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학승과 선정승이 서로 얕잡아 보았는데
교학승과 선정승이 서로 얕잡아 보았습니다.
교학승은 ‘우리는 가르침을 중시한다.’라 하고,
선정승은 ‘우니는 선정에 든다.’라 합니다.
서로가 서로를 무시하며 못마땅해 했습니다.
교학승은 선정승에게
“선정에 들고 명상에 든다는데
도대체 무슨 선정에 든단 말인가?”라며
알지도 못하면서 비난했습니다.
선정승은 교학승에게
“오만하고 수다스럽고
지껄이고 알아차림이 없다.”라고
알지도 못하면서 헐뜯었습니다.
두 수행승은 마음이 편치 않았습니다.
누구도 바라지 않은 것입니다.
누구에게도 이익이 되지 않은 것입니다.
이럴 때는 장점을 말해 주는 것이 좋습니다.
현명한 자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교학승은 선정승에 대하여
“불사의 세계를 몸으로 접촉하고 있는
놀라운 사람들을 세상에서 만나기 힘들다.”(A6.46)라고.
선정승은 교리를 많이 몰라도 심오한 경지에 이른 것입니다.
선정승은 교학승에게
“심오한 의취를 지혜로 꿰뚫고 있는
놀라운 사람들을 만나기 힘들다.” (A6.46)라고.
교학승은 선정 없이도 위빠사나 통찰지가 있습니다.
교학승은 선정승의 세계를 잘 모르고
선정승은 교학승의 세계를 잘 몰랐습니다.
서로 모르다 보니 단점만 보인 것입니다.
장점을 알게 되면 서로 존중해줍니다.
하늘을 새는 좌우 날개로 날아 가듯이,
부처님 가르침은 교학과 수행으로 성취됩니다.
“나는 곧바로 알아야 할 것을 알았고,
닦아야 할 것을 이미 닦았으며,
버려야할 것을 이미 버렸습니다.
그러므로 바라문이여, 나는 깨달은 님입니다.”(stn.558)
깨달은 자(覺者)가 되려면
알아야 할 것(敎學)을 알아야 하고,
닦아야 할 것(修行)을 닦아야 합니다.
가르침을 알고 수행을 해야 번뇌가 사라집니다.
가르침(Dhamma)은 잘 설해져 있습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에 비밀스런 가르침은 없습니다.
가르침은 마음에서 마음으로 비밀리에
전승된 것이 아니라 언어와 문자로서 잘 전승되어 왔습니다.
깨달은 그날 밤부터 열반에 이른 밤까지
팔만사천 가르침은 잘 설해져 있습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달 그 자체이지
달을 가르키는 손가락이 아닙니다.
가르침 밖에서 진리를 찾으려 한다면
불이익과 고통을 당할 것입니다.
‘담마 아닌 것(adhamma: 非法)’을 담마라고 오도하면
따르는 자들 역시 불이익과 고통을 당할 것입니다.
교리를 모르고 앉아만 있으면
선천적으로 눈이 먼 자가 코끼리만지기식입니다.
교리를 알고 수행하면 코끼리를 볼 수 있습니다.
교리와 수행을 병행해야 가르침을 제대로 알 수 있습니다.
교학승과 선정승이 서로 얕잡아 보았습니다.
서로 자신만이 최고라는 자만이 지배했습니다.
서로 얕잡아 보기 보다는
서로 장점을 치켜 세워 주어야 합니다.
2018-03-19
진흙속의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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