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불교백년대계

설조스님 단식은 중단되어야, 탄생의 업보를 받고 있는 조계종단

담마다사 이병욱 2018. 7. 16. 08:55

 

설조스님 단식은 중단되어야, 탄생의 업보를 받고 있는 조계종단

 

 

설조스님 단식이 27일 째 입니다. 곡기를 끊고 오로지 소금으로만 버티는 목숨을 건 단식에 불자들은 안절부절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제 알만한 사람들은 다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수라의 무리들 같은 권승들은 희희낙낙하며 모른 척 하고 있습니다. 과연 이런 상황에서 단식을 계속 해야 하는지 의문이 들어갑니다.

 

죽기보다는 살아서 그들의 잘못을

 

단식은 최후의 저항수단입니다. 자신의 생명과도 같은 몸을 도구로 사용하여 바라는 목적을 달성하고자 합니다. 그러나 꿈쩍도 하지 않고 오히려 조롱하고 모욕을 주는 무리들이라면 가장 소중한 목숨을 버릴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죽기보다는 살아서 그들의 잘못을 바로 잡는 것이 훨씬 나을 듯합니다.

 

오로지 힘이 곧 정의라고 믿는 아수라의 무리들에게 목숨을 걸 필요는 없습니다. 그들은 악의 무리이기 때문에 지금 부처님이 나타난다고 하더라도 먹혀 들어가지 않습니다. 이는 부처님이 마른 나무 아래에서 땡볕을 맞으며 비두다바의 군대를 막으려 했던 이야기의 교훈을 새기게 합니다. 법구경 47번 게송에 다음과 같은 인연담이 있습니다.

 

비두다바와 관련된 이야기(Vidudabhavatthu)

 

이 시가 설해진 데는 이와 같은 인연담이 있다. DhpA.I.337-361에 따르면, 부처님께서 싸밧티 시에 계실 때, 급류에 휩쓸려가 죽은 비두다바와 관련된 이야기(Vidudabhavatthu)이다.

 

싸밧티 시에서 빠쎄나디 왕은 수천 명의 수행승들이 탁발하기 위해 거리를 지나 아나타삔다까(Anathapindika)와 쭐라 아나타삔디까(Culla Anathapindika), 비싸까(Visakha)와 쑵빠바싸(Suppavasa)의 집으로 가는 것을 보고는 자신도 왕궁에서 수행승들에게 매일 공양을 올려야 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부처님의 허락을 받아 아난다 장로와 그 일행에게 공양을 올리게 되었다.

 

그러나 여드레가 되자 궁중에서는 공양을 소홀히 하는 바람에 수행승들은 떨어져 나가고 아난다 장로만 궁중에 가서 공양을 얻어 왔다. 왕은 나중에 이 사실을 알고는 대단히 미안하게 생각해서 까삘라밧투 시에 사신을 보내 싸끼야의 공주를 왕비로 삼겠다고 제안했다.

 

싸끼야족은 회의를 열어 왕족 마하나마와 노예사이에서 난 딸 바싸바깟띠야(Vasabhakhattiya)를 공주로 만들어 보냈다. 빠쎄나디 왕은 그녀를 왕비로 책봉했고, 왕비는 비두다바(Vidudabhava)라는 아들을 낳았다.

 

비두다바는 어렸을 적부터 외가에 가 보고 싶었으나 왕비는 자신의 신분 때문에 그 것을 막았다. 그러나 비두다바가 열여섯 살이 되 던 해에 외가에 가는 것을 허락했다. 싸끼야 족들의 어른들은 사전에 싸끼야 족들의 왕자들을 다른 곳에 보내고, 비두다바 왕자를 성대히 맞았고 무사히 보내게 되었다.

 

그러나 마지막 날에 하녀가 비두다바가 묶었던 방을 우유와 물로 씻으며 ‘이곳이 노예인 바싸바깟띠야의 아들이 앉았던 곳이다.’라고 투덜거렸다. 한 사람이 그것을 듣고 군대에 알렸고 큰 소동이 일어나자 비두다바도 그것을 알게 되었다. 그는 ‘내가 왕권을 잡으면, 나의 보좌를 그들의 목에 나오는 피로 씻을 것이다.’라고 맹세했다. 빠쎄나디 왕은 이 소식을 듣고 대단히 분노하고 왕비와 비두다바의 지위를 모두 박탈하고 노예로 전락시켰다.

 

며칠이 지나 부처님께서 왕궁을 방문하게 되었다. 부처님께서는 빠쎄나디 왕에게 싸끼야 족의 경망한 행동은 잘못이지만 왕비와 비두다바는 모두 왕족의 피가 흐르기 때문에 지위를 박탈하는 것을 옳지 않다고 충고 했다. 그러자 빠쎄나디왕은 그들의 지위를 예전처럼 복원시켰다. 이 때 꼬쌀라국의 최고사령관은 반둘라(bhandula)이었다. 그의 아내 말리까는 한 동안 아이가 없어서 소박을 맞고 친정으로 돌아가다가 부처님께 들렸다가 다시 돌아가라는 말을 듣고 반둘라에게 와서 아이를 열여섯 쌍둥이나 낳았다.

 

그런데 한번은 반둘라가 소송에 패한 사람의 억울함을 들어주어 자신이 재판을 주재해서 재산을 찾게 해주었다. 왕은 반둘라의 정의로운 판결 이야기를 듣고 다른 판사들을 해고 하고 반둘라에게 판결을 맡겼다. 그러자 해고된 판사들이 반둘라가 왕위를 찬탈한다고 음모하였다.

 

그것을 곧이 들은 왕은 반둘라를 제거하기 위해 반란군을 진압하라는 가짜 명령을 반둘라에게 내렸다. 반둘라와 그의 아들 두 명이 현장으로 출동하자 왕은 그들을 참살했다. 이때에 반둘라의 부인 말리까(Malika)는 오 백명의 수행승들의 무리와 장로 싸리뿟따와 장로 마하 목갈라나에게 공양을 올리고 있다가 이 소식을 편지로 받았으나 내색을 하지 않았다.

 

그녀의 시녀들이 식사를 대접하고 버터를 담은 항아리를 옮기다가 그것을 깨뜨리자 장로 싸리뿟따가 ‘항아리는 부서지고 마는 것이다.’고 위로 했다. 그러자 그녀는 비로서 참살의 소식을 장로에게 말했다. 그리고 서른두 명의 며느리를 불러서 ‘너희들의 남편은 죄악이 없다. 다만 전생의 악업이 성숙한 것일 뿐이다. 슬퍼하고 비탄해 하지 말고 왕에게도 원한을 품지 말라.’고 말했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왕은 양심의 가책을 받아 말리까를 찾아가 용서를 구했다. 말리까는 왕을 용서하고 며느리들을 각자의 친정으로 돌려 보내고 자신은 고향인 꾸씨나라로 돌아갔다. 왕은 반둘라의 조카인 디가까라야나(Dighakarayana)를 총사령관에 임명했다. 그러나 그는 빠쎄나디 왕에게 ‘나의 삼촌을 죽인 왕이다.’라고 욕했다.

 

왕은 반둘라를 죽인 이후에 심기가 불편하여 부처님을 만나러 갔다. 이때 사령관 디가까라야나는 비두다바 왕자를 왕으로 추대하는 반란을 일으켰다. 빠쎄나디왕은 부처님의 설법을 듣고는 이 반란의 사실을 뒤늦게 알고 노구를 이끌고 조카인 왕 아자따삿투를 찾아 마가다 국으로 갔다가 성문 앞에서 더위와 피로에 지쳐 죽었다 그러자 정식으로 왕이 된 비두다바는 싸끼야 족에 당한 모욕을 상기하고 싸끼야족의 정벌에 나섰다.

 

부처님께서는 싸끼야족을 보호하기 위해 까삘라밧투 근처 비두다바의 진지에서 멀지 않은 곳에 그늘이 없는 앙상한 나무 밑에 앉았다. 비두다바가 부처님을 보고 ‘세존이시여, 왜 그늘이 드리운 보리수 밑에 앉지 않고 앙상한 나무 밑에 앉아 계십니까?’라고 묻자 부처님께서는 ‘대왕이시여, 상관하지 마십시오. 친지의 그늘이 나를 시원하게 해줍니다.’라고 말했다. 부처님께서는 이렇게 해서 세 차례의 왕의 침공을 막았으나 네 번째에는 싸끼야 족의 업보인 것을 알고 막지 않았다.

 

비두다바는 까삘라밧투로 진격해서 싸끼야족을 거의 모두 죽였다. 싸끼야 족은 훌륭한 전사이었고 활쏘기의 명수들이었으나 전쟁에서 활솜씨만을 보여주고 적은 죽이지 않았다. 정직하고 비폭력적이었던 싸끼야 족 가운데 살아남은 자들은 풀잎-싸끼야 족과 갈대잎-싸끼야 족인데, 그들은 풀잎이나 갈대잎을 물고는 적들이 ‘싸끼야 족인가?’라고 물으면, ‘아니요, 풀잎입니다.’라든가 ‘아니요, 갈대잎입니다.’라고 대답하여 죽임을 면한 사람들이었다.

 

비두다바가 성공적으로 싸끼야 족을 죽이고 철수하다가 아찌라바띠(Aciravati)강변에서 야영했다. 그런데 밤중에 강의 상류에 큰 폭우가 내려 갑자기 불어난 급류에 휩쓸려 비두다바와 수천의 군사들은 몰살당했다.

 

부처님께서는 이 이야기를 듣고 ‘수행승들이여, 존재의 욕구가 충족되더라도 격류가 잠든 마을을 휩쓸어 가듯, 죽음의 왕이 목숨을 앗아 윤회의 고통에 빠뜨린다.’고 말했다. 이어서 시로써 “오로지 꽃들을 따는데, 사람의 마음이 빼앗기면, 격류가 잠든 마을을 휩쓸어 가듯, 악마가 그를 잡아간다.”라고 가르쳤다. 이 가르침이 끝나자 많은 사람들이 흐름에 든 경지 등을 성취했다.

 

(법구경 47번 게송 인연담, 죽은 비두다바와 관련된 이야기-Vidudabhavatthu)

 

 

 

네 번째에는 싸끼야 족의 업보인 것을 알고

 

부처님은 싸끼야족을 보호하기 위하여 비두다바의 군대를 세 번에 걸쳐서 맨몸으로 막았습니다. 오늘날 설조스님이 도적의 무리들을 몰아 내고자 목숨을 건 단식을 하는 것과 같습니다. 땡볕에서 세 번까지는 막았지만 네 번 째는 막지 않았습니다.

 

부처님에 네 번째 침공을 막지 않은 이유는 놀랍게도 싸끼야족의 업보때문이라 했습니다. 이는 인연담에서 부처님께서는 이렇게 해서 세 차례의 왕의 침공을 막았으나 네 번째에는 싸끼야 족의 업보인 것을 알고 막지 않았다.”라고 말씀하신 것에서 알 수 있습니다. 이는 비두다바 출생의 비밀과 관련이 있습니다.

 

조계종 탄생의 비밀을 보면

 

오늘날 한국불교가 망가진 것은 이전의 행위에 대한 업보때문이라 볼 수 있습니다. 소위 비구승과 대처승과의 갈등에 따른 정화의 과정에서 폭력을 동원하여 정화라는 이름으로 절뺏기를 했습니다. 그 후유증은 고스란히 현재 조계종단의 업보로 남아 있습니다.

 

출가해서는 안될 자들이 이제 큰스님이 되어 신심 있는 불자들로부터 삼배를 받고 있습니다. 그들은 세속의 도덕적 평균치에도 미치지 못하는 자들로서 생계형 내지는 도피형출가자들이 대부분입니다. 사회부적응자들도 있어서 사이코패스적 성향을 보이기도합니다.

 

이제 그들은 큰도둑이 되었습니다. 가르침에는 관심 없고 도둑질을 일삼고 있습니다. 조계종이 이처럼 도둑의 무리들의 집단이 되어 버린 것은 조계종의 탄생과도 관련이 있습니다.

 

설조스님은 단식을 멈추어야

 

비두바다는 자신의 출생의 비밀을 알고 나서 복수를 맹세했습니다. 부처님이 같은 친지임을 내세워서 고행자처럼 땡볕이 비치는 마른나무 아래에서 비두다바의 대군을 홀로 막았습니다. 세 번까지는 막았지만 네 번째는 더 이상 막지 않았습니다. 싸끼야족의 업보인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이런 논리로 따진다면 설조스님도 단식을 멈추어야 합니다.

 

설조스님은 27일 동안 단식하며 아수라의 무리들 같은 또는 도둑의 무리들 같은 조계종단의 권승들을 물리치기 위하여 온몸으로 저항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루가 다르게 야위워 갑니다. 어느 순간에 죽음이 들이닥칠지 모릅니다.

 




설조스님은 지금 이 시점에서 단식을 멈추어야 합니다. 오늘날 조계종단이 이렇게 타락한 것은 조계종단의 출생의 비밀에 있습니다. 조계종단은 업보를 받고 있습니다. 부처님도 비두다바의 대군을 네 번째에 막지 않은 것은 싸끼야족의 업보 때문이라 했습니다. 설조스님도 조계종단의 업보 때문이라 여기고 단식을 멈추기 바랍니다.

 

만일 부처님이 네 번째에도 비두다바의 대군을 막기 위해 죽음으로 맞섰다면 불교는 없었을 것입니다. 부처님이 비두다바의 네 번째 침공 때 마른나무 아래서 죽음을 맞았다면 가르침은 오늘날까지 전승되어 오지 않았을 것입니다. 설조스님은 미래를 위하여 단식을 멈추어야 합니다.

 

어느 누구도 업보를 막을 수 없습니다. 부처님도 업보를 막을 수 없습니다. 오늘날 조계종이 망가진 것은 스스로 자초한 업보 입니다. 부처님이 네 번째는 포기 했듯이, 설조스님은 인연이 다한 조계종단을 위하여 목숨을 바칠 필요가 없습니다. 살아 남아서 더 큰 일을 해야 합니다.

 

 

2018-07-16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