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난에 빠졌을 때
공감능력이라는 말이 있다. 일반적으로 타인의 슬픔이나 고통에 대하여 함께 느끼는 것을 말한다. 공감능력과 관련하여 떠오르는 말이 있다. 그것은 거울세포이다. 뇌속에는 타인의 행동에 대하여 민감하게 반응하는 정교한 신경세포가 있다고 하는데 이를 ‘거울뉴런’이라고 한다. 마치 거울을 보는 것처럼 공감하는 것이다. 우는 사람을 보면 슬퍼지고, 웃는 모습을 따라 웃음이 나고, 옆사람이 무서워하면 덩달아 무서워하는 등 감정을 공유하는 것을 말한다.
인간에게만 있는 공감능력
공감능력은 인간에게서만 볼 수 있다고 한다. 공감능력은 서로 관계를 맺고 살아 가는 인간에게서만 볼 수 있는데 동물에게서는 볼 수 없는 것이라고 한다. 공감능력이 없는 사람도 있다. 자폐와 같은 발달장애로서 선천적으로 장애를 가지고 태어난 사람들이 해당될 것이다. 그런데 정상인처럼 보이는 사람들 중에서도 공감능력이 현저하게 떨어지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다. 흔히 소시오패스(Sociopath)라 일컬어지는 반사회적 인격장애를 가진 사람들을 말한다. 이는 아무런 자각없이 범죄를 저지르는 사이코패스와는 구별되는 것이다.
세월호사건이 일어났을 때 폭식투쟁 하던 사람들이 있었다. 남의 슬픔에 대하여 공감하기는커녕 조롱하는 것에 대하여 그때 당시 언론에서는 이를 소시오패스라고 했다. 또 거울신경세포가 마비된 사람들이라고도 했다. 이런 소시오패스는 옛날에도 있었다. 다만 크게 부각되지 않아서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공감능력이 전혀 없는 듯 보이는 사람들이 우리사회에서는 상당수 있다는 것이다. 이번 조국관련 검란사태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조국사태가 일어났을 때 언론에서는 일방적으로 매도했다. 심지어 진보진영에서도 도덕적으로 문제 있는 사람이라고 비난했다. 보수적 성향을 가진 사람들은 ‘조로남불’이라 하여 좌파지식인의 이중성에 대하여 조롱했다. 털어서 먼지 나지 않을 사람 없을 것이다. 아무리 깨끗하게 살아왔다고 자부해도 허물은 있기 마련이다. 조국도 그런 사람중의 하나라고 본다.
이 땅의 양심 있는 사람들이 분노한 것은 조국의 도덕성에 대한 문제 보다도 검찰의 행태에 대한 것이다. 가족을 인질로 삼아 압박하는 것에 대하여 공분한 것이다. 거울뉴런세포가 작동한 것이다. 타인의 아픔과 고통에 대하여 공감한 것이다. 그럼에도 오로지 도덕적 문제만 거론하며 검찰의 반인륜적 행태에 대하여 침묵하거나 공감한다면 거울신경세포가 마비된 사람들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왜 퇴장했을까?
며칠전 장인상이 있었다. 단체카톡방에 공지가 올려져 있었다. 사람들은 짤막하게 애도를 표하는 메시지를 올렸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하나 있었다. 어느 법우님이 퇴장해 버린 것이다. 잘 아는 법우님이다. 순례도 함께 다니고 식사도 함께 하는 등 친한 사이였다. 그런데 애도의 말 한마디 없이 퇴장해 버린 것이다. 왜 퇴장했을까?
여러 가지 생각이 들었다. 혹시 용량 때문에 버튼을 잘못 눌러 실수로 나간 것이 아닐까도 생각했다. 애도 분위기가 싫어서 나간 것일까? 그러나 왜 나갔는지 알 수 없다. 다른 카톡방에서도 한사람이 나갔다. 모두 잘 아는 사이이다. 그들은 왜 나갔을까? 생각이 꼬리를 물었다. 원래 그런 사람이었던 것일까? 내가 잘못한 것이 있었던 것은 아닐까? 이유를 알 수 없다. 분명한 사실은 모두가 애도하는 중에 퇴장했다는 것이다.
재난에 빠졌을 때 사람을 알 수 있다. 기쁨은 함께 할 수 있지만 슬픔까지 함께 하기는 힘들다. 카톡방에서 애도의 메시지를 보내는 사람도 있고 침묵하는 사람도 있다. 아마 친소관계에 따른 것이라 본다. 그런데 퇴장해 버리는 사람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 공감능력이 부족하다고 보아야 할까? 다음에 만날 기회가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렇게까지 해야 할 필요가 있을까?
불선자(不善者)에 대하여
재난에 빠졌을 때 두 가지 타입을 볼 수 있다. 하나는 타인에 대한 것이고 또 하나는 자신에 대한 것이다. 먼저 타인에 대한 것이다.
물에 빠졌을 때 손길을 내미는 자가 있다면 타인에 대한 공감능력이 있다고 볼 수 있다. 상을 당했을 때 문상 오는 것으로 판단할 수 있다. 요즘은 통장을 공개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통장에 찍힌 것으로도 파악할 수 있다. 물론 친소관계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이렇게 적극적으로 공감능력을 표현하는 사람들은 거울뉴런세포가 발달한 사람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런 사람을 ‘선자(善者)’라고 할 수 있다.
선자가 있다면 불선자(不善者)도 있을 것이다. 공감능력이 없는 사람이나 부족한 사람도 해당될 것이다. 타인의 슬픔에 대하여 공감하지도 않고 행동을 취하지도 않는 사람을 말한다. 친소관계에 따라 먼 사람이라면 어쩔 수 없다고 하더라도 가까운 사이에서도 무관심하다면 공감능력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일이 벌어졌을 때는 도움을 주는 사람이 친구이다. 아는 사람이라 하여 모두 친구가 될 수 없다. 필요할 때 도움을 주는 사람이 친구이기 때문이다. 아는 사람이 백명, 천명이 되도 재난에 빠졌을 때 손을 내미는 사람은 드물다. 이렇게 필요할 때 도움이 되는 사람이 선자일 것이다. 평소에 아는 사람이 모두 선자라고 볼 수 없다. 공감능력이 현저하게 떨어지는 사람에 대하여 불선자라고 말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불선자에 대해서는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할까?
사람들은 호불호와 쾌불쾌에 대하여 민감하게 반응한다. 상대방에 대하여 불쾌하게 생각하면 퇴장해 버리는 것이다. 대체로 주관이 강한 사람들이다. 한번 싫으면 천만금을 주어도 싫은 것이다. 이렇게 감정표출을 하다보면 어떻게 될까? 결국 고립되어서 홀로 살아가게 될 것이다. 세상은 홀로 사는 사람들로 넘쳐 날 것이다. 이는 공감능력이 부족한 것이다.
공감능력이 있는 사람은 선자이고, 공감능력이 부족한 사람은 불선자라고 볼 수 있다. 선자는 누구나 좋아한다. 그래서 가까이하고자 한다. 그러나 불선자는 누구나 싫어 한다. 자리를 박차고 나가는 사람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불선자를 어떻게 대해야 할까?
선자이든 불선자이든
재난을 당했을 때 또 한가지는 자신에 대한 것이다. 이는 불선자를 대하는 태도와 관련이 있다. 사람들은 싫은 사람을 회피한다. 모임에서도 “저 사람 때문에 안나갑니다.”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 그렇다고 다음에 만났을 때 인사도 하지도 받지도 않고, 말도 걸지도 받지도 말아야 할까? 노자 도덕경을 보면 선자와 불선자에 대한 가르침이 있다.
도덕경 49장을 보면 ‘선자오선지 불선자오역선지(善者吾善之 不善者吾亦善之)’라는 구절이 있다. 이 말은 “선자이든 불선자이든 선하게 대하라.”라는 뜻이다. 나의 기준으로 보았을 때 그가 불선자라도 선하게 대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부처님 가르침으로도 확인된다. 부처님은 “그는 친지의 상실을 겪고 재물의 상실을 겪고 건강의 상실을 겪더라도, 슬퍼하지 않고 상심하지 않고 비탄해하지 않고 가슴을 치며 울부짖지 않고 혼란에 빠지지 않는다.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이 어떤 사람이 견고한지는 재난을 만났을 때 알 수 있다.”(A4.192)라고 했다.
재난에 빠졌을 때 두 가지 태도를 볼 수 있다. 하나는 타인에 대한 것으로 손을 내미는 사람이 이에 해당된다. 어려울 때 도움을 주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친구라고 볼 수 있고 선자에 해당된다. 반면에 무관심으로 일관한다면 거울신경세포가 덜 발달되었다고 볼 수 있고 불선자에 해당될 것이다. 또 하나는 자신에 대한 것으로 어려움을 극복하는 것이 이에 해당된다.
선한자라 하여 선하게 대하고 불선자라 하여 불선하게 대한다면 성현의 가르침이 아니다. 선자나 불선자나 모두 선하게 대해야 한다. 재난에 빠졌을 때 선자와 불선자를 구분하지 않고 선하게 대하여 평정을 유지할 수 있다면 그는 바위처럼 견고한 사람이라고 볼 수 있다.
2020-01-02
담마다사 이병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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