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송스님의 오력법문, 담마마마까 수행기13
2019년 1월 5일 저녁
법문축제 3일째이다. 어제에 이어 저녁 7시 날이 완전히 어두워지자 축제가 시작되었다. 불사리탑 앞에는 조명이 대낮처럼 밝게 비추었고 마당에는 붉은 카페트가 깔렸다. 대중들이 하나 둘 모여 들기 시작했다. 저녁 6시 반이 넘어서자 본격적으로 외부 손님들이 오기 시작했다.
선원봉사자들
모두 맨발로 입장했다. 입구에서 비닐을 나누어 주는데 신발을 넣는 용도이다. 미얀마에서는 사원에 들어 갈 때는 맨발로 들어 가야 한다. 그러나 이곳 법문축제현장은 카펫이 깔려 있어서 바닥이 부드럽다. 마치 영화배우들이 레드카펫을 밟듯이, 참석자들은 화려한 문양의 카펫을 밝고 산뜻하게 입장하는 모습이다. 아마 담마마마까 신도이거나 인연 있는 사람들일 것이다.
선원봉사자들은 입구에 단을 마련해 놓고 음료수를 나누어 주었다. 물병과 음료캔은 기본이다. 봉사자중에는 흰옷에 밤색 어깨 띠를 두른 소녀들이 돋보인다. 커다란 스텐대야에 커피를 제공했는데 종이컵에 담겨 있다. 인도의 국민차라 볼 수 있는 짜이 맛이다. 한국의 믹스커피와는 다른 것이다. 매우 부드럽고 달콤하다.
저녁 7시가 되자 3일차 법문축제가 시작되었다. 법사는 혜송스님이다. 담마마마까 창건주의 자격으로서 의미도 있을 것이다. 담마마마까는 한국인 사부대중의 힘으로 건립된 미얀마 절이다. 한국인들이 건립하여 미얀마 상가에 기증한 것이다. 그럼에도 미얀마에서는 한국절로 알려져 있다.
야단법석(野壇法席)
혜송스님이 입장했다. 입장할 때에는 일산이 등장했다. 법사가 입장할 때나 퇴장 할 때 일산이 사용된다. 우리나라의 경우 왕에게나 해당되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일산을 사용하는 것은 오랜 불교 전통에 따른 것이라 볼 수 있다. 가급적 부처님 가르침대로 살고자 노력하는 미얀마불교에서 법사들에게 일산은 자연스러운 것 같다. 설령 캄캄한 밤이라 해도 일산은 하나의 아름다운 전통이라 보여진다.
혜송스님이 법상에 앉았다. 법상에는 온갖 꽃들로 장식되어 있다. 이번 3일간 열리는 법문축제에 사용되는 꽃은 모두 생화(生化)이다. 법상 앞과 뒤, 좌와 우에 모두 꽃으로 장엄된 법상이다. 아마도 미얀마에서는 이와 같은 방식으로 법문축제를 하는 모양이다. 이렇게 법사는 최고의 예우를 받으면서 부처님 가르침을 전한다.
야단법석(野壇法席)이라는 말이 있다. 사전적 의미는 ‘야외에 설치된 설법자리’라는 뜻이다. 그러나 본래 뜻과는 다르게 변질이 되어서 떠들썩하고 시끄러운 모습의 이미지이다. 그럼에도 이곳 미얀마에서는 야단법석이라는 본래의 뜻으로 사용되고 있다. 그래서 법문축제라고도 하고 야단법석이라고도 하는 것이다.
야단법석에는 이삼백명 가량이 모였다. 기본적으로 선원에 살고 있는 사부대중 150명에다 약 백명 가량이 더 온 것 같다. 그들은 승용차로도 오고 트럭을 개조해서 만든 대중교통수단을 통해서도 왔다. 인근 마을 사람들도 있을 것이고 양곤에서 온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사부대중이 모이니 마당이 가득 차 보인다.
야단법석 3일차이다. 어제 2일차와 다른 것이 있다. 좌석배치가 달라졌다. 사리탑을 바라보고 오른쪽이 남자들 자리인데 의자가 놓여진 것이다. 저녁 7시부터 9시까지 2시간 동안 진행되는 법석에서 바닥에 앉아 있으면 불편하다. 그래서일까 빅쿠들과 한국인 남자요기를 위하여 의자를 마련해 놓은 것이다.
미얀마 선원에서는 출가자와 재가자가 엄격하게 구분되어 있다. 또한 남자와 여자가 구분되어 있다. 그렇다고 차별하는 것은 아니다. 출가자 곁에는 여성이 앉지 못하게 되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또한 선원에서는 남자와 여자가 섞여 앉아 있으면 모양새도 좋아 보이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이런 이유에서일까 출재가가 구분되어 있고 남자와 여자가 함께 앉지 못하게 되어 있는 것 같다.
오력에 대한 법문
혜송스님의 법문이 시작 되었다. 처음부터 미얀마어로 법문을 진행했다. 스님은 미얀마어가 유창하다. 교계신문에 따르면 스님은 2000년에 스승인 에인다까 스님의 권유로 미얀마어를 배우기 시작했다고 한다. 불과 1년만에 현지인 수준의 언어를 구사했다고 하는데 언어습득 능력이 출중한 것 같다. 이렇게 미얀마어를 능숙하게 구사해서일까 현재 국내에서 가장 탁월한 수행통역사 중의 한사람이라 한다.
혜송스님이 미얀마어에 능통하기는 하지만 법문은 또 다른 차원의 문제이다. 현지인인 에인다까 사야도는 원고 없이 법문을 하지만, 외국인인 혜송스님은 준비된 원고를 사용했다. 원고는 김진태 선생이 육필로 작성한 것이다. 이날 스님은 미얀마어로만 법문했을 뿐 한국어는 사용하지 않았다. 그래서 한국인들에게는 한국어로 된 법문 요약본이 별도로 제공되었다.
법문축제의 정식명칭은 ‘붓다 뿌자니아 부에’이다. 담마마마까 개원 13주년과 사리탑 건립 7주년을 기념하기 위한 것이다. 이날 혜송스님은 ‘힘이 충분하면 행복을 성취한다’라는 주제로 법문 했다. 오력에 대한 법문이다.
혜송스님은 법문에 들어가기전에 자비관을 했다. 미얀마어로 “롱 송 미아수아 땃뜨와 찬다 꼬세잇 미에바세”로 시작된다. 우리말로 해석하면 “모든 생명들이 언제나 심신이 행복하여지이다. 천재지변, 위험, 해악이 사라져서 평화롭기를!”라는 뜻이다. 대중들은 법사의 선창에 따라 두 번 후창한다. 자비관에 이어 삼보예찬이 꽤 길게 이어졌다.
사야도의 법문집을 접했을 때
설법이 시작 되었다. 자료에 따르면 싸왓티의 급고독장자가 5억 4천만냥을 들여서 지어 보시한 기원정사에 머물 때 하신 법문이라 한다. 오력에 대한 법문이다.
오력은 미얀마어로 땃따(신심), 위리야(정진), 따띠(사띠), 사마디(선정), 삐냐(지혜)라 한다. 미얀마어와 빠알리어가 어감에 있어서 차이가 있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사띠를 ‘따띠’라 하고 빤냐를 ‘삐냐’라 한다. 사두를 ‘따둣’이라 한다. 붓다를 ‘복당’이라 하고, 상가를 ‘땅강’이라 한다. 비슷하면서도 다른 발음이다. 왜 이렇게 미얀마식으로 발음하는 것일까? 미얀마 사람들에 따르면 부처님 당시부터 전승되어온 말이라 한다.
오력에 관한 법문은 인곡뜨라(앙굿따라) 니까야 5장에 실려 있는 힘 오종에 대한 것이라 한다. 초기경전에 근거한 법문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자료를 보면 초기경전에 없는 내용도 많다는 것이다. 미얀마에서는 오래 전부터 전승되어 내려온 것이지만 한국에는 알려지지 않은 것들이다. 그래서 미얀마 사야도의 법문집을 접했을 때 신선한 충격을 받는다.
한번도 접해 보지 않은 법문을 접했을 때 인식의 지평이 넓어지는 것 같다. 그러나 미얀마 사야도가 지어낸 말이 아니다. 빠알리삼장에 근거한 법문이다. 니까야의 내용은 어느 정도 알려졌지만 방대한 주석에 대한 내용은 알려진 것이 별로 없다. 그런데 미얀마의 사야도들은 전승되어 온 방대한 주석의 내용에 실려 있는 것까지 알려 준다는 사실이다. 이런 이유로 미얀마 사야도의 법문집을 접하면 건질 것이 매우 많다. 혜송스님의 법문 중에도 그런 것이 있다.
초기불교에 관심 있는 불자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내용이 오력이다. 그런데 혜송스님의 오력에 대한 법문을 보면 한마디로 ‘건질 것이 있다’는 것이다. 스님은 오력에 대하여 먼저 이렇게 정의했다. 땃따(삿다)는 신심을 말하는 것이고, 위리야는 정진력으로서 노력하고 분투하는 것이고, 따띠(사띠)는 성성한 알아차림이라 한다. 또 사마디는 신-수-심-법이라는 대상에 몰입하는 집중력이고, 삐냐(빤냐)는 생멸변화를 아는 것이라 한다. 사띠에 대하여 성성한 알아차림이라 말한 것이 새롭다. 또 빤냐에 대하여 생멸변화를 아는 것이라 했다. 이렇게 말한 것은 수행을 기반으로 한 것이다. 교학적으로 설명한 것과는 다른 것이다.
업과 업의 과보에 대하여
첫 번째, 믿음의 힘이다. 스님에 따르면 신심에는 오종이 있다고 했다. 그것은 불, 법, 승, 업, 업의 결과를 아는 것이라 했다. 초기불교에 관심을 가지고 경장과 논장을 본 불자라면 누구나 인정하는 것이다. 신심이라는 것이 맹목적 믿음이 아니라 확신에 찬 믿음임을 말한다. 그래서 신심을 뜻하는 삿다(saddhā)에 대하여 영어로 ‘confidence’라 한다. 단순한 신앙(faith)이 아니라 확신에 찬 믿음이다. 그것은 이성적 사유에 근거한 믿음이기도 하다.
부처님이 “이것이 괴로움이다”라고 하여 사고팔고를 설하였을 때 이를 부정할 사람이 있을까? 어느 누가 “그것은 진리가 아닙니다”라고 부정할 수 있을까? 부처님이 설한 사고팔고를 자신의 처지에서 살펴 보았을 때 틀림 없이 진리임을 알게 될 것이다. 그래서 진리로서 받아 들이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이것이 확신에 찬 믿음인 삿다인 것이다. 이렇게 확신에 찬 믿음이 생겨나면 삼보에 대한 믿음은 흔들림 없게 된다.
오종의 믿음 중에 업과 업의 과보가 들어가 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아직까지 한국불교에서는 삿다를 설명할 때 업과 업보에 대하여 삿다의 범주에 넣어서 법문하거나 책에 써 놓은 것을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니까야를 보면 너무나 자명하다. 부처님은 업의 법칙을 설하면서 스스로 ‘작론자(kiriya-vādīn)’라 했다. 또 부처님은 스스로에 대하여‘업보를 믿는 자(kamavāda)’ 라 했다.
부처님은 작론자이자 업보를 믿는 자이다. 이는 부처님이 이교도들에게 “벗들이여, 업보를 믿는 자로서 괴로움은 자신이 만든 것이라고 주장하는 수행자들이나 성직자들에게도 접촉이 없이 괴로움을 경험할 있는 그러한 여지는 없습니다.” (S12.24)라 말씀 한 것에서 알 수 있다. 그런데 업에 대한 가르침은 과거불도 설했다는 사실이다. 이는 부처님이 “수행승들이여, 과거세의 거룩한 님, 올바로 원만히 깨달은 님이었던 세존들도 업을 설하고 업의 과보를 설하고 정진을 설하였다. 그러나 수행승들이여, 어리석은 자, 막칼리는 업도 없고 업의 과보도 없고 정진도 없다고 그것을 부정한다.” (A3.135)라고 말씀 했다는 것이다.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 사띠
두 번째, 정진의 힘이다. 정진에는 네 종류가 있다. 혜송스님은 한국불자들이 교학적으로 알고 있는 것과 다르게 수행의 관점에서 말했다. 그것은 “이미 일어난 불선업을 두 번 다시 생각하지 말라. 아직 일어나지 않은 불선업을 일어나지 않게 사띠하라. 아직 일어나지 않은 선업을 일어나게 사띠하라. 이미 일어난 선업을 더욱 커지게 사띠하라.”에 대한 것이다. 여기서 이미 일어난 불선업은 사띠의 대상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두 번 다시 생각하지 말라고 했다. 나머지는 수행의 관점에서 사띠하라고 했다. 이것이 미얀마에서 말하는 정진에 대한 가르침이다.
세 번째, 사띠의 힘이다. 사띠의 힘이 충분해야 함을 말한다. 사띠의 힘은 사띠빳타나 위빠사나 수행을 끊어지지 않게 관찰을 계속하는 것이라 한다. 이와 같은 사띠빳타나 위빠사나는 신, 수, 심, 법 네 가지가 있다.
네 번째, 사마디의 힘이다. 사마디의 힘이 충분해야 도와 과, 열반을 성취할 수 있음을 말한다. 사마디는 마음을 한곳에 몰입하는 것인데, 대상은 신, 수, 심, 법이다.
다섯 번째, 지혜의 힘이다. 지혜의 힘이 충분해야 역시 도와 과, 열반을 성취할 수 있음을 말한다. 미얀마어로 삐냐는 ‘분명히 아는 지혜’를 말한다. 분명히 알아야 할 대상은 위빠사나의 대상인 신, 수, 심, 법임을 말한다. 이는 물질의 법, 정신의 법, 원인의 법, 결과의 법들이 생멸하는 현상을 통하여 무상, 고, 무아를 보는 지혜를 말한다.
오력 중에서 어느 것이 가장 중요할까? 물론 삿다, 위리야, 사띠, 사마디, 빤냐 모두 다 중요하다. 그럼에도 ‘사띠’만 한 것이 없을 것이다. 사띠의 힘은 크면 클수록 좋기 때문이다. 사띠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그러나 다른 힘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시소를 타는 것처럼
삿다와 빤냐, 그리고 위리야와 사마디는 마치 ‘시소’를 타는 것과 같다. 어느 한쪽이 강화되면 다른 한쪽은 약화되기 때문이다. 혜송스님은 이에 대하여 사람 이름을 들어가며 설명했다.
삿다(신심)가 너무 강하고 빤냐(지혜)가 약한 사람이 있다. 이를 ‘씬사마다’와 같은 사람이라 한다. 정(正)과 사(邪)를 구별하지 못하는 것이다. 맹목적인 믿음에 빠졌을 때 괴로움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라 한다. 오늘날 대부분 종교가 이런 현상에 처해 있다고 볼 수 있다. 반면 지나치게 지혜가 강한 사람이 있다. 그러다 보니 모든 것을 의심한다. 자연스럽게 가르침도 의심하는 것이다. 회의론자가 되기 쉽다. 이런 사람에 대하여 사리뿟따의 스승과 같다고 한다. 사리뿟따가 부처님 교단으로 출가하기 전의 스승은 회의론자‘산자야 벨랏뿟따’를 말한다. 그래서 너무 똑똑하고 신심이 약하면 사기치기 쉽다고 한다.
위리야(정진)가 지나치게 강하고 사마디(집중)가 약하면 어떻게 될까? 이를 ‘아난다’에 비유했다. 아난다는 결집에 초대받지 못했다. 아라한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499명의 아라한들은 반드시 아난다가 있어야 된다고 했다. 아난다는 아라한이 되고 싶은 마음에서 밤새 경행하며 정진했다. 그러나 정진은 강화 되었지만 반대로 집중이 약화 되었다. 아무리 해도 집중이 되지 않자 아난다는 “나는 이 생에 아라한은 못 되는 모양이다. 이제 좀 쉬어야겠다.”라며 침상에 누웠다. 디가니까야 주석에 따르면 “두 발이 땅에서 떨어지고 머리가 베개에 닿기 직전에 집착없이 번뇌에서 마음이 해탈되었다.”(Smv.10)라 되어 있다.
아난다가 깨닫지 못한 것은 지나친 흥분 때문이라 한다. 아난다존자는 지나치게 정진을 한 것이다. 그래서 혜송스님은 미얀마어로 “윗리야 룽게 따마디네 쌔잇테 삐안루잉 네 땃떼(노력이 넘치고 집중력이 약하면 마음이 달아나고 산란할 수 있다)”라고 게송으로 말했다. 대중은 이를 합송했다.
사마디가 넘치고 정진력이 약하면 어떻게 될까? 이에 대하여 혜송스님은 목갈라나를 예로 들었다. 목갈라는 신통제일로 알려졌다. 신통은 네 번째 선정에서 나오는 것이다. 자연스럽게 사마디가 강화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래서 “목갈라나 존자처럼 점점 고요해지면서 사띠없이 고요하거나 흐릿하거나 졸 수 있다.”라고 법문했다.
스님이 선창하면 대중은 후창하고
혜송스님은 시종 미얀마어로 법문했다. 오력에 대하여 하나하나 설명할 때는 게송을 곁들였다. 게송에는 법문의 내용이 짧게 압축되어 되어 있다. 그런데 에인다까 사야도는 법문할 때 반드시 게송으로 정리한다는 사실이다. 설명이 끝날 때 마다 게송을 읊는데 대중은 따라 한다. 그것도 세 번 따라 한다.
미얀마 사부대중은 이번 혜송스님이 게송을 읊을 때마다 따라 했다. 스님이 선창하면 대중은 후창하는 것이다. 세 번 반복한다. 게송은 운율로 되어 있어서 아름다운 노래를 듣는 듯 하다. 분위기 때문일까 듣는 것만으로도 충만감을 느낀다.
미얀마사부대중을 대상으로
미얀마를 테라와다 3국중의 하나라 한다. 스리랑카를 교학의 나라라 하고, 미얀마를 수행의 나라라 하고, 태국을 계율의 나라라고 한다. 동아시아에서는 교학의 나라는 일본이고, 수행의 나라는 한국이고, 계율의 나라는 중국이라 한다. 수행이라는 측면으로 본다면 미얀마와 한국은 공통점이 있다. 그래서일까 매년 수천명의 한국인들이 수행의 나라 미얀마를 찾는다고 한다.
혜송스님은 신심 있는 미얀마사부대중을 대상으로 법문했다. 이런 현상은 매우 희귀한 케이스라 본다. 그 역은 많이 볼 수 있다. 현재 한국에는 미얀마 스님들이 들어와 활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어느 미얀마 스님은 한국어가 유창하다. 젊고 미남형이서일까 신도들도 많다고 한다. 서울 강남에 선원이 있고 지방에 꾸띠가 있는 수행센터도 건립 예정이라 한다. 그런데 혜송스님은 완전히 반대 되는 케이스에 해당된다. 미얀마에 수행센터를 건립하여 미얀마인들을 대상으로 설법하기 때문이다.
미얀마의 밤하늘에 혜송스님의 충만한 목소리가 퍼져 나갔다. 이런 사실을 기억하는 사람에게는 오래 기억으로 남을 것이다. 기록하는 자가 있다면 세상에 널리 알려질 것이다. 야밤에 황금빛으로 빛나는 사리탑, 그리고 석굴암 불상을 그대로 본떠 만든 한국형 불상이 있는 곳, 이곳 담마마마까에서 운율 섞인 감동적인 게송을 들었다. 듣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충만 되었다.
2019-01-26
담마다사 이병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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