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각적 욕망에 눈이 먼 한량에게, 영화 ‘엑스 마키나’를 보고
죽음은 피할 수 없다. 그런데 피할 수 없는 것이 하나 더 있다. 그것은 세금이다. 이는 영화대사를 보고 알게 되었다. 영화대사에서 “피할 수 없는 것은 죽음과 세금”이라는 말에 공감했다.
누구나 죽음은 피할 수 없다는 말을 인정한다. 주변에서 죽어가는 사람을 보기 때문이다. 그리고 언젠가 자신도 그렇게 될 줄 안다. 그런데 세금도 피해 갈 수 없는 것이라고 했다. 사업을 하는 사람들은 이런 사실을 실감한다. 때 되면 세금을 내야하고 세금을 내지 않으면 그야말로 ‘벌금폭탄’을 맞게 된다.
세금이라 하여 반드시 국세청에서 징수하는 것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요즘에는 지방세라 하여 시청에서도 구청에서도 통지서가 날아온다. 이뿐만이 아니다. 의료보험공단에서는 건강보험료를 청구한다. 수도세, 전기세 등 아파트관리비도 내야한다. 사람 사는 곳에 세금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그래서 죽음과 세금은 피해갈 수 없다는 말에 공감한다. 그런데 피해갈 수 없는 것이 또 있다. 그것은 ‘감각적 욕망’이다.
욕망의 세계인 욕계에 사는 한 감각적 욕망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남성과 여성으로 나누어져 있는 욕계에서 번식을 해야 하기 때문에 감각적 욕망에 끌리도록 프로그램 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인공지능을 다룬 영화에서는 “자네도 자연과 부모에 의해 프로그램된 존재야.”라고 했다. 그렇다면 인공지능로봇에게도 감각적 욕망을 느낄 수 있을까?
엑스 마키나(Ex Machina, 2015)
영화 ‘엑스 마키나(Ex Machina, 2015)’를 보았다. 아침에 본 것이다. 아침 5시대에 시작하여 7시에 끝났다. 이른 아침에 몰입해서 본 것은 인공지능과의 애정에 대한 것이다. 태어난지 하루밖에 되지 않은 여자인공지능로봇에게 사랑의 감정을 느낀다는 내용의 영화이다. 주인공은 어떤 이유로 인공지능에게 매력을 느꼈을까?
리얼돌이 있다. 실물과 똑 같은 인형을 말한다. 그러나 움직이지 못하고 무표정하다. 리얼돌에 생명을 불어넣는다면 어떻게 될까? 인공지능을 탑재했을 때 인간보다 더 매혹적인 존재가 될 것이다. 영화에서 그랬다. 영화속에서 본 인공지능은 미모뿐만 아니라 인격도 갖추었다. 더구나 감정까지 있다. 사람인지 인공지능인지 구별이 가지 않을 정도가 된 것이다.
영화속에서 남자 주인공은 매혹적인 여자 인공지능과 사랑에 빠진다. 미모와 인격, 여기에다 감정까지 갖춘 완벽한 여자인공지능은 누구나 바라는 이상적 모델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는 겉모습에 지나지 않다. 한꺼풀만 벗기면 기계장치가 드러난다.
매혹적인 인공지능 여인을 보면 로보트에 옷을 입혀 놓은 것과 같다. 로보트에 살을 붙여 사람과 똑같이 만들어 놓은 것이다. 옷을 벗으면 알몸이 드러나듯이, 인공지능의 피부를 벗겨내면 기계장치가 나타난다. 인공지능이 제아무리 인격과 감정을 갖추었더라도 기계장치로 되어 있다면 감각적 욕망의 대상이 될 수 있을까? 감각적 욕망이 얼마나 헛된 것인지에 대한 이야기가 테리가타에 있다.
비구니를 사모한 한량이 있었는데
테리가타 삼십련시집에 ‘쑤바 지바깜바바니까(Subhā Jīvakambavanikā)’ 장로니의 시가 있다. 모두 33개의 게송으로 되어 있는 긴 길이의 시이다. 인연담에 따르면 비구니 쑤바는 몸자체가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이는 쑤바(Subhā)라는 이름에 걸맞은 것이다. 특히 눈이 아름다웠다. 그래서일까 비구니를 사모하는 한량이 있었다. 그는 비구니 앞에 나타나서 갖가지 미사여구를 늘어 놓았다. 눈에 대한 것을 보면 다음과 같다.
“그대의 눈은 산중의
암사슴과 같고 낀나리와 같으니,
그대의 눈을 보면 볼수록,
나의 감각적 욕망의 쾌감이 증가합니다.”(Thig.381)
게송에서 낀나리(kinnarī)는 인비인(人非人)으로 사람의 얼굴을 가진 새를 말한다. 불교에서는 불법을 보호하는 팔부중의 하나로 음악의 신에 속한다. 한역으로는 ‘긴나라녀(緊那羅女)’라고 한다. 게송에서는 “요정 긴나리처럼 부드러운 눈을 지닌 여인이여”(Thig.375)라고 눈이 아름다움을 찬탄했다. 한량은 비구니의 눈에 반했다. 그래서 눈을 볼수록 감각적 욕망이 증가한다고 했다.
한번 감각적 욕망의 불이 타오르면 좀처럼 끄지 못한다. 어떻게 해서든지 욕망을 체우려 할 것이다. 그래서 한량은 자신과 살자고 말한다. 한량은 수바비구니에게 “그대는 젊고 아름답다. 그대가 출가하여 무엇을 할 것인가? 가사와 법복을 버리고 와서 꽃이 핀 숲속에서 즐겨봅시다.”(Thig.370) 라고 말한다.
성자를 유혹하는 기녀
한량은 꽃이 피는 좋은 시절에 인생을 즐기자고 말했다. 테라가타에서도 유사한 게송이 있다. 성자를 유혹하는 기녀가 “젊어서 그대는 출가했다. 나의 가르침을 따르시오. 인간의 감각적 쾌락을 즐기시오. 내가 재산을 주겠소. 정말 그대에게 약속하겠소. 아니면, 내가 불을 가져오겠소.”(Thag.461)라고 애원하는 것에서도 알 수 있다.
기녀는 수행을 완전히 포기하라고 말하지 않았다. 기녀는 “우리가 늙어서 둘이서 지팡이에 의지하게 될 때, 둘이서 함께 출가하면, 두 곳에서 행운의 주사위가 던져지는 것입니다.”(Thag.462)라고 말했기 때문이다. 수행은 늙어서도 할 수 있고 출가는 노년에도 할 수 있음을 말한다. 과연 기녀의 말을 얼마나 믿을 수 있을까?
기녀는 수 많은 남성을 가졌을 것이다. 기녀에게 있어서 수행승은 남성중의 하나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그것도 매력 있는 남성이다. 더구나 도력이 있는 수행승이다. 그래서일까 기녀가 수행승을 유혹하고 있다. 기녀는 불의 맹세를 말하며 자신과 늙을 때까지 살자고 말한다. 마치 황진이가 지족선사를 유혹하는 것과 같다.
예쁜 꽃이 있으면 꺽고 싶은 욕망이 있다. 마음에 드는 이성이 있으면 차지하고싶은 욕망도 있다. 기녀는 성자를 꺽고자 했다. 도력이 높은 성자를 유혹하여 무너뜨리고자 한 것이다. 이런 사실을 알아챈 수행승은 “기녀가 합장하여 애원하는 것을 보았다. 장식하고, 좋은 옷을 입었으나, 죽음의 왕의 그물이 펼쳐진 것 같았다.”(Thag.463)라고 하여 물리쳤다.
부처님의 딸을 유혹하다니
한량은 감각적 욕망에 눈이 멀었다. 상대가 비구니 수행녀임에도 놓지 않은 것은 아름다운 두 눈을 가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수바 비구니는 이미 감각적 욕망을 여읜 상태이기 때문에 조금도 흔들림이 없다. 번뇌를 여읜 자로서 비구니는 꼭두각시 인형을 예로 들어 욕망이 허무한 것임을 설명했다. 매혹적인 몸뚱아리를 ‘꼭두각시’처럼 본 것이다. 영화에서 보는 인공지능로보트 같은 것이다.
인공지능로보트는 온갖 부속품들로 만들어져 있다. 기계장치에다 눈과 코, 입, 귀 등을 붙여 놓았다. 또 피부를 붙여 놓아 겉으로 보기에는 사람과 똑같이 생겼다. 겉으로는 사람처럼 보이지만 분해하면 부속품들의 집합에 지나지 않는다. 사람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래서 수바 비구니는 “끈과 막대로 엮여졌는데, 갖가지로 춤을 추는, 나무막대로 잘 채색된 꼭두각시의 작은 인형들을 나는 보았습니다.”(Thig.390)라고 했다.
한량은 갖가지 감언이설로 수바 비구니를 유혹했다. 이는 기녀가 수행승을 유혹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이렇게 유혹하는 것은 수행녀를 꺽기 위한 것이다. 무너뜨리고 나면 곧 떠나고 말 것이다. 그래서일까 수바 비구니는 “부처님의 딸을 유혹하다니, 그대는 삿된 길을 원하는 것이고 달을 희롱하기를 구하는 것이고 수미산을 뛰어넘으려는 것이다.”(Thig.384)라며 나무랐다.
테리가타 인연담에 따르면 수바 비구니는 돌아오지 않은 경지에 확립되었다고 한다. 부처님 당시에 마하빠자빠띠 고따미에게 출가하여 통찰수행을 닦았는데 며칠 뒤에 불환자가 된 것이다. 불환자가 되면 감각적 욕망은 모두 사라진다. 그래서 이성을 보아도 감각적 욕망이 일어날 수 없다. 그래서 수바 비구니는 “신들을 포함한 세계에서 이제 나는 탐욕의 대상을 갖고 있지 않다. 어떠한 것인지조차 알지 못했지만, 그것은 길을 따라 뿌리째 제거되었다.”(Thig.385)라고 했다.
오온을 집착대상으로 보았을 때
수바 비구니는 사람을 꼭두각시와 같다고 했다. 줄로 조정하는 인형극에서 보는 나무꼭두각시를 말한다. 꼭두각시의 특징은 줄로 움직인다. 줄이 없다면 단지 나무토막에 지나지 않는다. 사람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사람을 오온으로 분해하면 사람이라고 할만한 것이 없다. 그저 색, 수, 상, 행, 식의 무더기에 지나지 않는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오온이 자신의 것이라고 착각한다. 그래서 “이것은 나의 것이고, 이것은 나이고, 이것은 나의 자아이다.”라고 말한다.
오온은 시시각각 변한다. 몸과 마음은 찰나찰나 변한다. 지금 이 느낌은오래 지속되지 않는다. 행복이 언제 괴로움으로 바뀔지 알 수 없다. 마음도 마찬가지이다. 지금 이 마음은 오래 지속되지 않는다. 몸도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수행들이여, 물질은 무상한 것이다. 무상한 것은 괴로운 것이다. 괴로운 것은 실체가 없는 것이다. 실체가 없는 것은 ‘이것은 나의 것이 아니고, 이것은 내가 아니고, 이것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라고 있는 그대로 보아야 한다.”(S22.15)라고 말했다. 이와 같은 정형구를 물질(몸)뿐만 아니라 느낌, 지각, 형성, 정신에도 동일하게 적용할 수 있다. 이렇게 본다면 오온은 집착대상이 아니다.
오온은 나의 것, 나, 나의 자아가 아니기 때문에 집착대상이 될 수 없다. 그럼에도 몸, 느낌, 지각 등에 집착한다면 이는 갈애라고 볼 수 있다. 더구나 아름답고 매혹적인 외모에 반하여 감각적 욕망이 일어났다면 그 느낌이나 지각을 자신의 것이라고 여기고 있는 것과 같다. 이는 벽화에 있는 여자의 형상을 보고 집착하는 것과 같다. 그래서 수바 비구니는 “노랑 웅황으로 칠해진 벽 위에 그린 그림을 보는 것처럼, 그대의 시각은 혼란되었으니, 인간의 지각은 쓸모가 없습니다.”(Thig.393)라고 했다.
감각적 욕망에 눈이 먼 한량에게
오온은 실체가 없는 것이라고 했다. 매 순간 변하기 때문이다. 변하기 때문에 나의 것, 내 것, 나의 자아라고 할 만한 것이 없다. 특히 지각이 그렇다. 이미지나 이름 같은 것이다. 이와 같은 지각에 대하여 부처님은 “지각은 아지랑이와 같다.”(S22.95)라고 했다. 지각은 신기루와도 같은 것이다.
지각은 왜 아지랑이와 같고 신기루와 같은 것일까? 주석에 따르면 “지각은 실체가 없다는 의미에서 마시거나 목욕하거나 주전자를 채울 수 없는 신기루와 같다.”(Srp.II.322)고 했다. 그래서 “신기루가 많은 대중을 속이는 것처럼 지각은 푸른 색등의 대상들이 아름답고 사랑스럽고 즐길만하고 영원한 것이라는 관념으로 사람을 유인한다.”(Srp.II.322)라고 했다. 그래서일까 수바 비구니는 감각적 욕망에 눈이 먼 한량에게 이렇게 게송으로 말했다.
“눈 앞에 있는 환영과 같고,
꿈꾸는 끝에 보이는 황금나무 같고,
사람들 가운데 인형극과 같은,
눈먼 자여, 당신은 헛된 것을 쫓아갑니다.”(Thig.394)
비구니를 사모한 한량은 눈이 멀었음에 틀림없다. 수바 비구니의 눈이 아무리 아름다워도 감각적 욕망을 여읜 눈이다. 청정하지 못한 자가 감각적 욕망의 갈애를 일으켜 맹목적으로 달려 들었을 때 어떻게 해야 할까? 부처님이 설한 여러 가르침을 이야기해 보지만 먹혀 들지 않을 때 어떻게 해야 할까? 송출자는 이렇게 게송을 읊었다.
“보기에 아름다운 여인은 안구를 뽑아
마음의 집착을 여윈 채,
‘자 당신을 의해 눈을 가지시오.’라고
그것을 그 남자에게 주었다.”(Thig.396)
수바 비구니는 눈에 집착하는 한량에게 눈을 뽑아 주었다. 눈은 얼굴에 붙어 있을 때 매혹적이지만 눈에서 떼어내면 혐오의 대상이 된다. 눈을 떼어 받은 한량은 어떤 마음이 일어났을까? 송출자는 “즉시 그의 탐욕은 식어버렸다.”(Thig.397)라고 말했다.
한량은 비구니를 감각적 욕망의 대상으로 보았다. 그러나 아름다운 눈을 손으로쥐었을 때 더 이상 매혹적인 눈이 아니었다. 더구나 눈이 패여 나간 비구니는 더 이상 긴나리같지 않았다. 한량은 감각적 욕망이 완전히 사라졌다. 그래서 송출자는 “그래서 그는 그녀에게 용서를 구했다.‘청정한 여인이여, 안녕하기를!’ 다시는 이와 같은 일이 없으리다.”(Thig.397)라고 말했다.
부정한 것으로 가득 찬 것이라고
인공지능을 다룬 영화 ‘엑스 마키나’에서 매혹적인 여인이 등장한다. 그런데 한꺼풀만 벗겨 보면 기계장치가 나온다. 기계장치에 살만 붙여 놓은 것이다. 그런데 눈, 코, 입 등 매혹적인 모습이다. 설령 기계장치라고 하더라도 감각적 욕망을 가지게 하기에 충분하다. 더구나 인격과 감정까지 있어서 인간과 구별이 되지 않을 정도이다. 이미지(saññā, 想)도 마찬가지 일 것이다.
이미지에 집착하는 것은 그 이미지가 나의 것, 나, 나의 자아라고 보기 때문이다. 이는 갈애와 자만과 유신견에 따른 것이다. 이럴 때는 해체해서 보아야 한다. 마치 매혹적인 눈을 따로 떼어 놓고 보는 것과 같다. 이렇게 해체해서 보면 더 이상 감각적 욕망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겉모습에 집착하면 감각적 욕망의 노예가 되기 쉽다. 한꺼풀 더 들어가 보아야 한다. 그래서 이 몸에 대하여 “여러가지 오물로 가득한 것으로 개별적으로 관찰한다.”(D22.7)라고 했다. 이 몸속에는 머리카락, 몸털, 손톱, 이빨, 살, 근육, 뼈, 골수, 신장 등 뿐만 아니라 가래, 고름, 피, 땀, 지방, 눈물, 임파액, 침, 점액, 관절액, 오줌이 있다고 머리에서부터 발까지 오물로 가득한 것이라고 관찰하라고 했다.
오온을 관찰하면 생성과 소멸을 알 수 있다. 특히 몸에 대하여 부정한 것으로 가득한 것이라고 관찰하면 욕망이 일어나지 않는다고 했다. 그래서“그는 세상의 어느 것에도 의존하지 않고 세상의 어느 것에도 집착하지 않는다.”(D22.7)라고 했다.
2019-11-01
담마다사 이병욱
'영화드라마후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위대한 엄마 위대한 여인, 프라이즈위너(The Prize Winner) (0) | 2020.02.09 |
---|---|
흐르게 내비둬! 삽질을 삽질한다 (0) | 2019.12.10 |
나는 남에게 기쁨을 주는 삶을 살고 있을까? (0) | 2019.09.26 |
“모든 것이 서로와 서로의 인연으로 모두 다 이루어져 있다.”뮤지컬 싯다르타 (0) | 2019.09.08 |
내가 그때 거기에 있었더라면, 5.18 다큐영화 김군 특별상영회 (0) | 2019.07.1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