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증관찰하기, 담마마마까 수행기6
2019년 1월 2일
담마마마까 선원에 입소하면서 준비한 것이 있다. 그것은 수행노트이다. 두툼한 노트를 준비해서 그때 그때 일어난 일을 적어 두기로 했다. 특히 수행과 관련하여 좌선할 때 마다 적어 두고자 했다.
선원에서 본격적으로 좌선을 시작한지 이틀 만에 여덟 번 자리에 앉았다. 집중수행이 아니면 이렇게 자주 앉아 있기 힘들다. 선원에서는 달리 하는 일이 없다. 밥 먹고 명상하는 것이 일이다. 참고로 수행시간표를 보면 다음과 같다.
1) 3:30 기상
2) 4:00 좌선
3) 5:00 예불
4) 5:30 아침공양
5) 6:30 좌선
6) 7:30 행선
7) 8:00 좌선
8) 9:00 방선, 인터뷰
9) 10:30 점심공양
10) 12:00 좌선
11) 13:00 행선
12) 14:00 법문
13) 15:00 행선 및 인터뷰
14) 16:00 좌선
15) 17:00 행선 및 음료
16) 18:00 좌선
17) 19:00 행선
18) 20:00 좌선
19) 21:00 취침 및 자율정진
선원의 시간표대로라면 좌선을 일곱 번 해야 한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가능하지 않음을 알았다. 신체에 대단한 무리가 따르기 때문이다. 선원에 온지 이틀간 좌선 한 것은 여덟 번이다. 첫날 세 번, 둘째날 다섯 번 한 것이다. 그런데 수행시간표에서 빠지지 말아야 할 타임이 있다. 그것은 시작과 마무리 좌선이다. 새벽 4시 좌선과 저녁 8시 좌선은 반드시 참석하라고 했다. 이는 혜송스님이 오리엔테이션 시간에 말한 것이다. 미얀마 어느 선원에 가든지 시작과 마무리 좌선에 참석하는 것은 기본예의라 했다.
좌선한 것을 기록해 두었다. 1월 1일 새벽 4시 처음으로 좌선에 임했다. 평소에 좌선하지 않았기 때문에 몹시 불편했다. 다리가 저려서 자세를 두 세번 바꾸었다. 호흡에 집중하려 했으나 수 없이 망상만 일어났다.
1월 1일 오후 4시 좌선 시간에도 통증이 심했다. 다리저림 뿐만 아니라 엉덩이가 아파서 견딜 수 없었다. 통증이 심하니 호흡은 안중에도 없다. 통증과 전쟁하는 것 같았다. 그럼에도 자세를 바꾸지 않고 한시간을 버텼다. 마치 인내력 테스트하는 것 같았다.
1월 1일 저녁 8시에 세 번째 좌선을 했다. 방석에 문제가 있는 것 같았다. 이곳 법당방석은 한국과 달리 매우 얇다. 너무 얇아서 두 겹으로 접어도 엉덩이가 배겨서 견딜 수 없을 정도이다. 별도로 방석을 준비하여 세 겹으로 접었다. 이번에는 다리저림에 엉덩이 배김과 더불어 허리통증이 찾아 왔다. 그럼에도 자세를 바꾸지 않았다. 통증이 시작 되자 오만가지 생각이 다 떠 올랐다. 오전 오리엔테이션에서 혜송스님이 말한 ‘인내가 열반으로 이끈다’라는 말을 상기 했다. 통증이 심해 불구가 될 것처럼 겁이 나지만 종칠 때까지 참으라고 했다.
1월 2일에는 좌선을 더섯 번 했다. 새벽 4시, 오전 8시, 오전 12시, 오후 4시, 저녁 8시에 자리에 앉았다. 마지막 좌선이 끝나자 탈진 상태가 되었다. 오후불식이라 아무것도 먹지 않은 상태에서 용을 쓴 것이다. 김진태선생에 따르면 초심자가 선원에 들어 와서 처음 몇 주는 용쓰듯이 정진하는 것이 좋다고 했다. 그 말을 유념하며 용쓰듯이 정진에 임했다. 마지막 좌선 시간에는 졸음이 쏟아질 정도로 힘들었다.
하루에 네 번 내지 다섯 번 앉을 때 잘 될 때도 있고 잘 되지 않을 때도 있다. 시간대별로 컨디션도 다르고 조건도 다르기 때문에 앉아 있는다고 해서 모두 똑 같은 결과를 내지 않는다. 그렇다면 앉아 있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인내력 테스트하듯이 고행하듯이 통증을 참고 견디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오리엔테이션 교재에 명백히 나와 있다. 느낌을 관찰하는 것이다. 교재에서는 ‘통증의 실제성품인 생멸을 보고 삼법인을 체험하려는 목적으로 마음챙김해야 합니다.’라고 되어 있다.
통증은 괴로운 것이다. 그런데 괴로운 통증에 대한 느낌은 다양하다. 다리의 경우 저림현상이 있고, 엉덩이의 경우 배김현상이 있고, 등짝의 경우 찌름 현상이 있다. 그런데 이와 같은 통증을 인내로서 관찰하라는 것이다. 그것도 종칠 때까지 자세를 바꾸지 말고 관찰하라고 한다. 불구가 될 것 같지만 그럼에도 인내하라고 한다. 이런 경우 교재에서 수행자의 마음자세에 대한 항목을 보면 “수행을 성취할 때까지 목숨을 수행보다 우위에 두지 마라.”라고 했다. 수행을 할 때에는 목숨걸고 하라는 말과 같다.
수행하다 절대 죽지 않는다고 한다. 만일 수행하다 죽으면 영광이라 한다. 가장 이상적인 죽음이 수행하다 죽는 것이기 때문일 것이다. 다리가 저린다고 하여 불구가 될 것처럼 두려운 마음이 일어나지만 “인내가 닙바나에 이르게 한다.”라는 말처럼 통증을 관찰하라고 한다.
통증에는 실체가 없다. 이는 자세를 바꾸면 금방 드러난다. 다리가 저려서 불구가 될 것 같은 느낌이 들더라도 자세를 바꾸면 씻은듯이 없어지는 것이 통증이다. 그래서 “이 통증은 나로서는 어찌할 수 없는 현상의 하나이므로 나의 의무는 평등심으로 싸띠 하는 것뿐이다. 나는 이 고통을 시종일관 분명하게 관찰해 낼 것이다. 통증의 실체가 없기 때문에 자리에서 일어나면 통증도 사라질 것이다.”(담마마마까 교재 89쪽)라고 생각하라는 것이다.
통증은 일어나고 사라지는 현상에 불과하다. 일어 날만 해서 일어나고 사라질만해서 사라지는 것이다. 이는 다름 아닌 조건 발생이다. 이런 통증에 실체가 있을 수 없다. 이처럼 통증이 생멸하는 것이 통증의 성품이다. 그런데 생멸하는 것은 성품만이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 몸과 마음이 모두 생멸하는 것이라는 사실이다. 이런 사실은 초기경전에 명백히 실려 있는 내용이다.
담마마마까로 출발하기 전에 올린 글이 있다. 상윳따니까야 3권 칸다상윳따의 문구를 인용하여 느낌에 대하여 “느낌은 무상한 것이다. 무상한 것은 괴로운 것이다. 괴로운 것은 실체가 없는 것이다. 실체가 없는 것은 ‘이것은 나의 것이 아니고, 이것은 내가 아니고, 이것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라고 있는 그대로 올바른 지혜로써 관찰해야 한다.”(S22.15)라고 쓴 바 있다. 이런 내용이 담마마마까 교재에 그대로 실려 있어서 방향을 잘 잡은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좌선할 때 교학적 토대를 가지고 임하는 것과 아무런 정보 없이 임하는 것과는 차이가 있을 것이다. 그래서 선원에서는 처음 오는 사람들에게 오리엔테이션 교육을 시키는 것이라 볼 수 있다. 그런데 수행과 관련된 가르침은 이미 초기경전에 무수히 나와 있다는 사실이다. 특히 오온과 관련되어 설명되어 있다.
사람들은 수행에 대하여 신비화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수행을 하면 빛을 본다든가 등의 신비한 체험을 연상하는 것이다. 그러나 부처님 가르침에 따르면 우리의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생멸현상을 보는 것이다. 이는 초기경전에 명확하게 실려 있다.
지금 좌선 중에 통증으로 인하여 괴로운 느낌이 일어났다면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경에 따르면 “느낌은 무상한 것이다. 느낌이 생겨나게 하는 원인도 무상한 것이다. 수행승들이여, 무상한 것에 의해 생겨나는 느낌이 어찌 무상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S22.18)라 했다. 이는 신, 수, 심, 법이라는 사념처에서 수념처에 대한 것이다. 더구나 괴로운 느낌에 대하여 “느낌은 무상하고 조건지어지고 연기된 것으로 부서지고야 마는 것, 무너지고야 마는 것, 사라지고야 마는 것, 소멸하고야 마는 것이다. 그것이 소멸하면 소멸이라 한다.”(S22.21)라 했다. 이와 같은 가르침이 그대로 좌선수행에 적용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처음 앉아 있다 보면 호흡 보다는 통증에 더 마음이 가 있게 된다. 이는 자연스런 현상이다. 위빠사나수행은 늘 강한 대상에 마음이 가 있기 때문이다. 통증을 관찰 할 때 쑤심, 찌름, 저림 등 세밀히 관찰하라고 했다. 그런데 통증은 이곳 저곳으로 옮겨 다니기도 한다는 사실이다. 하나를 해결하면 또 하나가 나타나는 것이다.
통증의 생멸을 관찰하면 통증에는 실체가 없음을 알게 된다. 오온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래서 물질, 느낌, 지각, 형성, 의식이라는 오온에 대하여 “이것은 나의 것이 아니고, 이것은 내가 아니고, 이것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라고 있는 그대로 올바른 지혜로써 관찰해야 한다라고 했다. 이처럼 오온에 대하여 그대로 알고 보는 것에 대하여 위빠사나지혜라 한다.
좌선하는 것은 인내력 테스트하는 것도 아니고 고행하는 것도 아니다. 오온으로 이루어진 우리의 몸과 마음이 나의 것이 아니라 무상하고 괴로운 것이고 실체가 없는 것이라고, 있는 그대로 생멸을 관찰하는 지혜를 계발하기 위한 것이라 볼 수 있다.
Aniccā vata saṅkhārā
uppādavayadhammino
Uppajjitvā nirujjhanti
tesaṃ vūpasamo sukho ti.
諸行無常
是生滅法
生滅滅已
寂滅爲樂
“모든 조건지어진 것은 무상하니,
생겨나고 소멸하는 법이네.
생겨나고 또한 소멸하는 것,
그것을 그치는 것이 행복이네.” (S15.20)
2019-01-21
담마다사 이병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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