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

감기에 좋은 목련꽃차

담마다사 이병욱 2020. 5. 1. 18:24

 

 

 

감기에 좋은 목련꽃차

 

 

 

 

 

어제 오랜만에 모임에 참석했다. 코로나19 국내확진자가 제로에 달한 날이다. 무려 72일만의 일이라고 한다. 그러나 해외확진자는 4명 있어서 완전한 제로는 아니다. 그래서일까 어제서부터 나들이객들이 늘어난 것 같다. 더구나 부처님오신날을 시작으로 오월 첫째주 황금연휴가 시작되어서인지 고속도로가 오랜만에 체증이 심했다고 한다.

 

 

 

오랜만에 전철을 탔다. 세 달 만에 탄 것 같다. 그동안 모임이나 외출, 이동을 자제해 왔다. 스스로 자가격리하듯 지냈다. 전철에는 마스크한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주변을 보니 한사람도 예외없이 마스크를 하고 있다. 코로나19시대에 마스크가 이제 생활화된 듯하다.

 

 

 

모임에서 선물을 하나 받았다. 목련차 선물을 받은 것이다. 지난번 책 두 권을 택배로 보냈는데 이에 대한 보답으로 준비한 것 같다. 그러나 무엇보다 마음이다. 선물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아름다운 마음이 이미 생겨난 것이다.

 

 

 

 

 

 

 

선물은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게 하기에 충분하다. 주는 사람이나 받는 사람이나 서로서로 좋은 것이 선물이다. 그래서 선물은 원한 맺힌 자의 마음도 녹인다고 했다. 그래서 이런 게송이 있다.

 

 

 

 

 

보시는 길들여지지 않은 자를 길들이고

 

보시는 일체의 이익을 성취하게 하는 것,

 

보시하는 것과 사랑스런 말로써

 

머리를 들고 그리고 머리를 숙인다.”(Vism.9.39)

 

 

 

 

 

청정도론 자애수행편에 있는 게송이다. 보시하는 것에 대하여 머리를 들고 그리고 머리를 숙인다.”라고 했다. 이 말은 보시하는 자는 머리를 들고, 보시를 받는 자는 머리를 숙인다.”라는 말이다.

 

 

 

선물을 주는 자는 머리를 들고 있지만 선물을 받는 자는 고개를 숙이게 되어 있다. 이에 대하여 청정도론에서는 하나의 예를 들었다. 스리랑카에 찟딸라빱바따비하라 사원이 있는데 세 번이나 쫒겨난 장로 삔다빠띠까이야기(Vism.9.39)가 그것이다.

 

 

 

장로 삔다빠띠까가 어떤 이유로 사원에서 쫓겨났는지 알 수 없다. 다만 장로 삔다빠띠까는 대장로에게 선물을 했다. 그는 대장로에게 존자여, 이것은 8까하빠나의 가치가 있는 발우로 재가의 여신도인 저의 어머니께서 준 것으로 여법하게 얻은 것입니다. 위대한 재가여신도의 공덕을 얻게 하소서.”(Vism.9.39)라며 발우를 건네 주었다. 그 발우의 가치는 20마싸까에 해당되는 금화였다고 한다. 자신이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발우를 대장로에게 선물로 준 것이다.

 

 

 

보시는 크나큰 위력이 있다고 했다. 보시는 길들여지지 않은 자를 길들이고, 보시는 일체를 성취하게 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래서 사람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다는 것이다. 원한 맺힌 자의 마음도 녹일 수 있음을 말한다.

 

 

 

청정도론에 원적에 대한 자애가 있다. 원한맺힌 자에 대한 자애를 말한다. 원한맺힌 자에게 자애의 마음을 낸다고 하여 원한 맺힌 마음이 풀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법구경에서는 결코 이 세상에서 원한으로 원한은 풀리지 않는다. 원한의 여읨으로 그치나니 이것은 오래된 진리이다.”(Dhp.5)라고 했다. 원한은 원한으로 풀리지 않고 원한을 내려 놓아야 풀림을 말한다.

 

 

 

마음에 상처를 준 사람이 있다. 그 사람에 대한 분노의 마음이 일어날 때 어떻게 해야 할까? 이에 대하여 청정도론에서는 단계적으로 설명되어 있다.

 

 

 

그 사람에 대하여 분노가 생겨나면 첫째로, “무관한 자 다음에 원적인 자에게 자애를 닦아야 한다.”(Vism.9.13)라고 했다. 원한 맺힌 자에 대하여 자애를 닦을 때는 그 사람과 무관한 사람에게 먼저 자애의 마음을 내어서 분노를 누그러뜨러야 한다고 했다. 이렇게 무관한 자에 대하여 먼저 자애의 마음을 내면 원한 맺힌 마음은 이전의 마음이 되어 버려서 분노가 누그러뜨려 질 것이다.

 

 

 

그래도 분노가 가라앉지 않으면 두 번째로, 부처님이 말씀하신 톱의 비유등을 새기면서 누그러뜨러야 한다고 했다. 톱으로 사지를 절단하더라도 그때 만약 마음에 분노를 일으킨다면, 그는 나의 가르침을 따르는 자가 될 수 없다.”(M21)라는 가르침을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도 분노가 가라앉지 않으면 세 번째로, “청정한 믿음을 주는, 바로 그 상태를 새기면서 원한을 제거해야 한다.”(Vism.9.16)라고 했다. 이 말은 그 사람의 장점만 생각하는 것과 같다. 그 사람에게 단점도 있지만 장점도 없지 않을 수 없다. 그런 때에는 단점 보다는 장점을 보면 분노가 누그러질 수 있음을 말한다. 그래서일까 모임에서 불화를 일으키는 사람에 대하여 저는 그사람의 장점만 보고 가겠습니다.”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 단점만 보고서 쳐내기 보다는 그 사람의 장점을 생각해서 함께 가야함을 말한다.

 

 

 

그래도 분노가 가라앉지 않으면 네 번째로, 자신에게 충고하는 것이다. 이는 분노로 인하여 파괴적으로 되는 것을 경계하기 위함이다. 그래서 분노하는 자신에 대하여 분노를 그대가 참으로 즐기니, 그대와 같은 어리석은 자 누구인가?”(Vism.9.22)라며 스로 경책하는 것이다. 분노하면 상대방에게 타격을 주어서 고통이 되기도 하고 되지도 않을 것이다. 분명한 사실은 분노함으로 인하여 자신이 받는 고통이 더 크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러나 분노의 고통이 당장 그대 자신을 괴롭할 것이다.”(Vism.9.22)라고 경책하는 것이다. 분노는 찰나적인 것임에도 분노하면 자신만 손해일 것이다. 결국 자기자신에게 화를 내는 것과 같다. 그래서 왜 그대는 그대에게 화를 내는가?”(Vism.9.22)라며 경책하라고 했다.

 

 

 

그래도 분노가 가라앉지 않으면 다섯 번째로, “자신과 타인이 업의 주인인 것을 관찰해야 한다.” (Vism.9.23)라고 했다. 이는 업이 자신의 주인이고, 업이 자신의 상속자임을 아는 것이다. 그럼에도 분노하여 불선업을 짓게 되었을 때 악처에 태어나게 되는 요인이 될 뿐만 아니라 지금 괴로운 것이다. 그래서 분노하는 자에 대하여 양 손에 화염이 없는 숯불이나 똥을 쥐고서 타인에게 던지려고 하는 자처럼, 먼저 자신을 불태울 뿐만 아니라 악취나게 한다.” (Vism.9.23)라고 했다.

 

 

 

그래도 분노가 가라앉지 않으면 여섯 번째로, “스승이신 세존께서 행한 전생의 덕행을 새겨야 한다.”(Vism.9.25)라고 했다. 부처님은 보살로 살 때 4아승지 10만겁동안 초월의 길을 완성하기 위하여 이곳저곳에서 적들에게 살해당했는데 그때에도 분노의 마음을 내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어떠한 세계에서도 견줄 수 없는 부처님의 덕성을 생각했을 때 분노의 마음을 내는 것은 부적당하다는 것이다.

 

 

 

그래도 분노가 가라앉지 않으면 일곱 번째로, “그는 시작이 알려지지 않는 윤회에 대하여 성찰해야 한다.”(Vism.9.36)라고 했다. 이는 상윳따니까야에서 수행승들이여, 일찍이 한 번도 어머니가 아니었던 사람을 쉽게 찾을 수 없다.”(S15.14)라고 한 것에서 알 수 있다. 한량없는 윤회의 과정에서 누군가 한번쯤은 나를 낳아 준 어머니였을수도 있다는 것이다. 누구나 나의 한번쯤 나의 아버지였을 수도 있고, 형제 또는 자매였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생각했을 때 분노가 누그러뜨려질 수 있음을 말한다.

 

 

 

그래도 분노가 가라앉지 않으면 여덟 번째로, “자애의 공덕을 관찰해야 한다.”(Vism.9.37)고 했다. 이는 경전적 근거가 있다. 자애수행을 하면 “수행승들이여, 편안히 잠자고, 행복하게 깨어나고, 악몽을 꾸지 않고, 사람들에게 아낌을 받고, 귀신들에게조차 사랑을 받고, 신들이 보호해 주고, 불이든 독약이든 거의 해를 입지 않고, 빠르게 삼매에 들고, 안색이 맑고, 당황함이 없이 임종에 들고, 더 높은 경지에 이르지 못하더라도 하느님의 세계에 이르게 된다.(A11.15)라 하여 열 한가지 자애공덕이 있다고 했다.

 

 

 

그래도 분노가 가라앉지 않으면 아홉 번째로, “세계를 분석해야 한다.” (Vism.9.38)라고 했다. 그 사람에게 화를 낸다고 하지만 사실 알고 보면 그사람의 오온, 십이처, 십팔계에 대하여 화를 내는 것과 같다. 또 내가 화를 낸다고 하지만 나의 오온, 십이처, 십팔계에 대하여 화를 내는 것과 같다. 그래서 그대가 그에게 화를 내면서 누구에게 화를 내는가?”라고 했다. 이쪽 오온이 저쪽 오온에게 화를 내는 것이다. 그럼에도 내가 그에게 화를 내는 것이라고 착각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와 같이 세계를 분석하면 송곳끝의 겨자씨처럼 허공의 그림자처럼 분노는 발판을 잃는다.”(Vism.9.38)라고 했다. 송곳의 겨자씨는 찰나지간에 존재하는 것이다. 무상을 잘 관찰하면 분노는 순간적으로 일어났다가 사라지는 것이고 또한 실체가 없는 것이다. 무엇보다 분노하면 자신만 괴롭다는 것이다. 이처럼 실체도 없는 상대방에게 분노한다는 것은 그 사람의 머리카락에 분노하는 것과 같다.

 

 

 

그래도 분노가 가라앉지 않으면 열 번째로, “보시를 나누어야 한다.”(Vism.9.39)라고 했다. 이것이 최후의 방법이다. 앞서 언급한 대로 선물하는 것이다. 백번천번 마음을 내는 것 보다 한번 선물한 것만 못한 것이다. 그래서 자신의 소유물을 남에게 주고, 타인의 소유물을 자신이 받아야 한다.”라고 했다. 이렇게 주고받았을 때 보시하는 자는 머리를 들고 보시를 받는 자는 머리를 숙인다.”고 했다.

 

 

 

원한 맺힌 자라도 선물을 하면 마음이 누그러진다. 그것도 정성으로 선물을 하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청정도론 자애수행편을 보면 상대방에 대한 원한 맺힌 마음을 가라앉게 하는데 있어서 보시가 최후의 수단이라고 했다. 심지어 과거세부터 품어왔던 원한도 그 찰나에 가라앉는다.”(Vism.9.39)고 했다. 원한맺힌 자도 선물을 받을 때는 고개를 숙일 것이다.

 

 

 

요즘은 발렌타인데이라 하여 연인에게 사랑의 의미로 초콜릿을 선물한다. 선물하는 것은 백번천번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보다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강력한 것이다. 누구든지 선물을 받으면 고개가 숙여지게 되어 있다. 선물은 원한 맺힌 자의 마음도 녹이기에 충분하다. 그래서 청정도론에서는 자애수행의 최후수단으로서 보시하라고 했다.  

 

 

 

선물로 받은 목련꽃차를 시음해 보았다. 목련꽃차는 이전에도 마셔 본 적이 있다. 목련꽃차 특유의 향내가 난다. 여러 효능이 있지만 그 중에서도 한열(寒熱)과 풍사(風邪)를 없애준다고 했다. 감기에 좋은 것이다.  컨디션이 좋지 않아 으슬으슬 한기를 느끼고 있었는데 마침 목련꽃차가 있어서 마셨더니 효과를 보았다. 차기에 두 번 우려 마셨다.

 

 

 

 

 

 

 

 

 



 

 

 

 

 

 

2020-05-01

 

담마다사 이병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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