‘나에게 베풀었다. 나에게 선행을 했다.
그들은 나의 친지, 친구, 그리고 동료였다.’라고
예전의 유익한 기억을 새기며
가신 님들에게 헌공해야 하느니라.
이처럼 친지들이 서있는데
울거나 슬퍼하거나
달리 비탄에 잠기는 것은 헛되이
가신 님들을 위하는 것이 아닐지니라.
그대가 바친 이 헌공은
참모임에 의해 잘 보존되었으니
오랜 세월 그것이 축복한다면
반드시 그들에게 유익한 것일지니라.
친지들에 대한 의무가 실현되었고
가신 님들을 위한 훌륭한 헌공이 이루어지니
수행승들에게 크나큰 힘이 부여되었고
그대들에 의해서 적지 않은 공덕이 생겨났느니라.
(Tirokuḍḍasutta-담장 밖의 경, 쿳다까니까야 khp7, 전재성님역)
인생은 한바탕 회오리바람인가
영화 ‘서편제’에 가장 인상적인 장면이 있습니다. 청산도 촬영장에서 찍었다는 한바탕 노래와 춤입니다. 영화에서는 가장 먼저 텅 빈 거리를 보여 줍니다. 텅 빈 거리에 일단의 가족의 무리가 나타납니다. 아버지는 장고치고 아들은 북을 치고 딸은 창을 멋들어지게 부릅니다. 세 식구가 한바탕 신나게 노래하고 춤추는 모습은 영화에서 가장 멋진 장면이라 봅니다. 그런데 영화에서는 처음 장면처럼 마지막 장면도 텅 빈 거리로 처리합니다. 텅 빈 거리에 갑자기 사람들이 신명나게 놀다가 사라진 것입니다. 사람 사는 곳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도시는 역동적입니다. 늘 거리에는 차를 볼 수 있고 사람들은 분주하게 걸어 다닙니다. TV를 틀면 끊임 없이 화면이 바뀌고 말들이 쏟아집니다. 도시인들은 이런 모습에 너무 익숙합니다. 그러나 한적한 시골에 가면 분위기가 180도 바뀝니다. 시골에 가면 차도 거의 보이지 않고 사람도 거의 볼 수 없습니다. 산하대지는 그대로인데 가끔 차가 지나가고 사람들이 나타났다고 사라질 뿐입니다. 마치 영화 서편제에서 한바탕 놀다 사라지는 것 같습니다.
사람들 사는 곳은 한바탕 회오리바람 같습니다. 모두 시간되면 사라지는 것들 입니다. 회오리바람이 지나고 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 평온합니다. 일제시대때 만세운동도 회오리바람 같은 것이고, 한국전쟁당시 이념이 다름으로 인하여 발생된 비극도 회오리 바람일 것입니다. 이곳에 태어나서 한평생 살다가 죽은 자들도 마치 서편제에서 처럼 한바탕 신나는 놀이판일지 모릅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산천은 그대로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계속 오고갑니다. 사람들의 삶을 배속하는 카메라가 있다면 움직임이 빠를 것입니다. 매우 빠르게 배속하면 일어나고 사라짐만 보일 것입니다. 수천년 동안 이 땅에 살아 왔던 사람들은 ‘생멸(生滅)’을 반복해 왔습니다. 사람들은 온데간데 없지만 행위와 흔적만은 남아 있어서 후대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고 있습니다. 인생은 한바탕 회오리바람 같습니다.
2017-06-12
진흙속의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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