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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그때 거기에 있었더라면, 5.18 다큐영화 김군 특별상영회

담마다사 이병욱 2019. 7. 14. 11:34

 

내가 그때 거기에 있었더라면, 5.18 다큐영화 김군 특별상영회

 

 

과거에도 그랬고 현재도 그렇고 미래도 그럴 것입니다.” 이 말은 지선스님이 한 말이다. 김동수열사 추모제 때 한 말이다. 행동하지 않는 지식인, 실천하지 않는 지식인에 대한 비판적 말이다.

 

지선스님은 추모사에서 어쩌면 역사를 이끌어 가는 것은 지식인이 아니라 이름 없는 민중일지 모릅니다.”라는 취지로 말했다. 참여하지 않고 말로만 이론으로만 떠드는 지식인이 아니라, 직접 참여하여 행동으로 보여 주는 이름 없는 민중들의 힘에 의해서 역사가 발전적으로 견인 되어 왔음을 말한 이다. 1980 5월 광주에서 있었던 민중항쟁이 이를 잘 말해 준다.

 

이름없는 한 시민군에 대한 이야기

 

영화를 보았다. 영화제목은 김군이다. 오월 그 해 광주에서 일어났던 일에 대한 기록영화이다. 어느 이름없는 한 시민군에 대한 이야기이다. 사진을 보면 당당하다. 가스차 위에는 커다란 기관총이 거치 되어 있다. 더구나 굵은 실탄다발이 장전되어 있다. 투구를 쓴 시민군은 마치 이건 뭐야?”라는 듯이 째려 보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대체 그 사람은 누구이고 이후 어떻게 되었을까?

 



 

영화에 초대받았다. 2019 5 26일 조선대 교정에서 열린 김동수 열사 39주년 추모제에 참석했었는데 그 때 김군이라는 영화를 처음 들었다. 5.18 이후에 태어난 젊은 감독 강상우 감독이 만든 것이다. 무려 5년 걸렸다고 한다. 2014년부터 만들었는데 4년 동안 찾는 작업하고 1년 동안 편집했다고 한다. 진모영 감독측에서는 서울에서 시사회가 열릴 때 초대하겠다고 했다.

 

이화여대 아트하우스 모모에서

 

2019 7 13일 이화여대 아트하우스 모모에서 김군 시사회가 열렸다. 웹자보에는 ‘5.18 다큐멘타리 영화 김군 특별상영회라고 되어 있다. 정평불회원들과 함께 보기로 했다.

 



 

뜨거운 햇살이 사정 없이 내리 쪼이는 이화여대 교정에 섰다. 생전 처음 가 보았다. 언제나 그렇듯이 대학캠퍼스는 활력이 있다. 이십대 청춘들이 많아서일 것이다. 대학에 있으면 오로지 젊음만 있고 즐거움만 있는 것처럼 보인다. 병원에 가면 아픈 사람만 있고 요양원에 가면 절망적인 사람들만 있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오랜만에 캠퍼스에 서니 기분이 고양되는 것 같았다.

 

상영관은 지하에 있다. 도저히 이런 곳에 있을 것 같지 않은 구조에 있는 것이다. 커다란 언덕배기 산을 두 조각으로 갈라 놓았다. 크고 넓은 통로 양 옆에는 지하시설이 들어차 있다. 지하공간에 영화관이 있는 것이다.

 

 



상영관 입구에는 아는 사람들이 있었다. 5월 달 추모제에 참석했던 대불련 사람들이 눈에 띄었다. 정평불회원들도 하나 둘 나타나기 시작했다. 진모영감독이 좌석표를 주기 위해 첵크했다. 자리가 한정되어 있기 때문에 사전에 명단을 주었다. 이른바 노쇼(No-Show)’를 막기 위해서일 것이다. 이름을 걸었기 때문에 나타나지 않는다면 예의 없는 사람이 될 것이다. 무료 입장이다.

 

 



영화관은 오랜만이다. 영화관에서 영화 볼 일이 없었기 때문에 이삼십년 된 것 같다. 중고등학교 시절 대한극장과 같은 큰 영화관이 아니다. 그렇다고 앞사람 머리만 보이는 삼류극장도 아니다. 경사가 급하게 져서 앞사람 머리만 보일 염려는 전혀 없다. 화면은 크고 소리는 박력있다. 오랜만에 영화관에 앉았다.

 



 

다큐멘타리에서도 반전이

 

영화는 2시부터 시작되었다. 영화가 3시 반 정도에 끝났으니 약 1시간 반가량 분량이다. 화면이 커서일까 영화에 몰입되었다. 전혀 지루하지 않았다. 금방 끝난 것 같은 느낌이다. 아무래도 공감해서일 것이다. 그것은 다름 아닌 우리들의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 공개할 수 없다.

 

스포일러(Spoiler)라는 말이 있다. 영어 스포일(spoil)이라는 말은 망치다’ ‘상하다’ ‘버릇없는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영화나 소설, 애니메이션 등의 주요 줄거리나 내용을 관객 또는 독자, 네티즌 등에게 미리 알려 주는 정보를 말한다. 이런 행위는 비난 받는다. 특히 영화는 극적 반전의 묘미가 있는데 미리 알려 주면 흥을 깰 수 있다. 이런 이유로 영화에 대한 평을 할 때에는 반전에 대한 것을 알려 주지 않는다.

 

독립영화이자 다큐멘타리 영화인 김군 역시 반전이 있었다. 그것도 극적인 반전이다. 극영화가 아닌 다큐멘타리에서도 반전이 있을 수 있음을 알게 해 주는 것 같다. 지만원이 지목한 제1광수가 무산되는 순간이라고 볼 수 있다.

 




1980년 오월 서울의 봄에

 

영화를 보면서 내내 우리들의 이야기또는 나의 이야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은 동시대를 살고 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나이가 비슷하다. 인터뷰에 응한 사람들을 보면 80년 오월 당시 스무살, 스물한살, 스물두살 또는 열아홉살, 열여덟살 이었기 때문이다. 스무살 안팍의 청년들 이야기이다.

 

1980년 오월 그때 대학교 2학년이었다. 그때 캠퍼스는 이전 해와는 완전히 다른 세상이 되었다. 온갖 대자보가 붙고 최루탄이 난무했다. 아무것도 몰랐던 순진한 학생은 대자보를 보고 학습되어 갔다. 그리고 대열에 동참했다.

 

정문돌파 하는데 앞장섰다. 남학생이 거의 대부분인 공대를 가장 앞에 세운 것이다. 어찌하다 보니 앞에서 세번째 열에 서게 되었다. 스크럼을 짜고 정문 돌파를 시도했다. 그러나 페퍼포그차에서 나오는 최루탄이 발사 되자 모두 흩어졌다.

 

눈이 보이지 않고 숨을 못 쉴 정도가 되었다. 너무 고통스러워서 정문 밖에 있는 아무 집이나 들어가 물로 씻어내었다. 그 일로 인하여 얼굴에 화상을 입었다. 보름 가량 지나자 껍질이 벗겨지듯이 피부가 벗겨졌다.

 

한사람의 죽음으로 인하여 세상이 바뀌었다. 79 10.26이 났을 때 변화가 있었다. 국민윤리 시간에 교수의 논조가 바뀐 것이다. 이전에는 포이에르 바하등 철학 이야기만 했으나 10.26이 딱 터지자 갑자기 정부에 대한 비판적인 말을 하는 것이었다. 이런 변화에 어리둥절 했다. 긴급조치 9호시대에 숨죽이며 살던 교수가 할 말을 한 것이다.

 

80년 신학기가 시작되자 캠퍼스는 어수선했다. 교련시간에 집단퇴장 하는 일도 발생했다. 어느 학생이 앞에 나와 지금 정문에서는 학우들이 외치고 있는데 이렇게 한가하게 교련이나 받고 앉아 있을 수 있습니까?”라며 선동했다. 그러자 수백명 중에 반은 교련복을 입은 채로 스크럼을 짜고 정문으로 갔다. 대위 계급장을 단 교관은 이런 광경을 멍하니 바라만 보고 있었다. 처음에는 말렸으나 먹혀 들어가지 않자 망연자실하는 모습이었다. 마치 울먹이듯이 나중에 후회할 겁니다. 언젠가 진실은 밝혀질 겁니다.”라는 취지로 말했다.

 

무엇이든지 처음이 어렵다. 한번 하고 나면 그 다음부터는 쉽다. 스크럼 짜고 최루탄 가스를 한번 마셔 보자 그 다음부터는 매번 참가하게 되었다. 마침내 학교 후문 담장을 무너뜨리고 상도동 쪽으로 진출했다. 영등포로타리에 이르니 다른 학교 학생들이 밀려왔다. 마치 동지를 만난듯이 서로 환호했다.

 

세력이 엄청나게 불어난 학생들은 여의도광장을 지나 원효대교를 건넜다. 서소문을 지나 마침내 서울시청앞에 이르렀다. 시청 앞에는 학생들로 가득했다. 이런 기세라면 무너뜨릴 것 같았다. 조금만 밀어 붙이면 4.19처럼 학생혁명이 완수될 것 같았다. 그러나 세종로를 넘지 못했다.

 

시청을 지나 서울역 앞으로 모였다. 늦은 오후가 되자 소문이 퍼졌다. 효창운동장에 공수부대가 집결했다는 것이다. 전혀 다른 상황에 직면한 것이다. 부딪치면 죽을 것 같았다. 모두 흩어지는 분위기였다. 그것으로 서울의 봄은 끝이었다.

 

광주에서는 전혀 다른 상황이 전개 되었다. 매스컴을 통해서 안 것이다. 광주소요사태라고 했다. 폭도들이라고도 했다. 그때 마침 군대에서 휴가 나온 고종사촌형이 있었다. 광주출신인 형은 내가 저기에 있었다면 총을 들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휴교령이 내렸다. 답답한 마음에 종로2가 학원가에 가 보고자 했다. 버스에서 하나의 장면을 목격했다. 종로5가 기독교 방송국 앞에서 한청년이 쓰러져 있었다. 등을 보이고 널부러져 있었다. 핏자국이 바닥에 있었다. 총에 맞은 것 같았다. 방송국 현관 앞에는 공수부대원 두 명이 집총 자세로 경계를 서고 있었다. 아무도 수습하는 사람이 없었다. 뉴스에도 나오지 않았다. 그 청년은 왜 죽은 듯이 엎어져 있었을까? 그는 살았을까 죽었을까? 지금도 풀리지 않는 의문이다.

 

민주화운동이라기 보다는 민중항쟁

 

광주에서 일어났던 엄청난 사건은 복학한 후에 본격적으로 거론 되었다. 아무도 이야기하지 않던 광주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한 것이다. 비참한 모습의 사진전도 열렸다. 광주와 관련된 노래도 나오기 시작했다. 그러나 학교를 졸업하고 잊고 지냈다.

 

그동안 광주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매스컴에서 들은 것이 대부분이다. 시대에 따라 평가도 달라졌다. 초기에는 폭동이었다. 나중에는 민주화운동으로 바뀌었다. 그에 따라 폭도들은 민주화유공자로 바뀌었다. 그러나 사람들은 여전히 광주에서 일어난 소요사태 정도로 인식하고 있는 것 같다. 의미를 잘 모르는 것이다.

 

이번에 김동수열사 추모제에 참석하고 난 다음 왜 민주화운동인지 그 의미를 확실히 알게 되었다. 그러나 최근 영화를 보니 민주화운동이라는 말보다는 민중항쟁이라는 말이 더 와 닿았다. 민주화운동이라고 하면 지식인을 연상케 한다. 그러나 지식인들 보다는 민중들의 역할이 더 컸다. 그것은 이름 없는 사람들이 주인공이었기 때문이다.

 

2017년 광화문촛불로 인하여 세상이 바뀌었다. 가장 극적인 변화는 정치인들이다. 여당이 야당되고 여당이 야당된 것이다. 정반대로 정치환경이 바뀐 것을 보고서 세상이 바뀐 것을 실감한다. 그런데 광화문촛불도 광주가 없었으면 가능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산 자들이 부채의식 때문에 나온 것이다. 그리고 잃었던 것을 되찾아 온 것이다. 도청을 순순히 내 주지 않고 결사항전 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그 자리에 있었더라면 어땠을까?

 

이런 생각을 해 본다.  그것은그때 당시에 내가 그 자리에 있었더라면 어땠을까?”라는 생각이다. 아마 분위기에 편승했을 것이다. 그러나 도청에는 들어가지 않았을 것이다. 죽는 줄 뻔히 알기 때문이다. 실제로 그랬다. 사회에서 만난 친구 K가 그랬다.

 

K는 김동수열사와 같은 학번 같은 학과라고 했다. K나이가 한두살 많지만 친구처럼 지낸다. K에게 들은 광주이야기는 매우 생생했다. 매스컴에서는 접할 수 없는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K는 구호대로 활약했다. 부상자를 실어 나르는 역할을 했다고 한다. 총에 맞은 사람들이다.

 

총에 맞으면 어떨까? 힘이 쭉 빠진다고 한다. 영화나 드라마를 보면 총에 맞고서도 초인적인 힘을 발휘하는 장면을 볼 수 있다. 그러나 한방 맞으면 맥이 풀리듯이 아무런 힘도 쓸 수 없다고 한다. 누군가 부축하거나 도와 주지 않으면 혼자 힘으로 움직일 수 없음을 말한다.

 

K는 도청에 들어가지 않았다. 이유는 한가지이다. 살고자 했기 때문이다. 엄마가 슬퍼할 것 같아서 도저히 들어갈 수 없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도청에 들어간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일까? 또 총을 든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이었을까? 대부분 나이가 스물안팍의 청년들이라는 사실이다. 그것도 사회적 지위가 낮은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영화 김군은 지위가 낮은 사람들이야기이다. 인터뷰 장면을 보면 지식인은 한 사람도 보이지 않는다. 지위가 높고 학벌이 좋은 사람은 없다. 대신 가난하고 천대받던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그때 당시 총을 들었던 사람들 상당수가 넝마주이와 같은 사회적 지위가 낮은 사람들이 많았다.

 

지식인들은 참여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 일반사람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특히 죽음을 앞둔 것이라면 더욱 더 기피할 것이다. 부모가 슬퍼할 까 참여하지 못하고, 처자식이 있어서 실행에 옮기지 못하는 것이다. 체면 때문에 지위 때문에 나서지 못하기도 한다. 그러나 부모도 없고 형제도 없고 지위와 체면도 없다면 이야기가 다르다.

 

총을 든 사람들 상당수는 스무살 안팍의 사회적 지위가 낮은 청년들이었다. 가진 것이 없기에 총을 든 것인지 모른다. 그러나 많이 가진 자들일수록 몸을 사린다. 내가 그 상황에 처해 있었더라면 아마도 K와 같은 행보를 보였을 것이다.

 

그때가 좋았어요. 그냥 좋았어요

 

영화에서 김군의 모습은 당당했다. 가스차에 올라탄 모습이 마치 장군과 같은 모습이다. 굵은 실탄이 장전된 커다란 기관총을 앞에 두고 투구 쓴 모습이 말에 탄 장군을 연상케 한다. 그러나 알고 보면 최하층 사람이다. 마치 불가촉천민처럼 아무도 쳐다 보지 않을 사람이다.

 

김군은 출신성분이 너무 형편없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떠 받들어 주었다. 그래서일까 시민군으로 활약했던 사람들의 증언을 들어 보면 그때가 좋았어요.”라고 말했다. 왜 좋았을까? 그것은 대우 받았기 때문이다. 시민들이 물도 떠 주고 주먹밥도 주고 닭죽도 주는 등 시민들의 지지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냥 좋았어요.”라고 말한다.

 

우리도 한번 애국합시다.”

 

스무살 안팍의 청년들이 총을 들었다. 그렇다고 하여 총을 쏴서 계엄군을 죽였다는 이야기를 들어 보지 못했다. 자위권 차원에서 총을 든 것이다. 중무장한 공수부대가 기관총 등으로 난사했을 때 무장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대체로 사회적 지위가 낮은 스무살 안팍의 젊은 이들은 역사의식이나 정의감이 있어서 총을 든 것일까?

 

정의란 무엇일까? 지식인이 지은 책을 보면 정의에 대하여 매우 상세하게 설명해 놓았다. 그러나 80년 오월 당시 시민들에게 있어서 정의는 다른 것이었다. 눈앞에서 사람이 죽어 나가는 것을 보고서 눈이 뒤집혔다. 역사의식이나 정의감 때문에 총을 든 것이 아니라 이유 없이 당한 것에 대한 반발심리에 따른 것이다. 그런데 총을 든 상당수 사람들이 넝마주이 등 사회적으로 대접을 받지 못했던 사람들이라는 사실이다.

 

흔히 애국한다고 말한다. 철책선을 지키는 것도 애국이고 수출을 많이 해서 달러를 버는 것도 애국이다. 세금을 많이 내는 것도 애국이고 자신이 해야 할 일을 다하는 것도 애국일 것이다. 그렇다면 애국은 능력 있는 자들만 하는 것일까?

 

80 5월 광주사람들도 애국했다. 불의의 세력에 맞서 싸운 것이다. 그런데 총을든 시민군들을 보면 지식인들 보다는 지위가 낮은 젊은이들이 더 많았다는 사실이다. 그래서일까 어느 시민군은 우리도 한번 애국합시다.”라는 마음으로 총을 들었다고 한다.

 

누구나 나라사랑 하는 마음이 있다. 애국에 있어서 보수와 진보에 차별이 있을 수 없다. 다만 가치관이 다를 뿐이다. 나라 잘 되자고 하는 일에 귀천이 있을 수 없다. 부자나 가난한자나, 귀한자나 천한자나 나라가 잘 되기를 바란다. 80 5월 광주에서 시민들이 애국하는 마음으로 총을 들었던 것이다.

 

짧고 굵게 산다는 것

 

세월이 많이 흘렀다. 80 5월 스무살 안팍이었던 사람들은 39년이 지난 현재 육십안팍이 되었다. 그런데 현장에 있었던 사람들은 기억이 생생하다는 것이다. 너무 생생해서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없을 정도라고 한다. 죽지 못해서 사는 사람도 많다고 한다.

 

흔히 살아 남는 것이 가장 큰 승리라고 말한다. 난세에 어떻게 해서든지 살아 남으면 좋은 시절을 맛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로 본다면 희생자들은 매우 억울하다. 하필 그 자리에 있어서 죽은 것이다. 이에 대하여 그 친구에게 물어 보았다. 그랬더니 죽은 놈만 불쌍하지.”라고 말했다.

 

죽은 사람은 다 불쌍하다. 특히 젊어서 죽은 사람이 불쌍하다. 그것도 억울하게 죽었다면 더욱더 불쌍하다. K는 그런 의미에서 말 했을 것이다. 그런데 산 자들 또한 불쌍하기는 마찬가지라는 사실이다. 이 세상 살다 보면 즐거운 날 보다 괴로운 날이 더 많기 때문이다. 이렇게 본다면 짧고 굵게사는 것은 그다지 불쌍한 것이 아닌 것 같다.

 

누구나 한번 죽는다. 두 번 죽는 사람은 없다. 그럼에도 이미 죽은 사람이 있다. 파산하면 경제적으로는 죽은 자이다. 자신의 이름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게으른 자도 이미 죽은 자이다. 향상과 성장이 없는 삶은 살아도 죽은 자와 같다. 그러나 짧고 굵게 사는 사람이 있다. 도를 이루면 오늘 죽어도 좋다고 했다. 그래서 이런 말이 있다.

 

 

게으르고 정진 없이

백 년을 사는 것보다

정진하고 견고하게 노력하며

하루를 사는 것이 낫다.”(Dhp.112)

 

생겨나고 사라지는 것을 보지 못하고

백 년을 사는 것보다

생겨나고 사라지는 것을 보면서

하루를 사는 것이 낫다.” (Dhp.113)

 

불사의 진리를 보지 못하고

백 년을 사는 것보다

불사의 진리를 보면서

하루를 사는 것이 낫다.” (Dhp.114)

 

최상의 원리를 보지 못하고

백 년을 사는 것보다

최상의 원리를 보면서

하루를 사는 것이 낫다.” (Dhp.115)

 

 

오늘 도를 이루면 이후 삶은 거저 사는 것이나 다름 없다. 오늘 죽으나 내일 죽으나 십년, 이십년, 삼십년 후에 죽으나 죽기는 마찬가지이다. 죽어도 죽지 않기 때문이다. 자아관념이 타파된 무아의 성자에게 애초부터 죽음은 시설되지 않는다. 그래서 불사(不死: amata)라고 한다.

 

불사이면 불생(不生)이다. 오늘 죽으나 내일 죽으나 언제 죽으나 죽음은 없다. 그러나 육체를 가진 보통사람들은 늙고 병들어 죽는다. 육체의 죽음에 따라 진짜 죽는 것이다. 그리고 새로운 존재로 재생하게 된다. 이처럼 죽을 줄 알면서도 오래 살고자 한다. 그것도 즐기며 살고자 하는 것이다.

 

어느 시대 어느 곳에서나 최대축원은 장수축원이다. 그런데 불교에서 장수축원을 해 주는 이유가 있다. 단지 오래오래 건강하게 행복하게 잘 사는 것 뿐만 아니라 공덕을 지으며 살라는 것이다. 오래 살면 공덕지을 기회가 더 많고 더욱더 공덕이 쌓일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부분 아무런 공덕 짓지 않고 단지 즐기며 오래 살려고 한다. 길고 가늘게 사는 것이다.

 

영화와 함께 영원히

 

스무살 안팍의 청년들이 많이 죽었다. 대부분 지위가 낮은 사람들이다. 그 중에는 투구를 쓰고 기관총 앞에 당당하게 앉아 있는 김군도 있었다. 최하층 사람이 시민들의 지지로 장군처럼 있었던 것이다.

 

역사는 기록하는 자의 것이라고 한다. 기록하지 않으면 아무도 기억해 주지 않는다. 5.18은 임진왜란만큼이나 오래 전에 있었던 일은 아니다. 5.18을 체험한 사람이나 동시대를 살았던 사람은 기억하고 있다. 그러나 5.18 이후에 태어난 사람들은 5.18이 마치 임진왜란만큼이나 오래 전에 있었던 일로 기억한다. 영화를 만든 감독도 그랬다고 한다. 젊은 감독은 5년 걸려 기록물을 남겼다.

 




젊은 감독은 지만원에게 크게 한방 먹였다. 가스차 위의 김군은 제1광수가 아니었던 것이다. 김군은 지식인도 아니었다. 이 땅에서 가장 천대 받던 출신이었다. 그는 영화와 함께 영원히 살아 있다.

 

 

 

2019-07-14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