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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시에 대한 혁명적 발상, 보시는 자기자신에게 하는 것

담마다사 이병욱 2017. 11. 29. 11:30


보시에 대한 혁명적 발상, 보시는 자기자신에게 하는 것

 

 

보시는 기쁨으로 하라고 했습니다. 보시는 능력껏 하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맛지마니까야 보시에 대한 분석의 경에 따르면 여법하게 얻어진 것을 흔쾌한 마음으로 보시하면 보시하는 자의 덕행이 보시를 청정하게 하네.”(M142)라 했습니다. 보시하기 전에는 기뻐하고, 줄 때는 마음이 청정해야 하고, 주고 나서는 만족해야 함을 말합니다. 이것이 금강경에서 말하는 무주상보시(無住相布施)’일 것입니다.

 

니까야에서 보는 고객감동


보시하는 자는 행위의 과보가 크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행위의 과보를 믿고 여법하게 얻어진 것을 여법하게 보시하면 굉장한 과보를 가져 온다고 합니다. 특히 계행을 지키고 청정한 자에게 기쁨으로 보시하면 그 과보는 상상 이상이 될 것이라 합니다.

 

앙굿따라니까야 사업의 경에 따르면 그가 약속한 것을 의도한 것 이상으로 보시한다.”(A4.79)라 했습니다. 약속한 것 보다 더 많은 보시를 말합니다. 요즘으로 따진다면 고객감동에 해당됩니다. 이렇게 했을 경우 과보에 대하여 그가 어떠한 사업을 하든 열심히 노력하면 의도한 것 이상으로 성공한다.” (A4.79)라 했습니다. 오늘날 사업을 하여 크게 성공한 자들은 평소에도 의도한 것 이상 베푸는 삶을 살았기 때문이라 봅니다.

 

불자들에게 최대 축원은

 

아유 반노 수캉 발랑이 말은 작년 도이법사에게 들은 말입니다. 작년 가을 도이법사로부터 위빠사나 수행지도를 받았는데 법문도 곁들였습니다. 남방 테라와다에서는 보시 받으면 아유 반노 수캉 발랑(āyu vaṇṇo sukha bala)”한다고 했습니다. 이 말은 축원문입니다. 내용은 장수하고 아름답고 행복하고 건강하기를라고 바라는 것입니다.

 

불자들에게 있어서 최대 축원은 오래 사는 것입니다. 이것 보다 더 좋은 축원은 없습니다. 자신을 존중하고 공경해 주는 자에 대하여 “오래 사시오. 장수를 누리시오. (cira jīva, dighamāyu pālehī)(A5.58)라 합니다. 그렇다면 왜 장수축원을 할까요?

 

사람들은 오로지 돈 벌기에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이 세상에 태어난 이상 좋든 싫든 누구나 돈벌기 선수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돈 버는데 재주가 있는 자를 제외한 나머지는 돈 벌기가 쉽지 않습니다. 황금만능의 시대에서 부자 되세요라는 가치관이 지배한다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을 것입니다. 그 결과 사회는 자본이 지배하는 약육강식의 짐승과 같은 세상이 될 것입니다. 그래서일까 공경받는 자들은 돈 많이 버세요라 하지 않습니다. 그 대신 “오래 사시오. 장수를 누리시오.”라며 장수축원을 합니다.

 

보시공덕을 아는 자가 존경 받는 자에 보시하면 “이 보시공덕으로 도와 과를 이루시기 바랍니다.”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일반사람이나 신도들에게는 장수축원 만한 것이 없습니다. 목숨이 늘어나면 목숨과 비례해서 다른 특징들도 개선되기 때문입니다. 오래 살면 착하고 건전한 행위를 할 가능성이 많기 때문에 선업공덕 쌓을 기회도 동시에 많아 집니다. 이런 이유로 “오래 사시오. 장수를 누리시오.”라며 장수축원을 해줍니다.

 

장수축원 보다 더 좋은 것은 4대 축원입니다. “장수하고 아름답고 행복하고 건강하기를(āyu vaṇṇo sukha bala)” 라 하는 것입니다. 이 말은 법구경에서 근거합니다. 법구경에서 “예경하는 습관이 있고 항상 장로를 존경하는 자에게 네 가지 사실이 개선되니, 수명과 용모와 안락과 기력이다.(Dhp.109)라 했습니다. 여기서 수명과 용모와 안락과 기력아유 반노 수캉 발랑입니다.

 

보시는 자신에게 하는 것

 

한국불교에 사대축원이 있습니다. 이른바 사대기도라 하여 건강, 학업, 사업, 치유를 말합니다. 그러나 초기불교에서 말하는 사대축원이라 하면 장수하고 아름답고 행복하고 건강하기를(āyu vaṇṇo sukha bala)”(Dhp.109)라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구절은 앙굿따라니까야 넷 모아엮음에서 공덕이 넘침의 품에 실려 있다는 사실입니다.

 

부처님이 꼴리야 지방에서 쌋자넬라라는 꼴리야족의 마을에 계셨을 때의 일입니다. 꼴리야족의 여인 쑵빠바싸가 부처님에게 손수 만든 음식을 대접했습니다. 이에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축원 했습니다.

 

 

쑵빠바싸여, 음식을 보시하는 고귀한 여제자는 보시받는 자들에게 네 가지 은혜를 베푸는 것이다. 생명을 보시하는 것이고, 아름다움을 보시하는 것이고, 행복을 보시하는 것이고, 힘을 보시하는 것이다. 생명을 보시하여 그 천상이나 인간의 생명을 나누어 가진다. 아름다움을 보시하여 그 천상이나 인간의 생명을 나누어 가진다. 행복을 보시하여 그 천상이나 인간의 생명을 나누어 가진다.

힘을 보시하여 그 천상이나 인간의 생명을 나누어 가진다. 쑵빠바싸여, 음식을 보시하는 고귀한 여제자는 보시받는 자들에게 이와 같은 네 가지를 보시하는 것이다.”(A4.57)

 

 



아유 반노 수캉 발랑이라는 사대축원에 대한 구체적 설명이라 볼 수 있습니다. 보시자가 공경하는 이에게 음식 등을 보시했을 때, 보시 받는 자는 생명, 용모, 행복, 건강을 보시 받는 것과 같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동시에 보시 하는 자 역시 생명, 용모, 행복, 건강을 보시 받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이를 두고 보시는 자신에게 보시하는 것이다라 할 것입니다.

 

보시에 대한 혁명적 발상

 

도이법사의 법문에 따르면 보시는 자신에게 보시하는 것이다.’라 했습니다. 보시했을 때 굉장한 과보가 기대 되는 이유도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본다면 보시는 인색하게 할 필요가 없습니다. 자신에게 되돌아 올 것이라면 과하게 해도 무방할 것입니다. 그래서일까 앙굿따라니까야 사업의 경에서는그가 약속한 것을 의도한 것 이상으로 보시한다.”(A4.79)라 했을 겁니다.

 

보시는 자신에게 하는 것입니다. 이는 앙굿따라니까야에서 행복을 보시하여 그 천상이나 인간의 생명을 나누어 가진다. (Āyu kho pana datvā āyussa bhāginī hoti dibbassa vā mānusassa vā)”라는 말에서 알 수 있습니다. 여기서 나누어 가진다라는 말은 ‘bhāgī를 번역한 것인데, 영어로 ‘sharing in’의 뜻입니다. 시주와 시물을 받는 자가 생명, 용모, 행복, 건강을 나누어 가짐을 말합니다. 시물을 받는 자와 시주가 동시에 생명, 용모, 행복, 건강을 갖게 됨을 말합니다.

 

보시는 존경하는 이에게 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자신에게 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이는 보시에 대한 혁명적 발상이라 볼 수 있습니다. 보시가 자신에게 하는 것이라면 아낌 없이 보시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기쁨으로 보시할 수 있습니다. 자신에게 보시한다고 생각한다면, 보시하기 전에는 기뻐하고, 줄 때는 마음이 청정해야 하고, 주고 나서는 만족할 것입니다.

 

자신이 자신에게 보시 했을 때 , 나는 참으로 착한 일했다.’라 하지 않을 것입니다. 보시는 자신에게 하는 것이라고 여긴다면 티 내지 않고 보시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이 금강경에서 말하는 무주상보시의 진정한 의미일 것입니다.

 

 

자제하는 님들에게 음식을 보시하고

음식을 제때에 공경하여 보시하는 자는

네 가지 은혜를 베푸는 것이니

생명과 아름다움과 행복과 힘이네.

 

생명을 베풀고 힘을 주고

행복과 아름다움을 주는 님

태어나는 곳마다

긴 수명과 명성을 지니리.”(A4.59)

 

 

 

2017-11-29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