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가지 먹는 방식, 담마마마까 수행기12
2019년 1월 5일 점심
아침공양 때의 일이다. 김기성 선생이 공양의식에서 감동받은 모양이다. 김선생에 따르면 사야도 상공양을 할 때 눈물이 왈칵 쏟아 질 정도였다고 한다. 삼대가 공양올리는 모습이 너무 아름다웠기 때문이라 한다.
사람은 먹어야 산다. 수행자도 먹어야 수행을 할 수 있다. 그런데 출가수행자는 탁발에 의존한다는 사실이다. 한국에서는 탁발의 전통이 사라졌지만 미얀마에서는 남아 있다. 그러나 아침식사 시간에는 탁발음식이 아니다. 죽으로 간단히 때우는 것이다. 점심시간은 탁발한 것을 나누어 먹는 시간이다.
한끼 보시자 명단
선원에서는 하루에 두끼 식사를 한다. 오후에는 먹지 않는다. 이는 8계를 지키기 때문이다. 하루 두끼 식사는 보시에 의존한다. 누군가 선원 전체 대중에게 한끼 식사를 제공하는 것이다. 한달을 30일로 본다면 60명의 보시자가 있어야 한다. 그래서 식당홀 입구에는 보시자 명단이 적혀 있다. 또 홀의 전광판에는 현재 한끼의 보시자 이름이 미얀마어로 표시되어 있다.
한끼 보시자 명단을 보면 미얀마사람들이 대부분이다. 외국인의 경우 영어로 표기 된다. 이번 한국에서 온 14명의 수행자들도 한끼 보시자에 들어 있다. 이와 같은 한끼 보시는 어느 수행센터에서도 있는 것이다.
아침과 저녁으로 접하는 식사는 누군가 보시에 의한 것이다. 만일 보시자가 없다면 어떻게 될까? 사원에서는 영리를 목적으로 사업을 할 수 없으므로 유지될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미얀마에서는 보시문화가 발달 되어 있기 때문에 사원에 갈 때는 보시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긴다는 것이다.
한국에도 보시를 매우 중요하게 여긴다. 스님들이 안거에 들어 가면 대중공양이라 하여 보시하는 것이 좋은 예일 것이다. 그러나 미얀마처럼 매 끼니 마다 보시자명단을 공개하여 유지하는 것은 아직까지 보지 못했다.
“이샘, 먹을 때는 알아차리며 식사하세요.”
수행자들은 홀에 모여 매일 두 끼 식사를 한다. 식사를 하지 않으면 배가 고파서 견딜 수 없다. 하루 두끼 먹는 식사에서 한끼라도 거르면 허기가 져서 수행 하기 곤란한 것이다. 이런 이유로 식사시간에 빠지지 않는다.
오후에 먹지 않는다. 그래서 가급적 점심식사시간에 많이 먹어 두고자 한다. 이런 모습이 보기 좋지 않았나 보다. 김진태선생이 밥 먹다가 한마디 했다. 김선생은 “이샘, 먹을 때는 알아차리며 식사하세요. 음식이 입에 들어 갈 때에는 ‘들어감, 들어감’하고, 음식을 이빨로 씹을 때에는 ‘씹음, 씹음’, 그리고 음식을 목구멍으로 넘길 때에는 ‘넘김, 넘김’ 하세요.”라고 말했다. 이 말을 듣자 갑자기 부끄럽고 창피해졌다. 그 동안 아무 생각 없이 허겁지겁 먹었기 때문이다. 오후에 먹지 않는 것만 생각하여 점심 때 잘 먹으려 한 것이다. 배에 최대한 가득 채우려고만 했을 뿐 전혀 사띠가 없었던 것이다.
먹는 것도 수행이라 한다. 잠을 자는 것도 수행이다. 일상에서 모든 것이 수행 아닌 것이 없다. 반드시 다리 꼬고 앉아 있는 것만 수행이 아니다. 그래서 수행의 범주를 크게 좌선, 행선, 일상선으로 나눈다. 좌선할 때는 호흡을 보라고 하고, 행선할 때는 발바닥의 감촉을 보라고 하고, 일상에서는 늘 사띠 하라고 한다. 한마디로 말하면 항상 ‘사띠’하라는 것이다.
음식절제와 관련하여
먹는 것을 왜 수행이라 할까? 이는 부처님 가르침에서도 알 수 있다. 앙굿따라니까야 ‘확실한 길의 경’(A3.61)에 따르면 세 가지 원리를 갖추면 깨달을 수 있다고 했다. 그 세 가지는 감각의 문을 수호하는 것, 식사에 알맞은 분량을 아는 것, 깨어 있음에 철저한 것을 말한다. 이 세 가지를 지키면 “번뇌를 부수기 위한 효과적인 기반을 얻는다.”(A3.16)라 했다. 이와 같은 세 가지 조건 중에 음식절제가 들어가 있다는 사실이다. 음식절제와 관련하여 구체적인 가르침은 다음과 같다.
“수행승들이여, 식사할 때에 알맞은 분량을 안다는 것이라 무엇인가? 수행승들이여, 세상에 수행승은 ‘이것은 놀이나 사치로나 장식이나 치장을 위해서가 아니라 이 몸이 살아있는 한 그 몸을 유지하고 해를 입지 않도록 하고 청정한 삶을 살기 위한 것이다. 그래서 나는 예전의 괴로움을 제거하고 새로운 괴로움을 받아 들이지 않을 것이다. 이것으로 나는 허물없이 안온하게 살것이다.’라고 깊이 성찰하여 음식을 섭취한다. 수행승들이여, 식사할 때에 알맞은 분량을 안다는 것은 이와 같은 것이다.”(A3.16)
이와 같은 가르침은 초기경전 도처에서 볼 수 있다. 음식절제는 식사할 때에 알맞은 분량을 아는 것이다. 탐욕으로 성냄으로 어리석음으로 먹지 않고 사띠하며 먹는 것을 말한다. 이는 다름 아닌 일상사띠이다.
담마마마까 교재를 보면 일상에서 사띠 하는 방법이 소개 되어 있다. 숙소에 도착했을 때 문을 열고 닫는 것, 눕는 것, 자는 것, 옷을 벗고 입는 것, 대소변 보는 것 등 구체적으로 나열되어 있다. 하나도 놓치지 말고 의도를 알아차려야 함을 말한다. 그런데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일상사띠로서 먹고 마시는 것만한 것이 없을 것이다. 먹고 마시는 것이야말로 일상중의 일상이기 때문이다.
세 가지 먹는 방식
밥먹는 것은 일상이다. 그렇다면 수행자는 어떻게 밥을 먹어야 할까? 이에 대하여 수행처에서는 세 가지 방법을 제시한다. 그것은 위빠사나로 먹기, 사마타로 먹기, 지계로 먹기이다.
위빠사나로 먹기는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이는 다름 아니라 사띠하면서 먹는 것이다. 건성건성 사띠 하는 것이 아니라 완벽하게 사띠하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음식을 볼 때는 ‘봄, 봄’이라 하고, 입을 벌릴 때는 ‘벌림, 벌림’이라 해야 한다. 음식을 넣을 때는 ‘넣음, 넣음’이라 해야 하고, 음식을 씹을 때는 ‘씹음, 씹음’이라 해야 하고, 음식을 넘길 때는 ‘넘김, 넘김’이라 해야 한다. 모두 13가지 단계가 있는데 이를 모두 행한다면 밥 먹는 시간이 몇 시간 걸릴 것이다. 또한 맛을 알면서 먹을 수도 있을 것이다. 음식이 지닌 고유한 맛을 알아 차리며 먹는 것이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식사할 때에는 넣음, 씹음, 넘김 3단계로 사띠하며 먹는다.
사마타로 먹기란 무엇일까? 음식이 여기까지 오는 과정을 생각하며 먹는 것이다. 한끼의 음식을 보시한 이를 생각하며 먹고, 음식을 만든 봉사자들을 생각하며 먹는 것이다. 담마마마까 공양게송을 보면 네 가지로 설명되어 있다. 가장 먼저 선원장과 상가에 감사하고, 선원에서 수행하고 있는 사부대중에게 감사하고, 한끼 공양을 제공한 음료보시자에게 감사하고, 마지막으로 음료를 만들어 준 봉사자들에게 감사하는 것이다. 그래서 담마마마까에서는 이들 네 부류의 사람들에게 감사하는 공양게송을 네 번 합송한다. 그것은 “우주의 모든 생명들이 위험과 해악으로부터 벗어나기를! 마음의 근심이 소멸하여 행복하기를! 몸의 고통이 소멸하여 건강하기를! 몸과 마음이 건강하여 행복하게 자신의 책임을 잘 완수하게 되기를!”라고 발원하는 것이다. 이 게송은 사무량심을 바탕으로 구성된 것이다.
마지막으로 지계로 음식을 먹는 것이다. 이는 앞서 언급된 음식절제에 대한 게송과 맥락을 같이 한다. 담마마마까 교재에 따르면, 음식을 대할 때 “배우나 곡예사와 같이 몸매나 피부를 아름답게 하려고 먹거나 운동선수처럼 힘이 좋아지려고 먹는 것이 아니라 이 음식을 먹고 육체의 피로를 이겨내어 이미 생긴 병은 치료되고, 아직 생기지 않은 병은 새로 생기지 않도록 하여 수행을 더욱 잘 하기 위한 목적으로 먹음.”이라고 되어 있다.
사띠 없이 먹었을 때
음식절제를 하면 어떤 이익이 있을까? 담마마마까 교재에 따르면, 가장 먼저 감각적 욕망이 조절된다는 것이다. 다음으로 아름답고 천천히 늙고 오래산다. 이와 같은 내용은 경전적 근거가 있다. 상윳따니까야 ‘됫박 분량의 경’에 따르면, 부처님이 과식을 하는 빠세나디왕에게 “언제나 새김을 확립하고 식사에 분량을 아는 사람은 괴로운 느낌이 적어지고 목숨을 보전하여 더디 늙어가리.”(S3.13)라고 말씀 하신 것에서도 알 수 있다.
음식절제하는 가장 큰 이유는 사띠의 강화에 있다. 사띠의 힘이 강해지면 오력이 고르게 강화된다는 사실이다. 신심, 노력, 사띠, 사마디, 지혜라는 다섯 가지 힘이 강화되는 것은 사띠가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초기경전에 음식절제, 즉 사띠하면서 먹기에 대한 가르침은 무수하게 등장한다. 부처님은 자신의 외동아들에게 조차도 “선한 친구와 사귀어라. 인적이 없이 외딴 곳, 고요한 곳에서 거처하여라. 음식의 분량을 아는 사람이 되어라.”(Stn.338)라고 말씀 했을 정도이다. 만약 음식을 먹을 때 사띠를 놓치면 어떻게 될까?
부처님은 네 가지 자양분이라 하여 물질, 접촉, 의도, 의식도 음식과 같다고 했다. 네 가지 자양분을 보면 반드시 물질만 식사가 아님을 알 수 있다. 접촉의 식사도 있고 의도의 식사, 의식의 식사도 있다. 이와 같은 네 가지 식사에 대하여 “다시 태어남을 원하는 뭇삶의 보양”(S12.11)이라 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아무 생각 없이 먹고, 아무 생각 없이 접촉하고, 아무 생각 없이 행위 하고, 아무 생각 없이 살아 간다면 세세생생 윤회 할 수밖에 없음을 말한다. 사띠 없이 살았을 때 윤회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기쁨을 음식으로
부처님은 음식을 대할 때 ‘아들고기를 대하듯’ 하라고 했다. 황야에서 헤메던 부부가 아들고기를 먹고 살아남은 비극적 이야기를 말한다. 이렇게 음식을 아들고기 대하듯 하면 음식을 몸매나 피부를 아름답게 하려고 먹거나 운동선수처럼 힘이 좋아지려고 먹지 못할 것이다. 지계로 음식먹기가 자연스럽게 지켜 질 것이다.
음식절제를 하면 깨달음에 이를 수가 있다고 했다. 이는 법구경에서 “번뇌를 부수고 음식에 집착하지 않고 텅비고 인상을 여의어 활동영역에서 해탈한 님들, 허공을 나는 새처럼, 그들의 자취는 찾기 어렵다.”(Dhp93)라는 게송으로도 알 수 있다.
색계에 태어난다면 음식을 먹지 않아도 될 것이다. 이는 초기경전에서 “그들은 정신으로 이루어진 자로서, 기쁨을 먹고 지내고, 스스로 빛을 내고, 허공을 날며 영광스럽게 오래 산다.”(D27.6)라 되어 있는 것에서 알 수 있다. 색계 존재들은 기쁨을 먹고 살고 있기 때문에 몸이 깃털처럼 가벼워서 날아 다닐 수 있다는 것이다. 수행을 하는 목적은 욕계를 탈출하기 위한 목적도 있다. 좌선을 하여 선정을 구성하는 요소가 나타나면 먹지 않아도 배 부를 것이다. 기쁨을 음식으로 먹고 사는 것이다.
“아, 우리는 아주 안락하게 산다.
우리의 것이라고는 결코 없어도
빛이 흐르는 하느님 세계의 하느님들처럼
기쁨을 음식으로 삼아 지내리라.(Dhp200)
2019-01-25
담마다사 이병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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