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

사회적 거리두기와 중도(中道)

담마다사 이병욱 2020. 4. 9. 08:27

 

 

 

사회적 거리두기와 중도(中道)

 

 

 

 

 

어제 저녁 메인뉴스에서 서울시장은 유흥업소 폐쇄명령을 내렸다고 보도했다. 코로나19로 인하여 사회적 거리두기 운동을 실천하고 있는 마당에 유흥업소에서 확진자가 속출했기 때문이다. 유흥업소폐쇄는 강제적인 강력한 사회적 거리두기라고 볼 수 있다.

 

 

 

사회적 거리두기라는 말이 유행하고 있다. 대면 접촉할 때 2미터가량 떨어져야 함을 말한다. 침이 튀기지 않는 안전거리라고 볼 수 있다. 그래서인지 공직시험도 운동장에서 치루는 장면을 TV에서 보았다. 여기에 최근 정부에서는 강력한 사회적 거리두기 운동을 하고 있다. 모임에 가지도 말고 외출하지도 말라는 것이다. 사실상 자가격리 하자는 말과 같다. 이렇게 하는 것은 바이러스와의 전쟁에서 승리하고자 함이다.

 

 

 

사회적 거리를 다른 말로 표현하면 가깝지도 않고 멀지도 않음이라는 말이 될 것이다. 한자어로는 불가근불가원(不可近不可遠)’이 된다. 그런데 사회적 거리라는 말은 이미 불교에서 사용되고 있는 말이라는 사실이다.

 

 

 

수행승들은 마을에서 멀지도 않고 가깝지도 않은 곳에서 살았다. 너무 멀면 탁발하기가 쉽지 않고 너무 가까우면 수행에 방해되기 때문이다. 청정도론에 따르면 이상적 거리는 화살을 쏘았을 때 떨어진 곳이라고 했다. 실제로 2키로가량 거리가 적당하다고 한다.

 

 

 

사회적 거리는 적당한 거리를 뜻한다. 사실 모든 것에서 적당한 거리를 유지할 필요가 있다. 탁발할 때 멍에의 길이만큼 앞을 보는 것도 이에 해당된다. 수행승이 탁발 나갔을 때 정면을 응시한다든가 두리번거려서는 안된다. 시야에 들어오는 대상에 휘둘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소의 어깨에 올려져 있는 멍에의 길이만큼 앞을 보되 눈을 아래로 뜨고 걸으라는 것이다.

 

 

 

 

 

 

 

사회적 거리는 인간관계에서도 적용된다. 싫어 하는 사람이나 미워하는 사람이 있을 때 관계를 끊어 버리기 보다는 어느 정도 끈을 유지하는 것이다. 이는 악우와의 관계에게도 해당된다.

 

 

 

그가 하는 행동이 마음에 들지 않을 때가 있다. 그렇다고 싫어하는 마음을 내거나 무시해서는 안된다. 다만 말을 섞지 않으면 된다. 내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배척할 것이 아니라 연민의 마음을 내는 것이다. 연민의 마음으로 대하면 그 뿐이다.

 

 

 

그가 악행을 저질렀다면 연민의 마음을 내야 한다. 어떻게 내야 하는가? 업이 그사람의 주인이고, 업이 그사람의 상속자로 보는 것이다. 그가 자신의 행위에 대해 과보를 받을 것을 생각하면 연민의 마음이 일어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자주 가까이하면 친밀감이 생긴다. 자주 대화하면 정이 생길 것이다. 특히 남녀간의 관계에서 그렇다. 그래서일까 부처님은 열반에 들 때 아난다에게 당부한 것이 있다. 탁발 나갔을 때 여자를 쳐다보지 말라는 것이다. 쳐다보았다면 말하지 말라고 했다. 말을 했거든 알아차림(sati)하라고 했다. 이런 가르침은 재가불자에게도 적용된다.

 

 

 

이 세상의 반은 남자이고 반은 여자이다. 법우모임에서도 반의 법칙은 적용된다. 종종 이성법우와 만날 때가 있다. 가급적 피하려고 노력한다. 둘 만의 만남이 애정으로 변질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가능하면 세 명 이상 모임을 가지려고 노력한다. 이것도 불교적 사회거리두기라고 볼 수 있다.

 

 

 

너무 멀리해서도 안되고 너무 가까이해서도 안된다. 적당한 거리를 유지해야 한다. 너무 가까이하면 빠져 버리고 너무 멀리하면 소원해질 것이다. 사회적 거리두기는 마치 중도를 실천하는 것처럼 보인다.

 

 

 

중도는 양극단에 치우치지 않는 것을 말한다. 그렇다고 중간길을 의미하지 않는다. 불교에서 중도는 저 언덕으로 건너가기 위한 것이다. 저 언덕에 도달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이에 대한 게송이 있다.

 

 

 

 

 

내가 머무를 때에는 가라앉으며 내가 애쓸 때에는 휘말려 들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이처럼 머무르지도 않고 애쓰지도 않으면서 거센 흐름을 건넜던 것입니다.(S1.1)

 

 

 

 

 

상윳따니까야에서 가장 처음 나오는 가르침이다. 1장 제1절이라고 볼 수 있는데 부처님 가르침의 핵심이 요약되어 있다. 게송에 따르면, 저 언덕으로 건너가려거든 머물지도 말고 애쓰지도 말라고 했다. 이는 다름아닌 강력한 중도의 실천에 대한 것이다. 양극단에 머물지 말라는 말과도 같다. 이를 고락중도(苦樂中道)로 설명할 수 있다.

 

 

 

고락중도는 초전법륜경(S56.11)에서 볼 수 있다. 경에서 부처님은 고행과 쾌락은 무익한 것이라고 했다. 여기서 쾌락은 머무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감각적 쾌락에 탐닉하는 삶을 살았을 때 현실에 머무는 삶이 된다. 그런데 머물면 거센 흐름(暴流)에 빠져 버리고 만다는 것이다. 폭류에 휩쓸려 저 언덕으로 건너갈 수 없음을 말한다.

 

 

 

고행은 애쓰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고행을 통하여 애써서 저 언덕으로 건너 가고자 하는 것이다. 그런데 고행 역시 폭류에 휩쓸려 갈 뿐이라고 했다. 마치 수렁에서 빠져나오려고 하면 할수록 더 빠져들듯이, 자신의 몸과 마음을 학대하면 할수록 폭류에 휩쓸려 갈 뿐이라는 것이다.

 

 

 

부처님은 폭류를 건너기 위해서는 머물지도 말고 애쓰지도 말라고 했다. 이는 중도를 실천하는 것이다. 중간길을 가는 것이 아니라 바른 길을 가는 것이다. 바른 길은 다름아닌 팔정도를 말한다.

 

 

 

부처님은 팔정도를 닦아야 저 언덕에 이를 수 있다고 했다. 그런 팔정도는 사성제를 기반으로 한 것이고, 사성제는 연기의 구조로 되어 있다. 그래서 부처님은 중도를 설할 때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다.”로 시작되는 연기송과 함께 십이연기를 설했다. 그것도 십이연기 순관과 역관을 동시에 설했다.

 

 

 

연기는 조건발생하는 것이다. 조건발생이 있으면 조건소멸도 있기 마련이다. 이는 연기송에서 이것이 소멸하므로 저것이 소멸한다. 이것이 생겨나지 않으므로 저것도 생겨나지 않는다.”라고 설명된다. 이렇게 조건소멸 했을 때 저 언덕으로 건너갈 수 있다는 것이다.

 

 

 

중도에는 고락중도만 있는 것이 아니다. 니까야에는 유무중도, 단상중도 등 다양한 증도의 가르침이 있다. 그 중에서도 깟짜야나곳따의 경’(S12.15)에 실려 있는 유무중도(有無中道)가 잘 알려져 있다. 이는 절대적으로 있다(絶對有)’는 영원주의와 절대적으로 없다(絶對無)’는 허무주의에 대한 것이다. 이와 같은 양극단으로는 거센 윤회의 흐름을 건널 수 없음을 말한다.

 

 

 

거리두기를 하면 마음이 편하다. 한발자국 뒤로 물러나 보면 더 잘 볼 수 있다. 집착하면 빠져 버릴 수 있다. 좋아하는 사람에게 집착하면 그 사람에게 빠져 버리는 것과 같다. 그 사람에게 집착한다고 해서 그 사람을 얻는 것도 아니다. 집착하면 할수록 그 사람은 멀리 달아나려 할 것이다. 이럴 때는 적당한 거리두기가 필요하다. 요즘말로 밀고 당기는 밀당하는 것이다.

 

 

 

스토커가 있다. 스토커는 처음부터 스토커가 아니다. 스토커는 광팬으로부터 나온다. 열광적 지지자가 한순간에 스토커로 변한다. 광팬은 관심을 보여주지 않았을 때 스토커가 되는 것은 손바닥 뒤집기 보다 더 쉬운 일이다.

 

 

 

어떤 것이든지 집착하면 할수록 멀리 달아나 버린다. 이럴 때는 적당한 거리를 두어야 한다. 한발 떨어져서 보면 잘 보인다. 더 멀리 떨어져서 보면 더 잘 보인다. 주식을 팔아 버렸을 때 비로소 시장이 보이는 것과 같다. 나무만 보는 것이 아니라 숲을 보는 것이다. 그러나 너무 멀리 떨어지면 잘 보이지 않는다. 적당한 거리를 유지해야 한다.

 

 

 

사회적 거리두기는 반드시 물리적 거리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인간관계에 있어서도 거리 두기를 해야 한다. 그래서 불가근불가원이라 했을 것이다. 머물면 가라앉고 애쓰면 휩쓸려 간다.

 

 

 

 

 

2020-04-09

 

담마다사 이병욱

 

 

 

'코로나' 카테고리의 다른 글

코로나가 뭐길래  (0) 2020.05.09
재난기본소득 카드를 받았는데  (0) 2020.05.08
바이러스가 새시대를  (0) 2020.04.04
코로나대응 선진국이라는 국뽕  (0) 2020.03.20
팬데믹시대에 미래 패러다임은  (0) 2020.03.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