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것이 서로와 서로의 인연으로 모두 다 이루어져 있다.”뮤지컬 싯다르타
우리금융아트홀은 어디에 있을까? 한참 헤맸다. 너른 올림픽공원 이곳저곳 기웃거리다가 입간판을 보고서 간신히 찾았다. 공연시간 20분 전이었다.
2019년 9월 6일 금요일 오후 올림픽공원으로 향했다. 안양 비산사거리에서 출발 했는데 1시간 20분 예상했다. 그러나 실제로 2시간 걸렸다. 참으로 어려운 길이었다. 처음 가본 길이기 때문일 것이다.
비산사거리에서 1650번 시외버스를 타고 서울외곽순환고속도로를 경유하여 복정역에서 내렸다. 복정역에서 신분당선을 타고 가락시장역에서 내렸다. 올림픽공원이 코 앞임에도 지하철을 두 번 갈아탔다. 그러나 이것이 끝이 아니었다. 올림픽공원역에서 공연이 열리는 우리금융아트홀까지 십여분 걸어가야 했기 때문이다. 천신만고 끝에 목적지에 도착했다.
천리 먼 길을 마다하지 않고
왜 이렇게 먼 곳까지 기를 쓰고 왔을까? 그것은 마치 슈퍼개미와 같은 한 사람의 영향이 크다. 불교서적을 출판하고 있는 민족사에서 주간을 맡고 있는 사기순 선생으로 인한 것이다. 사선생은 뮤지컬 싯다르타 홍보대사를 맡고 있다. 사선생의 활약으로 수 많은 사람들이 공연장에 왔다. 그 중에 한 사람은 전남 광주에서 왔다. 송문식 선생은 장성한 아들 둘과 함께 왔다.
로비에서 반가운 얼굴들을 만났다. 정평불회원들이다. 그 중에 김재상 선생은 멀리 남해에서 왔다. 지난 8월 17일과 18일에 있었던 정평불수련회와 인연 때문이라고 했다. 한번 맺은 인연을 소중하게 여기는 것 같다. 가요 중에 ‘진주라 천리길’이라는 말이 있다. 김선생은 공연도 볼 겸 회원얼굴도 보기 위하여 천리 먼 길을 마다하지 않고 달려 온 것이다.
시간이 되어서 입장했다. 공연시간은 저녁 8시부터 10시 20분까지이다. 도중에 휴식시간이 20분 있었다. 공연장은 3층 구조로 되어 있다. 로열석이라고 불리우는 2층에 자리 잡았다. 티켓값이 부담스러울 정도이지만 단체할인 받아서 들어 갔다. 이렇게 공연장에 들어 간 것은 처음 있는 일이다.
공연이 열린 날은 두 번째 날이다. 첫날 공연 때는 종단에서 대거 참석했다고 교계뉴스에서 전했다. 조계종 총무원장 스님을 비롯하여 스님들과 신도 등 종단과 관련된 사람들이 참석하여 거의 만석이 되었다고 한다. 첫날 공연에 참석한 이가 카톡방에다가 짤막한 소감문을 올렸다. 글을 보면“중간에 스포트라이트가 관객석을 비출 때 스님들 덕택에 눈이 부셨습니다.”라고 글을 남겼다. 스님들이 많이 참석했음을 알 수 있다.
두 번째 공연날인 9월 6일 공연장에는 동국대와 관련된 사람들이 참석했다. 동국대 총장을 비롯하여 동국대 교직원과 학생, 그리고 동국대 동문들이 대거 참석했다. 그래서일까 동국대 총장과 동문회장이 인사말을 했다. 이렇게 본다면 첫날은 종단과 관련된 사람들이고, 둘째날은 동국대와 관련된 사람들이다.
첫날 공연 때는 만석이라고 했다. 그러나 둘째날은 빈 자리가 많았다. 반 정도 찬 것 같다. 공연은 9월 5일부터 9월 29일까지 9월 한달 동안 열린다. 과연 뮤지컬 싯다르타는 흥행에 성공할 수 있을까?
“나는 그 길을 찾아서 떠난다.”
뮤지컬 싯다르타는 부처님 일대기에 대한 것이다. 특히 부처님이 출가하여 고행을 한 다음 깨달음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에 대한 것이다. 부처님 일대기 중에서도 가장 극적인 요소를 갖추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뮤지컬에서는 깨달음에 포커스를 맞추고 있다. 부처님이 깨닫는 순간이 뮤지컬의 절정이다. 그러나 재미도 있어야 한다. 눈요기 할 것도 필요한 것이다. 그래서일까 뮤지컬 초반부를 보면 싯다르타가 왕비를 선택하는 장면이 있다. 인도풍의 화려한 의상을 입은 왕비후보 5명이 등장하여 춤을 추는 연회장면이다.
찬나에 대한 이야기도 빼 놓을 수 없다. 찬나는 부처님 마부이다. 뮤지컬에서는 몸종 같은 역할을 하고 있는데 코믹하고 때로 우스꽝스럽다. 그래서일까 공연이 끝나고 인사로 소개하는 시간이 있었는데 박수를 가장 많이 받았다. 그런 찬나는 초기경전에 따르면 말썽꾸러기이자 문제아였다.
찬나는 부처님 유성출가를 도와 주었다는 자부심 하나로 살았다. 그래서인지 부처님 상수제자인 사리뿟따와 목갈라나마저 무시하기 일쑤였다. 일종의 열등감에 따른 자만심의 표현이라고 볼 수 있다. 이처럼 화합을 못하는 찬나에 대하여 부처님은 열반에 드실때 브라흐마단다(梵罰)라는 엄벌을 내렸다. 아무도 말 걸게 하지도 말고 아무 말도 받아 주지 않는 일종의 왕따라고 볼 수 있다. 지혜가 부족했던 찬나는 부처님 열반후에 자신의 자만을 내려 놓고 정진하여 아라한이 되었다.
싯다르타는 결국 출가했다. 풀리지 않는 의문을 해소하기 위해서였다. 그것은 다름 아닌 생, 노, 병, 사에 대한 것이다. 이것을 해결 하지 않고서는 삶의 의미가 없었을 것이다. 이것은 다름 아닌 괴로움(dukkha)이다. 뮤지컬에서는 ‘고통’이라고 말했다. 싯다르타는 괴로움을 해결하기 위해 출가한 것이다. 그래서 “나는 그 길을 찾아서 떠난다.”라며 노래했다. 1부가 끝난 것이다.
악마는 누구인가?
1부가 출가이전에 대한 것이라면 2부는 출가이후 깨달음을 이룰 때까지에 대한 것이다. 특히 고행에 대한 이야기이다. 싯다르타가 6년 고행 하면서 마라 빠삐만과의 대화가 대부분을 차지한다.
뮤지컬에서는 마라 빠삐만에 대하여 ‘파피야스’라고 했다. 한자어로는 마라파순(魔羅波旬)이라고 한다. 뮤지컬에서는 육욕천에 사는 마왕으로 나온다.
악마를 뜻하는 마라(mara)라는 말은 여러 가지 의미가 있다. 분류하면 (1) 신으로서의 마라(devaputta-māra), (2) 번뇌로서의 마라(kilesa-māra), (3) 오온으로서의 마라(khandha-māra), (4) 업으로서의 마라(kamma-māra), (5) 죽음으로서의 마라(maccu-māra) 이렇게 다섯 가지가 있다.
다섯 종류의 악마를 보면 나 자신이 악마임을 알 수 있다. 왜 나 자신이 악마일까? 그것은 번뇌하기 때문에 번뇌로서의 악마이다. 또 몸과 마음을 나의 것으로 여기기 때문에 오온으로서 악마이다.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나는 업생이기 때문에 나는 업으로서의 악마이다.
“그대는 그대가 아니다.”
악마는 사악한 존재이다. 뮤지컬에서 보는 육욕천 마왕은 변신에 능하다. 자유자재로 몸을 바꾸어 수행자 또는 빔비사라왕으로 나타난다. 이에 싯다르타는 “그대는 그대가 아니다.”라고 말한다. 이 말을 들으니 금강경에서 말하는 “A는 A가 아니고 그 이름이 A일 뿐이다.”라는 정형구가 생각났다.
뮤지컬에서 “그는 그대가 아니다.”라는 말은 매우 심오하다. 이 말은 오온이 내것이 아니라는 말과 같다. 몸과 마음을 내 것으로 본다면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없다.
오로지 얼굴 하나만 바라보고 사는 사람에게 흉터라도 생긴다면 무척 괴로워할 것이다. 얼굴을 자신과 동일시 하기 때문이다. 누군가에게 무시당해서 분노한다면 역시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없다. 분노를 자아와 동일시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이것은 나의 것이 아니고, 이것은 내가 아니고, 이것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라고 있는 그대로 올바른 지혜로 관찰하라고 했다. 오온에 대하여 내 것이라고 여기지 말라는 것이다.
불퇴전의 결연한 의지를
마왕은 갖가지 방법으로 유혹한다. 이런 장면은 초기경전 도처에서 볼 수 있다. 싯다르타가 네란자라 강 기슭에서 정진하고 있을 때였다. 그때 악마가 나타나서 “당신은 야위었고 안색이 나쁩니다. 당신은 죽음에 임박했습니다.”(Stn.426)라며 위로하며 쓸데 없이 목숨을 건 노력이 헛된 것임을 말했다. 이에 싯다르타는 “이러한 정진에서 오는 바람은 흐르는 강물조차 마르게 할 것이다. 스스로 노력을 기울이는 나에게 피가 어찌 마르지 않겠는가!”(Stn.443)라고 말하며 다음과 같이 불퇴전의 의지를 말했다.
“몸의 피가 마르면,
쓸개도 가래침도 마르리라.
살이 빠지면, 마음은 더욱 더 맑아지고
나는 새김과 지혜, 그리고 집중에 든다.”(Stn.434)
“나는 이와 같이 지내며 최상의 느낌을 누리니,
내 마음에는 감각적 쾌락에 대한 기대가 없다.
보라, 존재의 청정함을!” (Stn.435)
“그대의 첫 번째 군대는 욕망,
두 번째 군대는 혐오라 불리고,
그대의 세 번째 군대는 기갈,
네 번째 군대는 갈애라 불린다.” (Stn.436)
“그대의 다섯째 군대는 권태와 수면,
여섯째 군대는 공포라 불리고,
그대의 일곱째 군대는 의혹,
여덟째 군대는 위선과 고집이라 불린다.” (Stn.437)
“잘못 얻어진 이득과 명예와 칭송과 명성,
그리고 자기를 칭찬하고 타인을 경멸하는 것도 있다.” (Stn.438)
“나무치여, 이것들은 그대의 군대,
검은 악마의 공격군인 것이다.
비겁한 자는 그를 이겨낼 수가 없으나
영웅은 그를 이겨내어 즐거움을 얻는다.” (Stn.439)
“차라리 나는 문자 풀을 걸치겠다.
이 세상의 삶은 얼마나 부끄러운 것인가!
내게는 패해서 사는 것보다는
싸워서 죽는 편이 오히려 낫다.” (Stn.440)
싯다르타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악마의 달콤한 유혹에 넘어가지 않았다. 마치 전장에 나가는 장수가 머리에 흰끈을 동여 매고 전의를 불사르는 것처럼“차라리 나는 문자 풀을 걸치겠다.”라고 했다. 그리고 “내게는 패해서 사는 것보다는 싸워서 죽는 편이 오히려 낫다.”라며 결연한 의지를 보여 주었다.
번뇌는 어디서 오는가?
뮤지컬에서 싯다르타는 다소 나약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경에 따르면 매우 결연하다. 악마와의 싸움에서 지지 않겠다는 것을 말한다. 그런 악마는 육욕천의 마왕도 해당되지만 무엇 보다 ‘번뇌’라고 볼 수 있다. 번뇌라는 악마와 싸워서 이긴 것이다. 그렇다면 번뇌는 어디서 기인 한 것일까?
번뇌에는 세 가지가 있다. 감각적 쾌락의 욕망에 의한 번뇌, 존재에 의한 번뇌, 무명에 의한 번뇌를 말한다. 이 세 가지 중에서 가장 근원적인 번뇌는 ‘무명’이다.
무명이란 모르는 것을 말한다. 무엇을 모르는가? 자기자신을 모르는 것이다. 법구경에서 “어리석은 자가 어리석음을 알면 그로써 현명한 자가 된다.”(Dhp.63)라는 가르침이 있듯이, 만일 자기가 자기자신을 안다면 그는 더 이상 번뇌하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무명이 생겨나므로 번뇌가 생겨난다.”(M9)라고 했다.
번뇌는 무명에서 생겨난다. 무명이기 때문에 십이연기가 전개된다. 번뇌로 살아가는 삶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번뇌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까? 당연히 무명을 타파해야 한다. 먼저 자신이 무지하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무지는 알지 못하는 것을 말한다. 알지 못하기 때문에 무지한 것이다. 그런데 대부분 자신이 무지하다는 사실을 모른다는 것이다. 그래서 무지는 자신이 무지한 것에 대하여 무지하다는 사실조차도 알지 못하는 무지를 말한다. 이와 같은 중층무지(重層無知) 내지 중중무지(重重無知)에 대하여 무명이라고 말한다.
무명을 타파하면 깨달음을 얻는다. 번뇌를 소멸하면 깨달음을 얻는다는 말과 같다. 이는 “무명이 생겨나므로 번뇌가 생겨나고, 무명이 소멸하므로 번뇌가 소멸합니다.”(M9)라는 가르침으로 알 수 있다. 이것이 다름 아닌 십이연기의 순관과 역관에 대한 것이다.
왜 깨달은 자라고 하는가?
싯다르타는 마침내 십이연기를 통찰하여 깨달음을 얻었다. 악마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연기의 순관과 역관을 통찰하여 붓다, 깨달은 자가 된 것이다. 이는 다름 아닌 사성제를 깨달은 것이다. 그래서 이런 게송이 있다.
“나는 곧바로 알아야 할 것은 곧바로 알았고,
닦아야 할 것을 이미 닦았으며,
버려야 할 것을 이미 버렸습니다.
그러므로 바라문이여, 나는 깨달은 자입니다.” (Stn.558)
여기서 ‘알아야 할 것’은 사성제를 말한다. 또한 고성제를 뜻하기도 한다. 왜 그런가? 괴로움을 보는 자는 괴로움의 소멸도 보기 때문이다. 그래서 “괴로움을 보는 자는 괴로움의 발생도 보고 괴로움의 소멸도 보고 괴로움의 소멸로 이끄는 길도 본다.”(S56.30)라고 했다. 괴로움에 대하여 철저하게 알았을 때 나머지 세 가지도 자연스럽게 볼 수 있음을 말한다. 이러한 이유로 ‘알아야 할 것’은 사성제를 뜻하기도 하지만 고성제의 의미도 있다.
닦아야 할 것은 도성제를 말한다. 버려야 할 것은 집성제를 말한다. 그런데 사성제는 연기적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는 사실이다. 집성제가 원인이고 고성제가 결과가 된다. 이는 세간적 원리에 해당된다. 그리고 도성제가 원인이고 멸성제가 결과가 된다. 이는 출세간적 원리에 해당된다. 이렇게 알아야 할 것을 알고, 닦아야 할 것을 닦고, 버려야 할 것을 버렸을 때 깨달은 자(Buddha)가 된다.
“모든 것이 서로와 서로의 인연으로 모두 다 이루어져 있다.”
싯다르타는 출가한지 6년만에 붓다가 되었다. 뮤지컬에서는 깨달은 순간에 대하여 “모든 것이 서로와 서로의 인연으로 모두 다 이루어져 있다.”라고 했다. 이는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이것이 생겨나므로 저것이 생겨난다.”라는 연기법에 대한 것이다.
부처님이 깨달은 것은 연기법이다. 율장대품을 보면 가장 첫 페이지에 부처님이 정각을 이루고 난 다음에 “연기법의 순관과 역관에 대하여 정신활동을 기울였다.”(Vin.I.1)라고 되어 있다. 여기서 연기법은 12연기를 말한다. 그런데 사성제도 해당된다는 사실이다. 사성제에서 순관은 집성제(因)와 고성제(果)를 말하고, 역관은 도성제(因)와 멸성제(果)가 이에 해당된다.
뮤지컬 출연자들은 환희의 찬가를 불렀다. 공연이 끝나고 한사람 한사람 인사를 하며 한자리에 모두 모여서 노래를 부른 것이다. 합창식으로 부른 노래는 “모든 것이 서로와 서로의 인연으로 모두 다 이루어져 있다.”라는 연기의 노래이다. 객석에서는 박수로 환호했다.
오감으로 보는 뮤지컬
처음으로 뮤지컬이라는 것을 보았다. 그 동안 TV나 유튜브로 보았지만 이렇게 현장에서 생생하게 본 것은 처음이다. 모든 것이 생동감이 넘쳤다. 단지 화면으로 접하는 영화와는 다른 것이다. 직접 눈으로 보고 귀로 듣는 등 오감으로 본 것이다.
뮤지컬은 한마디로 종합예술이다. 배우 들의 연기와 노래 뿐만 아니라 무대장치와 조명 등 모든 요소를 갖추었다. 여기에다 관객과의 호흡이다. 극장이 있고 관객이 있어서 뮤지컬이 성립한다. 무엇보다 감동이다. 현장에서만 느낄 수 있는 생동감이다. 비싼 돈을 주고 관람하는 이유가 있는 것이다. 공연이 끝나고 단체사진을 찍었다.
불교인이라면 한번쯤
유일신교가 득세하는 세상이다. 그래서일까 불교인들은 피해의식이 있는 것 같다. 올해 7월에 개봉한 영화 ‘나랏말싸미’가 흥행에 실패했다. 이를 두고 일부 불교인들은 타종교인들의 적극적인 방해공작도 한 요인이라고 말한다. 그래서일까 이번만큼은 각오가 남다른 것 같다. 적극적으로 홍보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뮤지컬 싯다르타는 좀처럼 보기 드물게 불교를 소재로 한 것이다. 그것도 부처님의 일생에 대한 것이다. 부처님 일생중에서도 출가와 깨달음에 이르기 까지 과정에 대한 것이다. 불교인이라면 한번쯤 봄직하다. 특히 청소년이 보면 좋은 추억이 될 것 같다.
2019-09-08
담마다사 이병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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