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문축제, 담마마마까 수행기10
2019년 1월 4일 저녁
오후 7시부터 법문축제가 시작되었다. 혜송스님에 따르면 담마마마까 개원 13주년과 사리탑건립 7주년 행사라 한다. 작년 까지만 해도 사리탑에서 행사만 가졌으나 야단법석 형식으로 하는 것은 올해가 처음이라 한다. 그래서일까 1일 부터 사리탑 앞 마당 고르기 작업 하는 것을 보았다.
사리탑 마당에는 인부들이 자갈을 깔고 다지는 작업을 했다. 미얀마 일꾼들이 주로 작업했지만 빅쿠들도 삽을 들고 일하는 것을 보았다. 에인다까 사야도와 혜송스님도 현장에서 지켜 보며 이것 저것 관여하는 것을 보았다. 이는 숙소가 사리탑 옆에 있기 때문에 자주 본 것이다.
법문축제의 날에
담마마마까에서는 크고 작은 행사가 열린다. 수행처라 하여 반드시 수행만 하는 것은 아니다. 수행은 기본이다. 그러나 수행도 알면서 하는 것이 더 좋을 것이다. 교학적인 바탕이 된 수행과 아무것도 모른 채 앉아 있는 것 하고는 다를 것이다. 이런 이유로 야단법석을 마련한 것이라 볼 수 있다. 대중들에게 있어서 야단법석은 법보시이다.
법문축제가 시작되는 날 1월 3일 오후에 모든 준비가 완료 되었다. 잘 고른 마당에는 붉은 카페트가 깔렸다. 사리탑 건물 앞에는 꽃으로 장엄된 자리가 마련 되었다. 꽃 장식 가운데 의자가 놓였다. 사야도가 법문하는 장소이다.
저녁 6시 반쯤 되자 사람들이 하나 둘 모여 들기 시작했다. 현재 선원에 사는 150명 가량 살고 있는데 모두 참석대상이다. 이 밖에도 외부에서도 손님이 왔다. 아마 담마마마까 신도이거나 후원자들일 것이다. 모두 합하면 이삼백명 가량 되는 것 같다.
법문축제는 3일간 열린다고 했다. 혜송스님이 기획하고 마련한 것 같다. 첫째날인 1월 3일에는 외부에서 온 사야도가 법문하고, 둘째날인 1월 4일에는 담마마마까 선원장 에인다까 사야도가 법문하고, 셋째날인 1월 5일에는 혜송스님이 법문하기로 되어 있다.
미얀마에서 1월은 가장 날씨가 좋은 계절이다. 우리나라에서 겨울은 혹독한 계절이지만 미얀마에서는 오뉴월에 해당되는 날씨로 가장 선선한 계절이라 한다. 새해가 시작 되는 1월 달에 법문축제가 열리는 것은 이유가 있을 것이다. 선원과 사리탑이 건기에 개원한 영향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건기에 한국인 수행자들이 많이 찾는 다는 사실이다. 어쩌면 한국인 수행자들을 위해서 축제가 열리는지도 모른다. 그것은 한국인을 위하여 혜송스님이 사야도의 법문을 통역해 주기 때문이다.
야단법석 입구에는 참석자들을 위한 공양단이 마련 되었다. 오후불식이기 때문에 주스와 물이 마련 되어 있다. 캔으로 된 오렌지 주스를 마시니 약간은 허기가 가신 것 같다. 작은 패트병으로 된 물은 기본적으로 주는 것이다. 이 밖에 우유가 들어간 달콤한 밀크커피가 제공되기도 한다. 이것 외 일체 먹거리는 없다. 축제라고 해서 달리 먹을 것이 없다.
선원의 봉사자들과 띨라신들이 손님을 맞이 한다. 단에는 보시함도 마련 되어 있다. 능력껏 보시하는 것이다. 명부가 있어서 이름과 금액을 기록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첫날은 아무런 정보 없이 참석했기 때문에 빈손으로 갔다. 둘째 날 부터는 미얀마 돈으로 개별적으로 보시했다. 그러나 법문축제를 앞두고 한국의 수행자들은 일정금액을 모아 함께 보시했다.
저녁 7시가 되었을 때 야단법석이 열렸다. 사리탑을 바라보고 좌측에는 여자가 우측에는 남자가 자리 잡았다. 좌측에는 한국의 비구니스님들이 가장 앞에 앉았고, 다음으로 미얀마 띨라신들, 다음으로 한국의 여자요기와 미얀마 여자요기와 손님들이 앉았다. 우측에는 가장 상석에 빅쿠들이 앉았고, 다음으로 한국의 남자요기, 그리고 후미에는 미얀마 남자요기와 손님들이 앉았다. 좌석배치를 보면 대체적으로 한국인을 배려 하는 듯하다. 이런 현상은 다른 선원에서도 마찬가지라 한다. 외국인을 우선적으로 배려하는 것이다.
대중들이 법석에 모두 자리 잡았다. 법사가 입장할 때는 일산이 등장했다. 두 명의 재가자가 일산을 들고 호위했다. 저녁 캄캄한 밤임에도 일산이 등장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아마도 미얀마에서는 가장 중요한 인물에 대해서는 일산으로 호위하는 전통이 있는 것 같다. 밤에도 일산이 등장하는 이유일 것이다.
법문축제 첫째날은 바딴따 사야도가 법문했다. 담마마마까와 인연 있는 유명사야도일 것이라 추측한다. 그러나 초청사야도의 법문에 대한 통역은 없었다. 그 대신 다음날 오후 2시 한국관에서 혜송스님이 법문의 대강을 이야기해 주었다. 그것은 석가모니부처님과 연등불의 인연에 대한 이야기였다.
마음이 충만되어
법문축제 두 번째 날은 1월 4일에 거행 되었다. 에인다까사야도의 법문이 있었다. 혜송스님이 시종일관 통역을 했다. 단순한 통역이 아니라 한국인들에게 이해하기 쉽게 재해석하여 통역한 것이기 때문에 혜송스님 법문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야단법석은 시종 여법하게 거행되었다. 미얀마 특유의 불교의식과 함께 진행 되었는데 가장 인상적인 것은 운율 섞인 법문이다. 단순하게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노래 형식으로 말하는 것이다. 이런 방식의 법문은 아직까지 들어 보지 못했다.
불교방송을 들으면 선사들이 법문 도중에 게송을 구성지게 뽑아 내는 장면을 들을 수 있다. 게송 말미에는 “나무아미타불”을 운율에 맞추어 길게 뽑아 내는데 이때 신도들도 함께 따라 한다. 미얀마에서도 사야도가 게송을 읊을 때 신도들이 따라 한다. 사야도가 한단어 한단어 선창하면 신도들이 한단어 한단어 후창하는 형식이다. 그런데 사야도는 법문도 운율을 넣어서 한다는 사실이다. 특히 말을 마칠 때 약간 들어 올리며 길게 끄는 것이다. 이런 형식의 법문은 긴 여운을 준다. 그래서 혹시 ‘부처님도 이런 식으로 법문을 하지 않았을까’라고 생각을 해 본다. 그것은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충만하게 하기 때문이다.
사야도가 법문하는 것을 알아 들을 수 없다. 통역을 해 주어야 알 수 있다. 그런데 법문 내용을 몰라도 듣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충만된다는 사실이다. 이와 관련하여 ‘개구리 만두까(maṇḍūka) 이야기’(Vism.7.51)가 떠올랐다.
청정도론에 따르면 부처님이 앙가국의 각가라 연못 언덕에서 짬빠시에 사는 주민을 대상으로 법문했었다. 그때 한 개구리가 부처님의 목소리에 인상(nimitta)을 파악했다. 개구리는 부처님의 설법을 알아 들을 수 없었지만 목소리에 귀를 기울인 것이다. 그때 한 목동이 지팡이에 의지해 있었는데 개구리가 있는 것도 모르고 짓이겨 죽였다. 그런데 개구리는 죽어서 곧바로 삼십삼천 천상에 태어났다는 것이다. 대체 어떻게 해서 이런 일이 가능할까? 개구리는 부처님의 목소리를 듣고 충만하여 그런 상태로 죽었기 때문에 그로 인하여 곧바로 천상에 태어난 것이다.
개구리는 부처님이 설한 가르침을 전혀 알아 들을 수 없었지만 목소리만 듣고서도 충만해 있었던 것이다. 마찬가지로 사야도가 미얀마어로 법문하지만 전혀 알아 들을 수 없다. 그러나 운율이 가미된 말을 들으니 마치 개구리 만두까처럼 마음이 충만됨을 느꼈다. 이런 느낌은 모두에게 해당되는 것 같다. 이날 사야도의 법문을 들은 불자들 역시 충만한 듯 보였다. 그들의 진지한 표정에서 알 수 있었다. 이를 한국어로 통역하여 전하는 혜송스님도 역시 충만되어 있는 듯하다.
바후뿟띠까와 관련된 이야기
법문축제 이틀째를 맞이하여 담마마마까 선원장 에인다까 사야도가 법문한 것은 ‘불행속에 행복을 찾아 법을 성취하며’라는 제목의 법문이다. 내용을 들어보니 법구경 115번 게송에 실려 있는 인연담으로 ‘바후뿟띠까와 관련된 이야기’이다.
바후뿟띠까는 열 네 명의 자식들에게 재산을 모두 물려 주고 나서 버림 받았다. 오갈데 없는 처지가 되자 사원에 출가 했다. 나이 80이 된 그녀는 늦은 나이에 출가하여 모든 것을 처음부터 다시 해야 했다. 아무도 보지 않은 밤에 수행을 했는데 이를 ‘싸띠빳타나 위빠사나’라 했다. 언제 죽을지 알 수 없기 때문에 누구보다 열심히 수행하여 아라한이 되었다고 한다. 이와 같은 인연담은 테리가타에서도 볼 수 있다. 테리가타 102번에서 105번 게송이 쏘나 장로니가 읊은 게송인데, 게송과 관련된 인연담은 법구경 115번 게송의 인연담과 동일하다. 참고로 테리가타에 실려 있는 쏘나 장로니에 대한 인연담은 다음과 같다.
“그녀는 빠두뭇따라 부처님 당시에 항싸바띠 시에서 태어나 성년이 되어 어느 날 스승에게서 가르침을 들으며 스승께서 한 수행녀를 ‘열심히 노력하는 님 가운데 제일’의 자리에 세우는 것을 보고 덕성을 닦아 자신도 그와 같은사람이 되고자 살아 있는 한 공덕을 쌓다가 거기서 죽어서 십만 겁 동안 천상계와 인간계를 윤회하다가 고따마 부처님께서 탄생할 무렵, 싸밧티 시의 훌륭한 가문에 태어나 성년이 되자 시집을 가서 열명의 자식을 얻어 ‘바후뿌띠까-많은 자식을 낳은 여인-라고 알려졌다.
그녀는 남편이 출가했고, 나이가 들었을 때, 아들과 딸들을 집에 두고, 모든 재산을 자식들에게 분배한 후에 자신에게는 아무 것도 남겨두지 않았는데, 그 아들과 딸들은 그녀를 며칠 동안만 봉양한 뒤에 멸시했다.
그녀는 ‘내가 이렇게 멸시받으며 집에서 살아서 무엇하겠는가?’라고 생각하여 수행녀들을 찾아가서 출가를 요청했다. 그녀를 수행녀들은 출가시켰다. 그녀는 구족계를 받고 ‘나는 나이가 들어 출가했으니, 방일하지 말아야 한다.’라고 생각하고 수행녀들을 위하여 의무를 행하면서 ‘밤새도록 수행자의 삶을 닦아야지.’라고 생각하여 그녀는 낮은 건물의 기둥을 손으로 잡고 발걸음을 옮기며 수행자의 삶을 닦았고, 걸으면서도, 어두운 곳에서는 머리를 나무나 다른 것에 부딪칠까보아 나무에 손을 대며 걸으면서 수행자의 삶을 닦았다. 그래서 그녀의 용맹정진이 알려지게 되었다.
스승께서는 그녀의 궁극적인 앎이 성숙한 것을 알고 향실에 앉아서 광명을 비추어 눈앞에 앉아 있는 것처럼 자신을 나투어 ‘최상의 원리를 보지 못하고 백년을 사는 것보다 최상의 원리를 보면서 하루를 사는 것이 낫다.(Dhp.115)의 시를 읊었다. 그녀는 그 시의 가르침이 끝나자 거룩한 경지를 얻었다. (Ap.569-572 참조) 그러자 세존께서는 수행녀들을 차례대로 특별한 자리에 세우면서 그녀를 ‘열심히 노력하는 님 가운데 제일’의 자리에 세웠다. 그녀는 어느 날 자신의 실천을 관찰하고 감흥어린 싯구로써 아래의 다섯 편의 시(Thig.102-106)를 읊었다.”(Thig.A.93, 쏘나 장로니 인연담)
사야도의 법문을 통역으로 들었다. 인연담에 없는 이야기도 있었다. 사야도에 따르면 부처님 당시 사위성 인구가 7천만이라고 했다. 7천만 중에 5천만명은 성인이고 나머지 2천만명은 범부라 한다. 여기서 숫자를 따지는 것은 큰 의미가 없다. 분명한 사실은 부처님이 가장 오래 안거를 보낸 사밧티 시에는 범부보다는 성인이 훨씬 더 많았다는 사실이다.
전화위복이라 한다. 불행한 것처럼 보였으나 결국 행복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실천하면 아무리 노령의 불행한 사람도 행복하게 될 것이라는 가르침이다. 그래서일까 사야도는 ‘불행속에 행복을 찾아 법을 성취하며’라고 법문제목을 뽑았다고 본다.
백년을 사는 것보다
바후뿟띠까관련 이야기는 한국의 불자라면 알고 있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미얀마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이야기이지만 들을 때 마다 새롭다. 그런데 사야도는 인연담을 단순하게 소개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는다. 그 이상 건질 것이 있는 것을 말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아홉 가지 출세간법에 대한 것이다.
흔히 지계하고 보시하면 천상에 태어난다고 한다. 그런데 사야도의 법문은 천상에 태어나는 것이 아닌 아홉 가지 출세간 법에 대한 것이다. 선원 내에서 사부대중에게 적합한 법문이다. 그런데 야단법석에는 일반불자들도 다수 참석했다는 사실이다. 일반불자들도 선원에 들어 오면 9계를 지키며 사는 요기(수행자)가 된다. 이와 같이 수행자를 대상으로 한 법문이어서일까 보시하면 천상에 태어난다는 식의 법문보다는 아홉 가지 출세간법에 대한 법문을 했다.
아홉 가지 출세간법은 사향사과와 열반을 말한다. 바후뿟띠까는 80이라는 늦은 나이에 출가하여 싸띠빳타나 위빠사나를 닦아 단계적으로 출세간 법을 성취했다. 그러나 자식과 재산에 만족하여 오로지 즐기는 것으로 한평생 보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이에 대하여 사야도는 “한 개의 법도 보지 못한 중생은 사악도에 떨어져 불쌍한 중생으로 살아 갈 것입니다.”라는 취지로 말했다. 바후뿟띠까처럼 늦었다고 생각할 때 싸띠빳타나 위빠사나를 닦아 최소한 수다원이라도 되어야 안심할 수 있음을 말한다.
수다원이 되면 일곱 생 이내에 열반에 들 수 있는 발판이 마련 되기 때문에 사악도는 절대 떨어지지 않을 것이라 한다. 이와 같이 출세간법을 성취하면 사악도에 떨어지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단 하루를 살더라도 가치가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최상의 원리를 보지 못하고 백년을 사는 것보다 최상의 원리를 보면서 하루를 사는 것이 낫다.”(Dhp.115)라 한 것이다.
기쁜 마음으로 보시를 하고
법문이 끝나고 보시행사가 있었다. 사원에 갈 때는 보시하는 것은 기본적인 예의일 것이다. 사원은 보시로 유지 되기 때문이다. 더구나 법보시하는 야단법석에서 재보시는 어쩌면 당연한 것인지 모른다. 그래서일까 사야도를 대신하여 정인이 보시를 받았다. 담마마마까에서 수행중인 한국의 불자들도 보시에 동참했다.
미얀마 보시자들을 보면 사회적 지위가 있는 사람들도 많은 것 같다. 그들의 풍채와 옷차림새로 알 수 있다. 그들은 선원에 올 때 반드시 보시하는 것 같다. 이와 같은 보시문화는 탁발전통에서도 볼 수 있다. 전세계적으로 보시문화가 가장 발달한 곳이 미얀마라 한다. 미얀마 사람들은 보시를 하면 공덕이 된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기쁜 마음으로 보시를 하는 것 같다.
사리탑 상공의 비행체
이날 사야도의 법문중에 비행체를 보았다. 사야도가 법문할 때 황금색으로 빛나는 사리탑 상공에 비행체가 나타난 것이다. 빨간 불빛 두 개가 번쩍번쩍이며 사리탑 좌측에 나타나 약 1초 가량 머물다가 서서히 우측으로 아래 방향으로 비스듬히 이동하여 거의 30초 가량 머물렀다. 이후 우측으로 빠른 속도로 사라졌다. 옆에 있는 사람도 보았는데 헬리콥터 같다고 했다. 그러나 소리가 나지 않았기 때문에 헬리콥터 같지는 않았다. 아마도 누군가 드론을 띄운 것 같다. 그런데 밤중에 그것도 시골과 다름 없는 곳에 드론을 띄울 일이 없을 것 같다. 분명한 사실은 사야도가 법문할 떄 사리탑을 중심으로 좌에서 우로 이동하여 머물다가 사라졌다는 사실이다.
공덕은 회향하는 것으로
사야도의 법문이 모두 끝났다. 그런데 법문이 끝나면 반드시 회향하는 시간을 갖는다는 사실이다. 사야도와 사부대중은 미얀마어로 “알 룽 짜 짜 따미야 으흐미야 으흐미야 으흐미야 유로 무자 바 공로 따둣 따둣 따둣”라고 세 번 합송한다. 우리 말로 해석하면 “이 소리 듣는 모든 존재들이여! 내가 지은 모든 공덕을 회향합니다. 모두 가져 가십시오.”라는 말이다. 미얀마어로 ‘따둣’이라는 말은 빠알리어로 ‘사두’를 말한다.
공덕은 회향하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법보시이든, 재보시이든, 수행공덕이든 지은 공덕을 나누어 가지는 것이다. 그런데 공덕은 아무리 나누어도 줄어 들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물질은 나누면 나눌수록 줄어 든다. 돈도 나누면 줄어든다. 그러나 비물질적인 공덕은 나누어도 줄어들지 않는다는 것이다. 오히려 나누면 나눌수록 커지는 것이 공덕이다. 그래서 자신이 지은 모든 공덕을 모두 다 가져 가라고 했다.
2019-01-24
담마다사 이병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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