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 몸과 마음을 자유롭게 하는 것이, 정평불 하계수련회 5-강연
“저건 아닐 것이다, 저건 틀린 것이다.”김진태 선생이 한 말입니다. 선사들과 대화할 때 의문이 들었다고 합니다. 현실과 동떨어진 이야기를 들었을 때 아닌 것 같고 틀린 것 같았다는 것입니다. 나중에 위빠사나 수행을 하고 초기경전을 보니 자신의 생각이 틀림없었다고 합니다.
김진태 선생의 강연을 듣고
정평불 하계수련회 다섯 번째 이야기는 김진태 선생의 초기불교와 수행에 대한 것입니다. 수련회 두 번째 날 이른 아침 서산도량 선방에서 아침예불을 올린 후에 강연을 듣기 위하여 빙 둘러 앉았습니다.
김진태 선생과는 개인적인 인연이 있습니다. 2007년 도심포교당 에서 주최하는 특강에서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때 당시 매달 한번씩 모두 열 차례 열렸습니다. 주로 수행관련이야기였습니다. 특히 미얀마에서 위빠사나 수행을 하고 온 이야기가 기억에 남았습니다. 달변에 특유의 걸쭉한 이야기에 청중들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집중했었습니다.
부처님은 분별론자(Vibhajjavāda)
김진태 선생은 반야를 설명하면서 분별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선사들이 “분별하지 말라.”라고 말하는 것은 잘못이라 했습니다. 잘 분별해야 알 수 있음을 말합니다. 오온에서 실제로 일어나고 사라지는 현상을 잘 관찰하면 번뇌가 사라지고 업장이 녹아지는데 이를 분별의 힘이라 했습니다.
선사들이 늘 하는 말이 “분별하지 말라”입니다. 이는 ‘개념으로 생각하지 말라’라는 말과 같습니다. 언어적으로 문자적으로 개념화 했을 때 진리를 볼 수 없기 때문이라 합니다. 그러나 부처님은 분별하라고 했습니다. 이는 “수행승들이여, 그대들에게 연기를 분별하여 설하겠다. 그것을 잘 듣고 잘 새기도록 해라. 내가 설하겠다.”(S12.2)라고 말씀 하신 것에서 알 수 있습니다.
분별이라는 말은 ‘vibhajja’를 번역한 말입니다. 이 말은 분석 또는 해체의 뜻도 있습니다. 법은 분별하고 분석하고 해체에서 보아야 제대로 볼 수 있음을 말합니다. 이는 대념처경에서 백정의 비유로도 알 수 있습니다. 몸에 대하여 “이 몸속에는 땅의 세계, 물의 세계, 불의 세계, 바람의 세계가 있다.”(D2)라는 말입니다. 진리는 분석적으로 관찰하는 것으로부터 시작 됩니다. 오온에 대하여 분석하고 분별하고 해체 하여 관찰하면 법이 드러납니다.
오온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관찰하면 공통적으로 무상, 고, 무아로 귀결됩니다. 어리석은 범부는 이 몸과 마음을 자신의 것이라 여기지만 잘 관찰하면 내 것이 아님을 알게 됩니다. 조건에 따라 생겨나고 조건이 다하면 사라짐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사람’이라든가 ‘중생’이라든가 하는 망상이 사라짐을 말합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바라문 청년이여, 그것에 대해 나는 분별하여 말하는 사람입니다.(Vibhajjavādo kho ahamettha māṇava)”(M99)라 했습니다. 부처님은 스스로 분별론자(Vibhajjavāda)라 했습니다.
체험에서 우러나오는 이야기
김진태 선생의 강연은 약 한시간 반 동안 진행되었습니다. 그러나 심리적 체감 시간은 30분이 채 되지 않은 것 같습니다. 체험에서 우러나오는 이야기이어서일 것입니다. 초기경전에 따르면 지혜 있는 자의 이야기에 대하여 “이 존자는 심오하고 승묘하고 사유의 영역을 뛰어넘고 미묘하여 오직 슬기로운 자만이 알 수 있는 의미 있는 말을 표현한다.”(A4.192)라 했는데, 미얀마에서 수행한 것을 바탕으로 했기 때문에 몰입해서 들을 수 있었습니다.
“좋은 심소(心所)를 얻는 것이 수행입니다.”
김진태 선생에 따르면 수행은 기본적으로 즐거운 것이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수행은 극기훈련도 아니고 괴롭게 앉아 있는 것도 아님을 말합니다. 그래서 아름다운 심소(心所)를 계발하라고 합했습니다.
심소(cetasika)는 마음부수 또는 마음의 작용이라 하는데 아비담마에서는 52가지 심소가 있습니다. 오온에서 수온과 행온도 심소에 해당됩니다. 52가지 심소중에서는 유익한 것이 있습니다. 믿음(saddhā), 새김(sati), 부끄러움(hiri), 창피함(ottappa), 무탐 (alobha), 무진(adosa), 몸의 경안(kāya-passaddhi), 마음의 경안(citta-passaddhi) 등 19가지가 아름다운 심소입니다. 그래서 김진태선생은 “좋은 심소를 얻는 것이 수행입니다.”라 했습니다.
자기 몸과 마음을 자유롭게 하는 것이
김진태 선생은 한시간 반동안 쉼없이 거침없이 말 했습니다. 모두 다 적을 수 없습니다. 그 중에 인상적인 말 몇 가지를 언급하는데 그칠 뿐입니다. 그런 말 중에서 ‘진정한 행복’에 대하여 말했습니다.
김진태 선생은 부자가 되는 것이나 높은 지위에 올라 가는 것이 행복이 아니라 했습니다. 세상에서 말하는 행복은 감각적 쾌락을 즐기는 것에 지나지 않는데 일시적 행복에 지나지 않음을 말합니다.
김진태 선생은 진정한 행복에 대하여 “자기 몸과 마음을 자유롭게 하는 것입니다.”라 했습니다. 마음의 자재를 얻은 자가 진정으로 행복한 자임을 말합니다. 자신이 마음먹은 대로, 자신이 의도한 대로 자기가 마음에 두고자 하는 곳에 마음을 두는 자가 진정으로 행복한 자라는 것입니다.
김진태 선생에 따르면 부자 되기가 쉽지 않다고 합니다. 설령 재물을 모아 부자가 되어 보았자 재산을 지키는 개(犬)에 지나지 않을 것이라 합니다. 재물을 모아 부자가 되려 하기 보다 마음의 부자가 되는 것이 더 낫다고 합니다. 마음을 집중하여 마음의 자재를 얻었을 때, 마음을 통제하여 마음먹은 대로 했을 때 부자가 된 것과 같다고 했습니다.
물질적 재물을 추구할 것이 아니라 정신적 재물을 얻어야 합니다. 초기경전에서는 칠성재(七聖財) 라 하여 “믿음의 재물, 계행의 재물, 부끄러움과 창피함을 아는 재물, 배움의 재물, 보시의 재물, 일곱 번째로 지혜의 재물”(A7.6)라 합니다. 이와 같은 일곱 가지 재물을 가지고 있으면 부자가 부럽지 않을 것입니다.
중생이라는 말의 정확한 의미는
김진태 선생은 용어에 대해서도 독특하게 해석했습니다. 그 중의 하나가 중생이라는 말입니다. 사람들은 중생에 대하여 ‘사람들의 무리’ 정도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김진태 선생에 따르면 중생이라는 말은 전혀 다릅니다. 개인에 있어서 하나 하나의 생이 수 없이 거듭된 것이 중생이라 합니다. 이런 해석은 매우 신선한 충격을 줍니다. 이제까지 알고 있었던 상식을 뒤엎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김진태 선생의 중생 개념에 대하여 숙고해 보았습니다. 중생이 범부들 또는 일반사람들이라 하여 복수형으로 쓰이고 있는데 오온으로서 중생의 개념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상윳따니까야에 이런 게송이 있습니다.
“마치 모든 부속이 모여서
수레라는 명칭이 있듯이,
이와 같이 존재의 다발에 의해
뭇삶이란 거짓이름이 있다네.”(S5.10)
수행녀 바지라가 읊은 게송입니다. 악마 빠삐만이 “누가 이 뭇삶을 만들었는가?’라고 물었을 때 답한 게송입니다. 여기서 뭇삶은 삿따(satta)를 번역한 것입니다. 이를 한역경전에서는 ‘중생(衆生)’이라 번역했습니다. 그러나 빠알리 원어는 전혀 다릅니다.
삿따의 의미는 빠알리 사전에 따르면 ‘living being’의 뜻입니다. 여러 무리의 사람들이라는 뜻과 전혀 다릅니다. 또 빠알리 사전에 따르면 “This term, just like attā, puggala, jīva”라 했습니다. 삿따라는 말은 자아 또는 사람 또는 생명이라는 뜻입니다.
삿따에 대하여 한자 ‘무리 중(衆)’자를 써서 중생(衆生)이라 번역한 것은 원어의 의미를 잘못 전달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전재성박사는 뭇삶이라는 사용했는데 이 말 역시 ‘뭇’이라는 말이 ‘수효가 많은’이라는 뜻을 가집니다. 뭇삶이라는 말이 자칫 ‘여러 사람들(衆生)’이라는 오해의 소지가 있어 보입니다.
빠알리어에서 삿따는 오온을 지칭한 것입니다. 그런데 게송에 따르면 오온에 대하여 나, 사람, 중생 등으로 부르고 있는데 이는 거짓이름에 불과하다고 했습니다. 조건에 따라 생멸하는 오온에서는 나라고 할 만한 것이 없습니다. 나가 있다면 개념화된 거짓 나로서 윤회하는 나가 있을 것입니다.
김진태 선생에 따르면 삿따의 의미는 사람들의 무리가 아니라 오온이 하나 하나 여러 생이 수없이 여러 생을 거듭한 것이라 했습니다. 이는 게송에서 삿따라는 말을 사용하는 것으로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왜 윤회하는가
하나의 살아 있는 존재는 과거에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이 윤회는 시작을 알 수 없다. 무명에 덮인 뭇삶들은 갈애에 속박되어 유전하고 윤회하므로 그 최초의 시작점을 알 수 없다.”(S15.10)라고 했습니다. 번역에서 ‘뭇삶들’이라는 말이 보입니다. 이 말은 ‘sattānaṃ’을 번역한 말입니다. 초불연에서는 ‘윤회하는 중생들’이라 하여 원문에 없는 ‘윤회하는’ 이라는 말을 추가했습니다. 빅쿠보디는 영역에서 ‘beings’라 하여 ‘존재들’이라는 뜻으로 번역했습니다.
빠알리어 삿따낭은 사전에 따르면 ‘sattā + ānaṃ’의 복합어입니다. 여기서 ‘ānaṃ’은 복수여격입니다. 따라서 ‘sattānaṃ’에 대하여 ‘뭇삶들’ ‘윤회하는 중생들’ ‘beings’라 하여 복수로 번역한 것입니다. 만일 한자어대로 무리 중자를 써서 ‘중생(衆生)들’이라 하면 이중으로 무리가 있는 것으로 되어 모순입니다. 이런 면으로 본다면 빅쿠보디의 존재들이라는 뜻의 ‘beings’가 타당해 보입니다.
무명에 덮이고 갈애에 묶인 자는 누구나 예외없이 윤회합니다. 무명과 갈애 때문에 윤회의 시작점을 알 수 없다고 합니다. 그런데 윤회는 오온을 자아로 여길 때 발생한다는 사실입니다. 이렇게 본다면 삿따라는 말은 일반사람들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오온을 자아로 여기는 자에 해당되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삿따를 중생이라 번역했을 때 중생이라는 말은 오온을 자아로 여기는 자들이 여러 생을 거듭한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무명에 덮인 뭇삶들은 갈애에 속박되어 유전하고 윤회하므로” (S15.10)라 했을 겁니다.
발바닥을 수평으로 딛으라고
김진태 선생의 강연은 언제 들어도 유익합니다. 그냥 듣고 말 수 없어서 스마트폰 메모기능활용하여 키워드를 기록해 두었습니다. 키워드만 보아도 기억을 되살려 글을 쓸 수 있습니다. 김진태 선생은 위빠사나 수행지도도 했습니다. 경행 하는 방법을 알려 주었습니다.
위빠사나 수행센터에 가면 법문과 좌선, 경행, 인터뷰 순으로 진행됩니다. 이날 수련회에서는 법문과 경행을 했습니다. 그런데 경행의 경우 이제까지 알고 있었던 것과 달랐습니다. 이제까지 모르고 있었던 것도 있습니다. 발바닥을 땅에 내딛을 때 수평을 유지해서 딛으라고 했습니다. 이제까지 발뒤꿈치가 먼저 닫는 식으로 했었는데 수평으로 딛으라고 했습니다.
경행은 좌선 못지 않은 수행입니다. 선종에서는 포행이라 하는데 시간도 짧고 몸을 푸는 정도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경행은 하나의 수행입니다. 그래서 좌선과 경행 시간을 동등하게 배정합니다. 경행이 수행인 것은 지혜가 계발되기 때문입니다. 경행을 하면 ‘정신과 물질을 아는 지혜’와 ‘원인과 결과를 아는 지혜’가 계발됩니다.
경행을 할 때는 오로지 발에 집중하라고 했습니다. 움직이려고 하는 의도가 있어서 발이 나가고, 멈추려는 의도가 있어서 발이 멈추어집니다. 멈추어 설 때는 몸 전체를 관찰하라고 했습니다. 머리 끝에서부터 발끝까지 스캔하는 것입니다. 반대로 발끝에서 머리끝까지 스캔합니다. 이렇게 세 번 스캔한 뒤에 천천히 돌아 경행하라고 했습니다.
경행공덕 다섯 가지
경행하면 여러 이점이 있다고 합니다. 등산을 갈 때 산정을 쳐다보며 가면 피곤할 것입니다. 이럴 때는 경행 하듯이 왼발, 오른발에 집중하면 쉽게 정상에 이를 것입니다. 길거리를 갈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무 생각없이 가는 것이 아니라 왼발, 오른발 하며 옮기는 발에 집중하며 걷는 것입니다.
길을 걷다가 대상을 만나면 어떻게 해야 할까? 보이는 것이라면 “보임, 보임”이라 하고, 들리는 것이라면 “들림, 들림”하라고 했습니다. 이는 바히야의 경에서 “볼때는 보여질 뿐이며 들을 때는 들려질 뿐이며 감각할 때는 감각될 뿐이며 인식할 때는 인식될 뿐이다.”(Ud.6)라는 가르침과 같습니다. 대상에 실체는 없고 단지 인식작용만 있음을 말합니다.
김진태 선생에 따르면 길을 걸어 가도 수행하며 걸어 갈 수 있다고 했습니다. 한발 한발 마음을 집중하면 경행수행이라 합니다. 이와 같은 경행에 대하여 초기경전에서는 다섯 가지 공덕이 있다고 했습니다.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은 다섯 가지 경행의 공덕이 있다. 다섯 가지란 무엇인가? 수행승들이여, 긴 여행을 견디게 하고, 정근을 견디게 하고, 건강해지고, 먹고 마시고 씹고 맛본 것을 완전히 소화시키고, 경행이 목표로 하는 집중을 오래 유지시킨다.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은 다섯 가지 경행의 공덕이 있다.”(A5.29)
경행을 하면 장거리 여행 갈 때 좋다고 합니다. 빨리 가고자 한다면 마음만 급해서 지쳐 버릴 것입니다. 그러나 한발 한발에 마음을 집중하여 걸으면 금방 목적지에 다다를 것입니다. 또 경행을 하면 다리에 힘이 생겨서 건강해진다고 합니다.
들은 것을 기억하고 사유해야
법을 들었다면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또 기억한 것을 사유하고 실천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법이라는 것은 요청이 있어야만 설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요청하지도 않았는데 설한다면 길거리 전도사가 말 붙이는 것처럼 피곤한 일이 되어 버립니다.
법문을 청할 때는 삼세번 청합니다. 앙굿따라니까야 ‘뿐니야의 경(A8.82)’에 따르면, 부처님은다음과 같이 여덟 가지 조건이 만족되지 않으면 법을 설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첫째, 찾아 오지 않으면, 그때까지 여래는 가르침을 설하지 않는다.
둘째, 가까이 앉지 않으면, 그때까지 여래는 가르침을 설하지 않는다.
셋째, 질문하지 않으면, 그때까지 여래는 가르침을 설하지 않는다.
넷째, 귀를 기울여 가르침을 듣지 않는다면, 그때까지 여래는 가르침을 설하지 않는다.
다섯째, 가르침을 기억하지 않으면, 그때까지 여래는 가르침을 설하지 않는다.
여섯째, 기억한 가르침의 의미를 탐구하지 않으면, 그때까지 여래는 가르침을 설하지 않는다.
이런 기회를 자주 가졌으면
훌륭한 강연은 오랫동안 기억에 남습니다. 인상 깊었던 것은 삶에 영향을 주어 인생의 방향을 바꿀 수 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 듣고 말 뿐입니다. 강연이 끝남과 동시에 반납한다는 말이 있듯이 깨끗이 잊어 버리는 경향이 있습니다.
정평불 하계수련회 둘째 날 아침에 김진태 선생으로부터 강연을 듣고 경행지도를 받았습니다. 이번 수련회에서 최대의 성과라 봅니다. 참석한 사람들은 이구동성으로 매우 유익했다고 말하면서 이런 기회를 자주 가졌으면 좋겠다고 했습니다.
2018-08-31
진흙속의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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