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인의 정치참여에 대하여, 세상에 살지만 세상에 물들지 않고
한국인들이 가장 많이 읽는 초기경전은 무엇일까? 그것은 아마도 법구경과 숫따니빠따일 것이다. 법정스님이 70년대에 번역한 경전이기도 하다. 엄밀히 말하면 일본 것을 중역한 것이다. 나까무라 하지메의 일역을 우리말로 편역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초기경전을 접하다 보니 법구경과 숫따니빠따에 필적할 정도로 아름다운 경전이 많다는 것이 대게 짤막한 게송으로 이루어져 있다. 거기에는 우다나도 있고 이띠붓따까도 있다. 또 테라가타와 테리가타도 있다. 모두 한국빠알리성전협회에서 번역된 경전들이다. 여기에 하나 더 들라면 상윳따니까야 1권이다.
상윳따니까야 1권은 주로 게송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래서일까 1권을 ‘시와 함께 모아엮음(sagāthavaggasaṃyuttapaḷi)’이라고 한다. 빠알리어 사가타(sagātha)는 ‘시와 함께’ 라는 뜻이다. 초기불전연구원에서는 1권에 대하여 ‘게송을 포함한 가르침’이라고 이름 지었다. 이와 같이 상윳따니까야 1권은 ‘시와 함께’ 라고 되어 있는데 법구경이나 숫따니빠따 못지 않은 가르침으로 가득하다. 그래서 테라와다 종가집이라고 볼 수 있는 스리랑카에서는 상윳따니까야 1권만을 별도로 유통시켜 교재로 사용하고 있다고 한다. 한국빠알리성전협회에서도 최근 1권만을 별도로 떼어 내어서 포켓용으로 만들었다.
마음이 심란할 때
마음이 심란할 때가 있다. 마음이 안정되지 못하고 갈피를 잡지 못할 때를 말한다. 대개 외부로부터 영향을 받은 것이다. 외적 자극에 따라 마음에 동요가 일어 났기 때문이다. 또 무료할 때가 있다. 그저 무기력하고 권태롭고 심심했을 때이다. 사실 가장 무서운 적은 ‘무료함’이다.
외적 자극에 따라 분노가 일어났을 때 그 분노로 인하여 무료함은 사라질 수 있다. 그러나 이것도 저것도 아닌 마음상태가 되었을 때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를 때가 있다. 어느 경우에서나 초기경전을 집어 들면 안정을 찾을 수 있다. 몇 장 넘기다 보면 다른 마음이 되어 버린다. 격정의 마음도 마음도 이전의 마음이 되어 버린다. 특히 게송을 읽었을 때 그렇다. 이렇게 본다면 법구경, 숫따니빠ㄸ카, 우다나, 이띠붓따까, 테라가타, 테리가타, 상윳따1권 ‘시와 함께 모아엮음’은 매우 좋은 기분전환 수단이다. 어쩌면 흥분과 우울의 치료제일지도 모른다.
평화적 시위에 동참하는 것은
요즘 조국사태로 불쾌하고 불편한 나날을 보내고 있다. 대체 이 불쾌는 어디서 왔을까? 곰곰히 따져 보니 ‘임명권력’에 있다. 국민들이 뽑은 선출권력에 대하여 도전 하고 있는 것이다. 무엇보다 권력남용이다. 통제받지 않은 권력이 어디까지 타락할 수 있는지 극명하게 보여 주었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사회정의에 대한 글을 쓰고 있다. 이에 대하여 어떤 이들은 실망감을 표출하고 있다.
어떤 불자들은 부처님 가르침만 따르면 되었지 지나치게 사회적인 일이나 정치적인 일에 몰두 한다면 옳지 않다고 말한다. 이런 지적에 어느 정도 동의한다. 그러나 이 세상을 살아가는 한 정치적인 동물이 되지 않을 수 없다. 때 되면 투표하는 행위도 정치행위라고 볼 수 있다. 사회가 잘못된 길을 가면 바로 잡아 주는 것도 정치적 행위일 것이다.
부처님은 정치행위를 하지 말라고 하지는 않았다. 다만 수행자들이 잡담을 하지 말라는 말은 했다. 디가니까야 ‘뽓따빠다의 경(D9)’을 보면 군주에 대한 이야기, 도적에 대한 이야기 등 28가지가 소개 되어 있다. 이런 이야기는 청정한 삶에 하등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인물에 대한 이야기나 정치이야기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렇다고 하여 나홀로 심산유곡에서 신선처럼 살 수 없다.
이 세상을 산다는 것은 서로 도움을 주고 받기 때문에 공동체가 건전해야 한다. 불의의 세계가 되어 모두가 고통 받는다면 그런 현실을 외면할 수 없다. 그럴 경우 강력한 현실참여를 해야 한다. 평화적 시위에 동참하는 것은 민주시민의 의무이기도 하고 중산층의 조건이기도 하다.
사실과 진실에 대한 네 가지 태도
어떤 이는 정치참여를 해서는 안된다고 말한다. 글을 써도 정치적인 견해를 가진 글을 쓰지 말아 달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부처님이 정치참여를 해도 된다는 경전적 근거를 제시해 달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부처님은 정말 사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에 대하여 침묵하라고 했을까? 사회가 정의롭지 않은 불의의 세계가 되었을 때 자신이 해야 할일 만 묵묵히 하면 되는 것일까? 이럴 때 초기경전을 열어 보아야 한다. 부처님 가르침 중에 이런 대목이 있다.
“뽀딸리야여, 세상에 어떤 사람은 올바른 때에 사실과 진실에 맞게 비난해야 할 사람을 비난하고, 올바른 때에 사실과 진실에 맞게 칭찬해야 할 사람을 칭찬합니다.”(A4.100)
부처님은 이 세상에는 네 가지 종류의 사람이 있다고 했다. 그것은 ‘사실과 진실’에 대한 것이다. 여기서 ‘사실과 진실’은 빠알리어 ‘tacchaṃ’을 번역한 것이다. 빠알리어 ‘taccha’는 ‘true; real’의 뜻이다. 그래서 한국의 두 번역서에서는 ‘사실과 진실’로 번역해 놓았다.
사실과 진실에 대한 네 가지 태도가 있다. 1)어떤 사람은 비난해야 할 사람은 비난하지만 칭찬해야 할 사람은 칭찬하지 않는다. 2)또 어떤 사람은 칭찬해야 할 사람은 칭찬하지만 비난해야 할 사람은 비난하지 않는다. 3)또 어떤 사람은 비난해야 할 사람도 비난하지 않고 칭찬해야 될 사람도 칭찬하지 않는다. 4)마지막으로 어떤 사람은 비난해야 할 사람은 비난하고 칭찬해야 할 사람은 칭찬한다. 이 중에 나는 어디에 해당될까?
정치적으로 무관심한 사람
네 가지 종류의 사람 중에 최악은 세 번째 사람일 것이다. 잘못을 보아도 지나치고 잘한 것을 보아도 지나치는 것이다. 어쩌면 중립적으로 보인다. 세상이 어떻게 되든 자신과 상관 없는 것이다. 오로지 자신의 일만 하면 된다는 것이다. 심산유곡에서 나홀로 살아 가는 사람과 같은 사람이다. 정치적으로는 무관심한 사람이다.
투표 때가 되어도 투표를 하지 않고 놀러 가는 사람이 있다. 오로지 자신과 자신의 가족만을 생각하는 이기주의적 사람이다. 사회구성원으로서 없는 것이나 다름 없다. 투명인간과 같은 삶이다. 어쩌면 동물과 같은 삶이다. 사회성이라고는 전혀 찾아 볼 수 없다. 비난해야 할 자도 비난하지 않고 칭찬해야 될 자도 칭찬하지 않는 사람을 말한다.
양비론적 사람이 있다. 이것도 잘못 되었고 저것도 잘못 되었다는 것이다. 양비론자가 되면 어느 편에도 속하지 않기 때문에 조정자로서의 역할을 할 수 있다. 일종의 중립적 역할을 한다고도 볼 수 있다. 중립이라는 의미에서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최악의 세 번째 사람과 유사하다. 그나마 아무것도 하지 않는 자에 비하면 나은 편이다. 기회주의적 지식인에게서 많이 볼 수 있다. 그러나 부처님 가르침에 양비론자는 보이지 않는다.
누가 정의로운 자인가?
불의를 보고서도 침묵한다면 그는 더 이상 정의로운 자가 아니다. 두 번째 부류의 사람으로서 “칭찬해야 할 사람은 칭찬하지만 비난해야 할 사람은 비난하지 않는다.”라고 볼 수 있다. 불의를 보면 의사표현을 해야 한다. 그리고 행동으로 보여 주어야 한다. 네 가지 부류 중에서 최상의 사람은 비난해야 할 사람은 비난하고 칭찬해야 할 사람은 칭찬하는 사람을 말한다.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요약하여 말씀했다.
“뽀딸리야여, 이와 같은 네 종류의 사람들 가운데 나는 올바른 때에 사실과 진실에 맞게 비난해야 할 사람을 비난하고, 올바른 때에 사실과 진실에 맞게 칭찬해야 할 사람을 칭찬하는 사람이 더욱 훌륭하고 더욱 탁월하다고 생각합니다.”(A4.100)
비난과 칭찬 할 때에는 사실을 잘 파악해야 한다. 사실을 알면 진실도 파악될 수 있다. 이러한 사실과 진실을 알았을 때 잘못을 지적할 수 있는 용기가 있어야 한다. 때로 평화적 시위에 참여할 수 있다. 서구에서는 중산층의 조건 중의 하나가 평화적 시위에 참여하는 것도 해당된다고 한다. 오로지 돈 밖에 모르는 사람은 중산층으로서 자격이 없음을 말한다.
모든 것은 때가 있다. 그래서 실기 하지 말라고 한다. 사과하는 것도 때가 있다. 때를 놓치면 효과가 줄어든다. 상대방이 참회하거든 때를 놓치지 말고 받아 주어야 한다. 다만 진정한 참회일 경우에 해당된다. 모든 경우에 있어서 때가 있다. 이를 영어로 타이밍이라고 말 할 수 있다. 현상에 대하여 사실과 진실을 알았을 때 실기 하지 말라고 했다. 그래서 부처님은 비난과 칭찬에 대하여 “경우에 따라서 올바른 때를 아는 것이야말로 훌륭한 일이기 때문입니다.”(A4.100)라고 말했다.
세상에 살지만 세상에 물들지 않고
이 세상을 떠나서 하루도 살 수 없다. 이 세상에 태어난 이상 이 세상에서 세상사람들과 함께 살아 가야 한다. 부처님도 그렇게 살았다. 다만 세상에 물들지 않고 살았다. 그래서 부처님은 “바라문이여, 예를 들어, 청련화나 홍련화나 백련화가 물 속에서 생겨나 물 속에서 자라지만, 물을 벗어나서 물에 젖지 않고 피어있듯, 바라문이여, 이와 같이 나는 세상 속에서 생겨나 세상 속에서 자라지만, 세상을 극복하고 세상에 물들지 않고 지냅니다.”(A4.36)라고 말했다.
부처님은 세상 속에서 중생과 함께 살아가지만 세상과 싸우지 않는다고 했다. 그럼에도 싸우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어떤 이유에서일까? 그것은 다름 아닌 진리 때문이다. 부처님이 진리를 설할 때 세상과 싸우는 것처럼 보인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수행승들이여, 나는 세상과 싸우지 않는다. 세상이 나와 싸운다. 수행승들이여, 진리를 설하는 자는 세상의 누구와도 싸우지 않는다.”(S2.94)라고 했다.
세상속에 살다 보면 세상이 싸움을 걸어 온다. 특히 진리대로 살려고 하는 사람에게 그렇다. 왜 그럴까? 진리의 세계에서는 세상의 흐름과는 반대로 가기 때문이다. 세상 사람들은 욕망에 이끌려 세상의 흐름대로 살지만,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들은 욕망을 버리는 삶을 살기 때문에 흐름을 거슬러 사는 것이다. 그렇다고 심산유곡에서 신선처럼 사는 것은 아니다. 세상에 살되 세상에 물들지 않고 사는 것이다.
어떤 것이 중생에게 이익이 되는지
부처님은 세상에 무관심한 분이 아니었다. 여래십호에 ‘세간해(世間解: lokavidū)’라는 말이 있듯이, 부처님은 세상에 대하여 잘 아는 분이었다. 여러 가지 세상이 있지만 그 중에서도 중생의 세계에서 일어나는 일을 잘 알았다.
부처님은 어떤 것이 중생에게 이익이 되는지를 알고 있었다. 이에 적합한 말이 바로 “올바른 때에 사실과 진실에 맞게 비난해야 할 사람을 비난하고, 올바른 때에 사실과 진실에 맞게 칭찬해야 할 사람을 칭찬하는 사람”(A4.100)을 말한다. 바로 이 말이 불교인들이 정의로운 세상을 만들기 위하여 정치에 참여하는 근거가 되는 가르침이라고 볼 수 있다.
2019-10-05
담마다사 이병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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