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엄마 위대한 여인, 프라이즈위너(The Prize Winner)
무엇이든지 자주 보면 익숙해진다. 미국영화가 그렇다. 어렸을적부터 미국드라마를 보아 왔다. 흑백TV시절부터 보아 온 서부극은 매우 낯익다. 보난자, 초원의 집과 같은 시리즈 드라마는 아직도 생생하다. 이 밖에도 수많은 드라마와 영화를 보아 왔다. 이뿐만이 아니다. 음악 또한 매우 익숙하다. 팝송 몇 곡은 흥얼거릴 정도이다. 그래서일까 미국 드라마나 영화, 음악을 접하면 정답게 느껴진다. 이것이 아마도 문화의 힘일 것이다.
우리나라는 미국문화에 종속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아니 전세계적으로도 미국문화의 영향력하에 있다. 이런면으로 보았을 때 미국은 여전히 문화강대국이라 볼 수 있다.
일요일 아침 채널을 돌리다가 한 케이블 채널에 멈추었다. 너댓개 영화채널 중의 하나이다. 도중에 본 것이지만 보다보니 계속 보게 되었다. 폭력이 난무 하는 영화가 판을 치는 가운데 모처럼 인간미 넘치는 영화를 보았다. 미국 중부 오하이오주의 작은 마을을 공간적 배경으로 하는 가족드라마이다. 1960년대 전후가 시대적 배경이다. 영화는 자서전적이고 성장영화 성격도 띠고 있다. 영화제목은 프라이즈위너(The Prize Winner of Defiance, Ohio, 2005)이다.
영화에 시선이 꼽힌 것은 TV 우측하단에 써 있는 고정자막 때문이었다. 자막에는 ‘엄마의 위대함’이라고 써 있다. 영화의 성격을 어느 정도 말해준다. 거기에다 ‘다시 봐도 재미있다!’라는 문구가 써 있다. 믿고 보아도 되는 영화임을 알 수 있었다. 예상은 빗나가지 않았다. 1부 중간에서 보았지만 결국 끝까지 다 보고 말았다. 그리고 긴 여운을 남겼다. 경품을 타서 생계를 꾸려 가는 아홉 아이 엄마의 억척스런 삶에 대한 기록이다.
영화를 통해서 그때 당시 시대적 상황을 알 수 있다. 영화를 통하여 그때 당시 유행도 파악할 수 있다. 1960년대를 전후한 미국 중부 작은 마을에서의 일상을 보면 우리나라 60년대 어머니 삶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다.
첫째, 아이를 많이 낳았다는 것이다. 영화에서 어머니는 아홉을 낳았다. 한지붕 아래 부모와 아이들 11명이 살아가는 대가족이야기이다. 둘째, 어머니의 희생에 대한 것이다. 영화속 어머니는 아홉 아이들에게 사랑으로 보살펴 준다. 아이들 돌보느라 자신의 시간은 거의 없다. 이런 점이 베이붐시대의 우리나라 어머니의 모습과 유사하다는 것이다.
영화속 엄마는 남편을 대신해서 생활비를 벌어야 했다. 그렇다고 직장다녀서 월급 받는 것이 아니다. 놀랍게도 잡지, 라디오, TV 등 각종 콘테스트에 응모하여 경품을 타는 것이더. 경품으로 각종 가전제품도 구입하고 심지어 집도 장만한다. 그래서 영화속 엄마는 시간 날 때마다 콘테스트에 응모하는 것이 직업 아닌 직업이 되었다. 경품이란 경품에는 모조리 응시해서 타가는 것이다. 경품의 여왕이라 해야 할 것이다.
영화속에서 남편은 무능한 이미지이다. 기계공으로 아홉 아이들을 부양할 능력이 없다. 술을 좋아하지만 착한 남편이다. 영화속에서 착한 것은 무능하다는 것과 동의어이다. 때로 아내게 열등감을 표출하기도 한다. 때로 사고도 친다. 아내 몰래 집을 담보로 투자했는데 실패한 것이다. 집을 빼앗길 위기에 처하자 아내가 나선다. 경품 콘테스트에 도전한 것이다. 큰 액수의 경품이어서 가족의 미래가 걸려 있다. 아이들은 골방에서 경품이 당첨되게 해달라고 기도한다. 그런 기도가 통해서일까 마침내 경품에 당첨되어 집을 빼앗기지 않게 된다.
영화속에서 어머니는 늘 긍정적이고 낙천적이다. 내일을 걱정하기 보다는 오늘을 걱정한다. 우유가 떨어 졌을 때 돈이 없어도 어떻게 해서든지 우유를 마련한다. 오늘이 중요한 것이다. 아홉 아이들을 키우는데 내일 보다 오늘이 더 중요하다. 당장 식사 준비해야 하고 빨래 하고 청소해야 한다. 내일을 생각할 겨를이 없다. 내일 일은 내일 하면 되는 것이다.
엄마는 항상 오늘을 사는 사람이다. 지금 이시간을 사는 사람이다. 한번은 큰딸과 150키로 떨어진 도시로 차를 타고 나갔다. 딸이 아빠에게 운전을 배워서 아빠차 타고 경품우승자 모임에 간 것이다. 도중에 팬벨트가 끊어져서 약속시간에 갈 수 없었다. 자동차를 수리하는 중에 엄마는 딸에게 “모임에 갈수도 있고 못갈수도 있지. 그러나 여기에서 너와 이렇게 이야기를 즐기고 있지 않니?”라고 말한다.
미래 일은 알 수 없다. 한치 앞도 알 수 없는 것이 인생이다. 내일은 아직 오지 않았다. 그럼에도 내일 일을 걱정한다면 그는 여유 있는 사람인지 모른다. 그러나 아이를 아홉 키우는 엄마에게 내일은 없는 것이나 다름없다. 당장 식사준비하고 빨래하고 청소해야 한다. 거기에다 무능한 남편을 대신해서 생활비를 마련하기 위해 각종 콘테스트에 응모해야 한다. 하루를 일생처럼 사는 사람에게 내일 일을 걱정한다는 것은 사치에 지나지 않는다.
항상 현재를 살아야 한다. 부처님은 “사람의 목숨은 짧다. 훌륭한 사람이라면 그 목숨을 경시하라. 머리에 불이 붙은 듯 살아야 하리. 죽음이 다가오는 것은 피할 수 없네.”(S4.9)라고 말했다. 목숨을 경시하라는 말은 내일을 생각하지 말자는 말과 같다. 오늘밤이 지나면 내일이 올지 내생이 시작될지 알 수 없다. 한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인생이다. 오늘 해야 할 일을 먼저 해야 한다. 그래서 이런 게송이 있다.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지 말고 미래를 바라지도 말라. 과거는 이미 버려졌고 또한 미래는 아직오지 않았다. 그리고 현재 일어나는 상태를 그때그때 잘 관찰하라 정복되지 않고 흔들림이 없도록 그것을 알고 수행하라. 오늘 해야 할일에 열중해야지 내일 죽을지 어떻게 알것인가. 대군을 거느린 죽음의 신 그에게 결코 굴복하지 말라. 이와 같이 열심히 밤낮으로 피곤을 모르고 수행하는 자를 한밤의 슬기로운 님 고요한 해탈의 님이라 부르네.”(M131)
사람들은 이미 지나간 과거를 후회하고 아직 오지 않은 미래를 걱정한다. 누군가 “아, 그때 이렇게 했어야 했는데.”라며 과거를 후회해 보아야 소용없다. 현재와 조건이 다르기 때문이다. 과거의 회환과 화상에 빠져 있다면 그는 어리석은 사람이다. 후회나 회환은 불선업을 짓는 일이기 때문이다. 후회는 성냄을 뿌리로 한 것이기 때문에 자신에게 화를 내는 것이나 다름없다. 화를 낸다는 것은 탐진치 삼독 중에서 분심에 해당된다. 후회를 하여 자신에게 화를 낸다면 악업을 짓게 되는 것이다. 그럴 경우 “이미 지난 일이네.”라며 넘어가야 한다.
미래를 걱정하는 사람이 있다. 아직 오지도 않았고 아직 실현되지도 않은 것을 걱정하는 것이다. 걱정한다고 하여 걱정이 없어질까? 만일 걱정한다고 하여 걱정이 없어진다면 걱정이 없어서 좋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내일 일은 내일 일이다. 내일 가서 보면 된다. 지금은 현재 하고 있는 일에 충실해야 한다. 그래서 부처님은 “현재 일어나는 상태를 그때그때 잘 관찰하라.”라고 헀다. 또 “오늘 해야 할일에 열중해야지 내일 죽을지 어떻게 알것인가.”라고 했다.
영화속에서 엄마는 늘 현재에 살고 있다. 아니 내일을 생각할 겨를이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영화속의 엄마를 보면 우리나라 어머니가 떠 올려진다. 우리나라 어머니들도 그렇게 살았기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상시자막에 ‘엄마의 위대함’이라고 했을 것이다.
어머니는 위대하다. 아니 이 세상의 모든 여인은 위대하다. 그럼에도 빠세나디왕은 말리까왕비가 딸을 낳자 섭섭해했다. 이에 현명한 왕비 말리까는 “백성의 왕이여, 여인이라도 어떤 이는 실로 남자보다 훌륭하니 총명하고 계행을 지키며 시부모를 공경하고 지아비를 섬기네. 그런 여인에게서 태어난 남자는 세계의 영웅이 되니 그러한 훌륭한 여인의 아들이야말로 왕국을 지배할 수 있네.”(S3.16)라고 게송으로 말했다.
천하를 호령하는 영웅호걸도 어머니에게서 나왔다. 이 세상 어느 누구도 여인의 몸에서 나오지 않은 자 없다. 그런면에 있어서 어머니는 위대하다. 이 세상에서 어머니가 없었다면 누구도 태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아기를 낳을 수 있는 세상의 모든 여인들은 위대하다.
영화속에서 엄마의 이미지는 위대한 엄마로서의 이미지이다. 그러나 아빠의 이미지는 형편없다. 돈도 잘 벌지 못하는 기계공인 아빠는 착하기만 할 뿐 무능력자나 다름없다. 그래서일까 아빠는 늘 소외되어 있다. 하루는 아빠가 술을 마시고 “나는 구덩이 빠졌어.”라고 말한다. 구덩이가 어떤 의미인지 알 수 없다. 미루어 짐작하건데 애욕에 빠졌다는 말로 들린다. 여자라는 애욕에 빠져서 대책없이 아홉남매를 본 것이다. 그런데 아이들은 모두 엄마편이라는 것이다.
아빠는 돈도 못벌고 무능력하고 때로 사고까지 친다. 그런 아빠를 아이들은 싫어한다. 마치 병아리들이 암탉 날개안으로 들어가 있듯이, 아이들은 엄마주변에 몰려 있다. 그런 모습을 아빠는 보기 싫었던 것 같다. 그래서 자조적으로 “나는 구덩이에 빠졌다.”라고 했을 것이다.
영화속의 엄마는 아이들에게 자상한 엄마이자 동시에 남편에게는 좋은 아내이다. 남편이 사고를 쳐도 받아 준다. 딸이 엄마에게 “20년 동안 살면서 지겹지도 않으세요? 엄마는 왜 도망가지 않았어요?”라고 묻는다. 그런 딸에게 엄마는 아빠를 미워하지 말고 아빠를 용서하라고 말한다. 영화속의 엄마는 수퍼우먼이기도 하지만 지아비를 섬기는 현모양처이기도 한 것이다.
엄마는 거액이 걸린 콘테스트에 응모하여 운좋게 경품을 탔다. 하와이여행도 보장되어 있는 큰 금액이다. 그러나 아빠가 사고친 집에 대한 대출금을 갚고 근처 도시 호텔에서 보내게 된다. 엄마는 처음으로 가사노동에서 해방되었다. 자신의 손으로 식사준비 하지 않아도 되는 식사를 했고, 자신의 손으로 청소하지 않아도 되는 안락한 호텔에 머문 것이다. 이런 이야기는 아홉남매 중의 하나인 작가가 된 딸에 의해서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영화를 보면서 엄마역할을 한 배우가 마음에 들었다. 이런 저런 영화에서 본 얼굴이다. 이름을 확인해 보니 ‘줄리안 무어’이다. 1960년대를 전후한 미국 중부 마을에서 있었던 경품의 여왕 주인공을 잘 소화했다. 특히 그녀가 입은 의상을 보면 그때 당시 유행과 시대상황을 알게 해준다. 배우는 천의 얼굴을 가졌다고 한다. 줄리안 무어의 엄마역할을 보니 실감이 난다. 그래서 더 몰입해서 본 것 같다. 앞으로 줄리안 무어가 나오는 영화를 좋아할 것 같다.
영화에서 전달하고 하는 메시지가 있다. 그것은 위대한 엄마이다. 어떤 어려운 상황에서도 낙천적이다. 내일에 일어날 일보다 지금 해결해야 할 일이 더 많기 때문에 내일을 걱정하기 보다는 오늘을 더 걱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불교에서 말하는 ‘과거는 지나갔고 미래는 오지 않았다. 현재 하고 있는 일에 집중하라.’라는 가르침과도 일치한다. 이 세상의 모든 엄마는 위대하다. 이 세상의 모든 여인은 위대하다.
2020-02-09
담마다사 이병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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