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속의연꽃

광화문을 지나면서

담마다사 이병욱 2020. 1. 12. 09:54


광화문을 지나면서

 

 

어제 서울 종로에서 모임이 있었다. 여유 있게 길을 나섰다. 30분가량 여유가 있어서 광화문을 지나 가기로 했다. 매주 토요일 열리는 태극기부대 집회 현장을 보기 위해서이다. 동시에 광화문탈환집회도 보기 위함이다.

 

광화문에서 두 개의 극단을 보았다. 이념적으로 성향이 완전히 다른 두 극단의 구호는 전혀 다른 종족의 사람들처럼 보였다. 태극기에 대하여 한편에서는 태극기부대라고 말하고 또 한편에서는 태극기모독부대라고 말한다.

 

태극기부대 집회에서는 태극기와 성조기가 물결친다. 어느 젊은 여자 연사는 자극적인 언사로 2016년 광화문촛불을 맹비난했다. 또 이전에 있었던 세월호관련 집회 역시 맹비난 했다. 그때마다 청중들은 태극기와 성조기를 흔들며 함성과 함께 호응했다.

 




한켠에서는 태극기모독부대로부터 광화문을 탈환하자는 집회가 열리고 있었다. 대형 전광판 아래에는 윤석열 당장사퇴!’정치검찰 척결!’구호가 붙었다. 그러나 수적으로 역부족인 것 같다. 태극기부대에 둘러싸여 있어서 무슨 말 하는지 알아들을 수 없었다.

 




무엇이 사람들을 그토록 흥분하게 만들었을까? 그것은 언어의 힘이 아닐까 생각한다. 인간은 동물과 달리 사유할 수 있는 존재이다. 사유는 언어가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그것도 그 집단이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이다. 지나가는 외국인이 본다면 아무런 감흥을 받지 못할 것이다.

 

두 부류의 양극단이 공통적으로 말 하는 것이 있다. 그것은 애국(愛國)이다. 모두 나라사랑하기 때문에 모였다고 한다. 나라사랑하는데 있어서 보수와 진보의 차별은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극단으로 몰고 가는 것은 이념때문일 것이다. 언어로 표현되는 이념에 따라 종족이 갈리는 듯하다.

 

한국현대사를 보면 이념갈등으로 인하여 수많은 사람들이 죽었다. 한국전쟁도 넒은 의미에서 본다면 이념갈등에 따른 것이다. 어른들에게서 들었던 인공시절 이야기도 이념에 따른 것이다. 이념이라는 역사의 수레바퀴에 치여 죽은 사람들이 부지기수이다.

 

자유나 평등이라는 단어는 매우 고상하다. 그러나 이념화 되면 양상이 달리 전개된다. 이념에 집착하면 집착할수록 파괴적으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이념의 또 다른 말인 이데올로기에 집착하면 폭력적으로 변질되고 전쟁이 일어난다.

 

자유, 평등, 평화, 행복이라는 말은 언어로서만 존재한다. 특정한 집단에서만 통용 되었을 때 본래 의미가 상실된다. 이념에 집착하면 할수록 폭력화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누군가 이것이 정의이다.”라고 규정하면 그것은 더 이상 그런 정의라고 말 할 수 없다. 마치 이것만이 진리이고 다른 것은 모두 거짓이다.”라고 말 하는 것과 같다. 자유, 평등, 평화, 행복이라는 말도 집착하면 본래 의미가 상실된다. 이데올로기에 집착하면 타자를 배척하기 때문에 폭력적으로 변질된다. 그 생생한 현장을 광화문에서 보았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이데올로기를 극복할 수 있을까?

 

조국관련 검란과 관련하여 서초동으로 여의도로 쫓아다녔다. 그리고 블로그와 페이스북에 기록을 남겼다. 이전에 광화문촛불이나 세월호관련촛불 역시 마찬가지로 기록을 남겼다. 그것은 한마디로 마음에서 우러나온 것이다. 언어화된 개념에 집착한 것이 아니라 감성에 따른 것이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공감능력에 따른 것이다.

 

증오심과 전개심 없이는 전쟁하기 힘들다. 그래서일까 전쟁광들은 끊임없이 증오심과 적개심을 부추긴다. 또한 전쟁광들은 목숨을 하찮게 여긴다. “어차피 한번 죽는 목숨이다. 목숨을 아끼지 말라.”라고 말한다. 반면 평화주의자들은 한번뿐인 소중한 목숨이다. 목숨을 헛되이 하지 말라.”라고 말한다. 전쟁광들은 끊임없는 선동으로 사람들을 사지로 몰고 간다.

 

더 이상 이념의 노예가 될 수 없다. 인간만이 가지고 있는 공감능력에 따라야 한다. 그것은 동병상련(同病相憐)으로 표현될 수 있다. 타인의 아픔과 고통에 공감했을 때 더 이상 이념에 휘둘리지 않는다. 그렇게 하려면 자리행과(自利行)과 이타행(利他行)이 있어야 한다.

 

자리행이 되어 있지 않은 사람이 구호를 외치면 폭력적으로 변질된다. 자기 수행없이 사회에 참여하면 폭력적으로 된다는 것이다. 수행을 하여 자신을 이익되게 하지 않은 사람은 타인을 이익되게 하기 힘들다.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타인을 사랑하지 못하는 이유와 같다. 자리행이 되어 있는 사람이 이타행도 할 수 있다.

 

광화문을 지나치면서 두 극단을 보았다. 전에 없던 현상이다. 오늘아침 인터넷뉴스를 보니 ‘ “윤석열 수호” vs “윤석열 사퇴”..광화문서 부딪친 두 목소리라는 기사제목을 보았다. 다행히 두 극단의 충돌은 없었다고 전한다. 그러나 시작에 불과하다. 언어의 감옥에 갇혀 있는 한 언제 충돌할지 모른다.

 

 

2020-01-12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