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 떠나는 여행

꼭지의 꿀과 같은 분노의 가학성(加虐性)

담마다사 이병욱 2017. 10. 10. 09:05


꼭지의 꿀과 같은 분노의 가학성(加虐性)

 

 

승가에서 벌어지고 있는 공산당식 선거에 불자들은 분노합니다. 시대를 거꾸로 사는 듯한 전근대적 사고를 가진 자들에 의해 벌어지고 있는 사태에 대하여 분노하지 않는다면 그는 불자가 아니라고 볼 수 있습니다.

 

종단의 적폐에 대하여 분노하지만 그 분노가 내부로 향했을 때 분열로 치닫게 됩니다. 처음에는 잘못된 제도와 관행에 대한 사회에 대하여 분노하지만 분노해도 이루어지지 않았을 때 엉뚱한 곳에 화풀이 할 수 있습니다. 그 과정에서 희생양이 나옵니다. 분노가 분노를 일으켜 잔인하게 됩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이렇게 말씀 했습니다.

 

 

분노를 끊어 편안히 잠자고

분노를 끊어 슬프지 않네.

참으로 하늘사람이여,

뿌리엔 독이 있지만

꼭지에 꿀이 있는 분노를

죽이는 것을 성자는 가상히 여기니,

그것을 죽이면 슬프지 않기 때문이네. (S1.71)

 

 


 

분노에 대하여 꼭지의 꿀뿌리의 독과 같은 것이라 했습니다. 자꾸 분노하게 되면 분노가 분노를 불러서 잔인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마치 욕먹은 자를 다시 욕하고, 매맞은 자를 다시 때리는 것과 같습니다. 마치 사디스트(Sadist)처럼 가학(加虐)함으로 인하여 분노의 쾌감을 느끼는 것과 같습니다.

 

상가집에서 우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물론 슬퍼서 우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자신의 울음을 듣고 더욱 슬피울게 됩니다. 어찌보면 우는 것을 즐기는 것이라 볼 수도 있습니다. 마치 어린 아이가 더 크게 울음으로 인하여 울음을 즐기는 것과 같습니다. 분노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아이를 야단칠 때 화를 내지만 주눅든 아이를 보며 더욱더 화를 냅니다. 부하직원을 질책할 때 더욱더 화를 내는 것도 일종의 가학이라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같은 길을 가는 도반사이에서도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같은 길을 가는 도반이라면 목적지가 같습니다. 같은 길을 갈 때 때로 의견이 맞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대의에서 벗어나지 않은 것이라면 겸허하게 수용할 수 있을 것입니다. 잘 경청해주고 겸손하게 인내를 가지고 대해 주었을 때 따라 올 것입니다. 그럼에도 자신과 견해가 다르다고 하여 적대시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사회개혁을 외치는 자들이 있습니다. 대개 분노의 세월의 살아가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사회개혁이 좌절되었을 때 엉뚱하게 내부로 불똥이 튀는 경우기 있습니다. 이럴 경우 네탓이야라며 책임을 추궁합니다. 일이 잘 되면 다행이지만 일이 잘못 되었을 때 누군가를 희생양으로 삼는 것입니다.

 

사회개혁이 좌절 되었을 때 분노의 희생자가 발생합니다. 나와 견해가 다름에도 틀렸다라고 하여 언어적 폭력을 가합니다. 그런데 분노에는 가학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마치 울면 울수록 울음에 빠져 들어 울음을 즐기듯이, 분노하면 하면 할수록 더욱 분노하게 되어 분노를 즐긴다는 사실입니다. 이를 분노에 수반되는 쾌감이라 하여 욕먹은 자를 욕하고 매맞은 자를 때리는 가학이 됩니다.

 

게송에서 뿌리엔 독이 있지만 꼭지에 꿀이 있는 분노”(S1.71)라 했습니다. 분노에 수반 되는 쾌감이 꼭지의 꿀과 같고, 분노함으로 인하여 죄업이 발생하기 때문에 뿌리엔 독이라 한 것입니다. 사회개혁이 좌절 되었다고 하여 같은 길을 가는 동료에게 화풀이 하는 것은 매우 잔인한 자로서 지혜롭지도 자비롭지도 않습니다.

 

 

2017-10-09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