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성지순례기

쉐우민 수행센터, 미얀마 성지순례기4

담마다사 이병욱 2019. 2. 17. 19:15

 

쉐우민 수행센터, 미얀마 성지순례기4

 

 

2019 1 11일 오후

 

찬먜센터를 나와서 쉐우민센터로 향했다. 큰 길로 가는 도중에 일단의 학생들을 만났다. 하교 하는 학생들이다. 일시에 쏟아져 나오는 숫자가 엄청나게 많다. 중학생들이라 한다. 남자아이건 여자아이건 모두 치마를 입었다. 아이들도 많고 젊은 사람들도 많아서 매우 역동적이다. 한국의 칠십년대가 연상된다.

 

 



쉐우민 가는 길은 양곤방향인 것만은 확실하다. 그러나 어디가 어디인지 알 수 없다. 후기를 작성하는 이 시점에서 인터넷으로 주소를 찾아 보니 ‘Shwe Oo Min Dhamma Sukha Tawya Aung Myay Thar Yar Street Kon Tala Paung Village’라 되어 있다. 구글 위성지도를 찾아 보았다. 양곤에서 약20키로 미터 거리로 자동차로 35분 가량 걸린다. 사실상 양곤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양곤 외곽 타운에 있는 것이다.

 





 

아카데믹한 분위기

 

쉐우민으로 들어 가는 입구에 커다란 아치가 있다. 어느 수행센터에서든지 볼 수 있는 황금색 아치이다. 황금색이 돋보이는 것은 쉐우민에서 라는 말이 황금을 뜻하기 때문일 것이다.

 



  

위성사진에서 보는 것처럼 쉐우민의 건물배열은 중앙대로를 중심으로 펼쳐져 있다. 각종 건물이 빼곡히 들어 차 있는 느낌이어서 하나의 타운을 보는 것 같다. 건물은 비교적 새것이고 전반적으로 분위기가 깔끔하고 깨끗한 인상이다. 더구나 선원내에는 수백명이 공부하는 강원도 있어서 대학캠퍼스처럼 아카데믹한 분위기이다.

 

 





 

 

외국인이 많은 명상센터

 

안내자 미금님과 함께 선원 이곳저곳을 둘러 보았다. 이곳저곳 사진도 찍고 분위기도 파악해 보았다. 외국인이 많은 것 같다. 양곤시내 가까이 있고 더구나 교외의 숲속의 명상센터인 이유도 있을 것이다. 현재 머물고 있는 수행자들이 삼백명이 넘을 것이라 한다.

 

명상홀에 들어가 보았다. 두 개 층으로 되어 있다. 일층에는 여자수행자들이 사용하고 이층에는 남자수행자들이 사용한다. 홀에는 수행자들로 가득한 인상이다. 다른 수행센터의 적은 인원과는 대조적이다.

 

명상센터에는 사람들이 많이 보인다. 사람들이 많으니 활기가 넘치는 듯 하다. 한국인과 베트남 사람들이 각각 30명 가량된다고 한다. 세계 각지에서 온 수행자들을 모두 합하여이 80여명 된다고 한다. 외국인이 많으니 국제명상센터라는 말이 자연스럽게 느껴진다. 이와 같은 쉐우민센터는 오래 전부터 알고 있었다. 한국명상원 묘원선생이 수행했던 곳이다.

 

노팅(Noting)과 왓칭(Watching)

 

위빠사나수행과 인연을 맺은 것은 2009년의 일이다. 그때 당시 강남 논현동에 있는 한국위빠사나선원에 처음으로 다녔다. 지금은 한국명상원이라 부른다. 그때 당시 현대불교신문에 난 기사를 보고 찾아 간 것이다. 초기불교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고 나름대로 공부하던 때에 수행을 한번 해 보고 싶었던 것이다.

 

처음으로 한국명상원에 찾아 간 것은 200812 28일이다. 이를 [위빠사나 수행기1] 나도 수행을 있을까’(2018-12-28)라는 제목으로 기록을 남겼다. 인터넷 글쓰기가 3년차에 들어섰기 때문에 어디를 가든 기록을 남겼는데 이것도 좋은 글쓰기 소재였던 것이다.

 

일주일에 한번 한국명상원에 나갔다. 매주 토요일 저녁 6시부터 9시까지 3시간 가량 법문과 경행과 좌선, 인터뷰 순으로 진행되었다. 묘원선생이 지도했다. 묘원선생의 법문은 마하시사야도의 법문집 빠띳짜사뭅빠다(십이연기)’를 진도 나가는 식이었다. 아비담마 논장에 바탕을 둔 법문집을 읽기가 어려웠으나 강한 흥미를 유발했다. 이후 아비담마와 청정도론을 읽는 원동력으로 작용했다. 동시에 니까야에 대한 관심을 일으켰다.

 

2009년이 시작되면서 본격적으로 선원에 다니기 시작했다. 거의 매주 빠짐 없이 토요일이 되면 나갔다. 횟수가 50여차례 되는 것 같다. 2009 12월 말 까지 다녔다. 교재 빠띳짜사뭅빠다(십이연기) 책걸이 하는 날이 끝나는 날이 되었다. 이런 경험이 바탕이 되어 이후에는 초기불교와 관련된 글을 쓰게 되었다.

 

묘원선생은 쉐우민에서 수행했다고 한다. 미얀마에서 칠년 가량 수행했는데 주로 쉐우민에서 마음 보는 수행이라 일컬어지는 심념처에 대한 수행을 했다고 한다. 그래서일까 첫날에 노팅과 왓칭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이를 기록으로 남겼다.

 

선원에 처음 나갔을 때 기록을 보았다. 기록을 보니 마음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그대로 보라고 한다. 거기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지 말고 있는 대로 보라고 한다.”라 되어 있다. 묘원선생은 알아차린 것을 노팅(Noting)이라 하고, 노팅한 것을 보는 것에 대하여 왓칭(Watching)이라 했다. 그래서 노팅한 것을 왓칭하는 것이라 했다.

 

어느 수행처이든지 나름대로 독특한 수행방식이 있다. 같은 마하시계통이라도 하더라도 스승에 따라 차이가 난다. 쉐우민수행센터도 마하시계통이긴 하지만 마음 보는 수행처, 즉 심념처 위주의 수행센터로 알려져 있다. 그래서일까 한국명상원에 가면 쉐우민사야도의 초상화가 걸려져 있다.

 

쉐우민사야도

 

쉐우민사야도의 얼굴은 익숙하다. 깡마른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그러나 표정은 단호하면서도 근엄한 모습이다. 이런 모습을 이번 쉐우민센터 기념관에서 또 보았다. 그런데 밀랍인형으로 만들어져 있어서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쉐우민 사야도에 대하여 검색해 보았다. 법명은 우 꼬살라(U kosala)’사야도이다. 쉐우민 센터 초대원장이기 때문에 쉐우민사야도라 불리우는 것이다. 사야도는 1913년생이다. 마하시사야도의 직제자 중의 가장 연장자였다. 마하시사야도가 1904년생이니 불과 9살 밖에 차이가 나지 않는다. 쉐우민 사야도는 1951년부터 마하시사야도의 지도를 받으며 수행을 시작했다. 현재 쉐우민센터는 1997년에 세운 것이라 한다. 쉐우민사야도는 2002 89세로 입적했다. 현재 우 떼자니아 사야도가 그 뒤를 이어가고 있다.

 




한국수행자들을 만나고

 

쉐우민에서 떼자사미스님을 만났다. 현재 한국테라와다불교 서울 담마와나선원장이다. 2018 11월 담마와나선원에서 빤냐와로 테로를 계사로 하여 수계를 받은 바 있다. 그 때 받은 법명이 담마다사(Dhammadasa)’이다.  우리말로는 법의 거울이라는 뜻이다. 한자어로는 법경(法鏡)이 될 것이다. 이런 이유로 찾아 뵙게 되었다.

 

떼자사미스님은 처음부터 쉐우민과 인연을 맺었다고 한다. 빅쿠계를 받은 곳도 쉐우민이라 한다. 한번도 쉐우민을 벗어나 다른 곳에서 수행을 해 보지 않았다고 한다. 유목민처럼 수행처를 이곳저곳 옮겨 다니는 수행자들이 많은데 오로지 한 곳에서만 지속적으로 수행했다는 것은 드문 일이다.

 

떼자사미스님은 담마와나 선원 재가수행자 두 명과 함께 한달 여 일정으로 이번 1월 초에 쉐우민에 왔다. 1 2일 선원 투어하면서 쉐우민에 오게 되자 만나보지 않을 수 없었다.

 

안내자와 함께 명상홀에 들어가 보았다. 1층에는 재가수행자들이 사용하고, 2층에는 빅쿠들이 사용하는 홀이다. 2층에 올라가니 한국스님이 보였다. 떼자스님을 뵈로 왔다고 하니 알려 주었다. 수행 정진 중에 있는 스님을 부른 것이다.

 

떼자사미스님은 쉐우민사야도 기념관으로 데려 갔다. 그곳에서 안내자와 함께 셋이서 이야기 나누었다. 이야기를 나누는 도중에 안내자가 마침 지나가던 담마와나 수행자 두 명을 발견했다. 기념관으로 안내했다. 모두 다섯 명의 한국인들이 이야기를 나누었다.

 

마음 보는 수행에 대하여

 

쉐우민에서 오랫동안 수행을 한 떼자사미스님에게 이것저것 물어 보았다. 먼저 마음 보는 수행, 심념처에 대한 것이다. 이에 대하여 떼자사미 스님은 한국인들이 마음에 관심이 많기 때문에 쉐우민에 한국인들이 많이 오는 것 같습니다.”라는 취지로 말했다. 그러고 보니 한국불교에서는 예로부터 마음을 중시했던 것 같다.

 

선불교에서는 즉심시불이라 하여 마음을 중시했다. 유식에서는 일체유심조라 하여 역시 마음을 중시했다. 이처럼 마음을 중시하는 전통이 있어서일까 한국인들은 마음보는 수행으로 잘 알려진 쉐우민을 즐겨 찾는 것 같다. 그러나 떼자사미스님이 말하는 마음보는 수행은 한국인들이 막하게 생각하는 것과는 다른것이다.

 

떼자사미 스님에 따르면, 쉐우민에서는 철저하게 사념처에 기반한 마음 보는 수행을 하고 있다고 한다. 사념처 수행은 결국 마음으로 귀결된다고 했다. 알아차린 마음을 보는 것이 마음 보는 수행이라 볼 수 있다. 이에 대하여 노팅(noting)한 것을 왓칭(watching)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떼자사미스님에 따르면 마음 보는 수행이라 하여 심념처만 중시하지 않는다고 한다. 만약 누군가 쉐우민에서는 심념처만 보는 수행을 한다.’라고 말한다면 오해라는 것이다. 사념처 모두를 중시하는 수행을 하는 곳이 쉐우민이라 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마음이 마음을 보는 것일까?

 

마하시방법은 일차적으로 복부의 움직임을 기본 관찰대상으로 삼는다. 마음 보는 수행은 움직임을 관찰하는 그 마음을 보는 것이다. 마음을 본다는 것은 결국 뒤에 일어난 마음이 앞서 일어난 마음을 아는 것이라 볼 수 있다.

 

뒤에 일어난 마음이 앞서 일어난 마음을 아는 것

 

마음 보는 수행이라 하여 특별히 마음을 찾는 수행이 아니다. 마음 밖에 있는 마음을 찾는 것이 아니라 지금 흐르고 있는 마음을 있는 그대로 보고 아는 수행을 말하는 것이다. 이를 마음보는 수행이라 하고 심념처 수행이라 하는 것이다. 심념처 수행과 관련하여 묘원선생의 글을 보면 다음과 같다.

 

 

망상이 일어나는 것을 나쁜 것이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망상이 일어나는 것은 자연스럽고 당연한 것입니다. 망상을 나쁜 것이라고 생각하면 망상이 일어날 때마다 속이 상합니다. 망상도 마음이고 마음에서 일어나는 것이기 때문에 망상을 한 번 알아차리면 마음을 한 번 알아차리는 것이 됩니다. 망상하는 줄 알면 그것은 이제 알아차리고 있는 것입니다.


집에 있을 때 내가 지금 망상을 하고 있는 줄 아는 가 살펴보십시오. 고요하게 앉아서 이렇게 알아차렸을 때 내가 망상을 하고 있는 것을 알게 됩니다. 마음의 자연적인 성품을 알고자해서 수행을 하는데 내가 만약 망상이 일어나는 줄 알았다하면 그것은 알아차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냥 ‘아! 내가 망상을 하고 있구나.’하고 그것을 아는 정도로만 하면 됩니다. 그것을 계속 붙잡고 있을 것이 아니라 알기만 하고 다시 오면 됩니다. 망상이 일어난 줄 알면 다시 돌아오고, 다시 또 알면 다시 또 돌아오고 하십시오.”

 

 

묘원선생은 망상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다. 망상을 망상인줄 알게 되면 더 이상 망상을 하지 않게 된다는 것이다. 알아차린 마음을 보는 것이다. 이런 방식은 사념처 모든 방식에 적용된다.

 

뒤의 마음이 앞의 마음을 보게 되었을 때 앞의 마음은 이전 마음이 된다. 망상을 망상인줄 알았을 때 더 이상 망상을 하지 않게 될 것이다. 느낌도 지각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아는 마음을 보게 되었을 때 더 이상 이전 마음에 집착하지 않게 될 것이다. 두려움이 일어났을 때 두려움이 일어난 마음을 본다면 두려움은 이전 마음이 되어 더 이상 두렵지 않게 된다. 대상으로 인하여 아는 마음을 보는 것이 마음을 보는 수행이라 볼 수 있다.

 

쉐우민은 자유롭다고 하는데

 

흔히 말하기를 쉐우민은 자유롭다고 한다. 이처럼 쉐우민이 프리(free)’한 수행풍토를 가진 것은 아마도 마음의 속성과도 관련이 있을 것이다. 마음은 자유로운 것이고 특별히 규정할 수 없는 것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마음이 마음을 본다라고 했을 때 이는 심법(心法)에 대한 것이다. 그런데 이와 같은 심법은 교학적으로 규정 되어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현재 쉐우민에서는 인터뷰가 없다고 한다. 이는 마음을 보는 심법에 대하여 인터뷰 하는 것이 쉽지 않음을 말한다. 그런데 우 떼자니야 사야도가 인터뷰할 때 마음에 대하여 이야기하면 교학과 맞아 떨어지는 면이 있다는 것이다. 마음이 마음을 보는 심법이 교학에 보이지 않지만, 마음을 보는 수행을 하면 교학적으로 규정되어 있는 사념처수행과 일치한다는 것이다.

 

어느 수행처이든지 특징이 있다. 어느 수행센터는 수행환경은 좋지만 매우 엄격하다. 요즘 말로 빡센것이다. 어느 수행처는 수행환경도 좋고 자유로운 분위기도 있다. 이는 수행처마다 특징이 다르기 때문이다. 그런데 수행자들의 기질에 따라 수행처도 다르다는 사실이다. 쉐우민이 자유로운 분위기라 하는데 이는 수행처의 특징에 따른 것이라 볼 수 있다.

 





수행자의 기질에 따라 수행처도

 

흔히 유유상종이라 한다. 끼리끼리 어울린다는 것이다. 서로 기질이 맞는 사람들끼리 모이는 것이다. 이는 초기경전에서도 볼 수 있다. 어느 날 부처님이 수행승들이 무리를 지어 다니는 모습을 보았다. 이는 부처님이“수행승들이여, 그대들은 싸리뿟따가 많은 수행승들과 함께 거니는 것을 보았는가?(S14.15) 라며 물어 보았다. 부처님은 왜 이런 말씀을 했을까? 이어지는 말씀을 보면 알 수 있다. 부처님은 “수행승들이여, 그 모든 수행승들은 위대한 지혜를 지닌 자들이다. (S14.15)라 한 것에서 알 수 있다. 법의 장군 또는 지혜제일이라 알려져 있는 사리뿟따 존자 주변에는 지혜로운 수행승들이 자연스럽게 몰려 다닌 것이다.

 

신통제일 목갈라나 존자의 경우는 신통을 가진 자들이 주변에 몰려 들었고, 두타제일 깟싸빠 존자의 주변에는 두타행을 듣고자 하는 수행승들이 몰려 들었다. 반면 악행의 대명사 데바닷따 주변에는 사악한 욕망을 가진 수행승들이 몰려 다녔다. 부처님은 이런 현상을 보고서 수행승들이여, 뭇삶들은 세계에 따라 관계를 맺고 어울린다. 저열한 경향을 가진 자들은 저열한 경향을 가진 자들과 관계를 맺고 그들과 어울린다. 탁월한 경향을 가진 자들은 탁월한 경향을 가진 자들과 관계를 맺고 그들과 어울린다.(S14.4)라고 말씀했다. 수행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수행자의 기질에 따라 수행방법도 다르다. 청정도론에 따르면 여섯 가지로 분류하고 있다. 그래서 탐욕적 성향, 분노적 성향, 우치적 성향, 신앙적 성향, 지성적 성향, 사유적 성형이 있다.”(Vism.3.74)고 했다. 이와 같은 여섯 가지 요소를 고려하여 명상주제를 결정하는 것이다.

 

기질에 따라 명상주제를 정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것이다. 이는 우다나와 앙굿따라니까야에 실려 있는 메기야의 경에서도 알 수 있다. 아무리 수행환경이 좋아도 기질을 고려하지 않으면 실패 할 수 있음을 말한다. 그래서 부처님은 탐욕의 제거를 위해서는 부정을 닦아야 한다.”(Ud.34, A9.3)라 했는데, 이는 탐욕적 성향을 가진 자에게 해당된다. 분노적 성향에게는 자애를 닦아야 하고, 사유적 성향은 호흡에 대한 새김(ānāpānasati)’을 닦아야 하고, 자만을 제거하려면 무상에 대한 지각을 닦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 밖에도 청정도론에서는 지성적 기질을 가진 자는 죽음에 대한 새김(maraasati)’을 닦아야 한다고 했다.

 

기질에 따라 명상주제를 정하는 것 못지 않게 수행처를 정하는 것도 중요한 요인이다. 자신의 기질에 맞는 수행처를 정하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어느 수행처가 좋은지는 전적으로 자신에게 달려 있다. 수행자의 기질에 따라 수행처도 달라질 수 있다. 자신의 기질에 맞는, 자신의 성향에 맞는, 자신의 근기에 맞는 수행처가 최상의 수행센터라 볼 수 있다.

 

 

2019-02-17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