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 자신을 사랑하라
요즘 영화를 보면 폭력이 넘쳐난다. 케이블TV에서 제공되는 OCN, CGV, 씨네프 등 영화채널을 보면 서로 죽이고 죽는 폭력적인 장면이 난무한다. 사람의 목숨이 파리 목숨만도 못한 것이다. 그런데 폭력을 행사한 자도 결국 죽임을 당한다는 사실이다. 폭력적인 것에 있어서는 유튜브에서도 발견된다.
온갖 것들이 있는 곳이 유튜브이다. 그 중에서 구독자가 수십만명에 달하는 정치관련 유튜브는 폭력적이다. 언어로 폭력을 행사하는 것이다. 적이라고 생각하면 마치 조리돌림 하듯이 물고 뜯는다. 시기와 질투가 작렬하는가 하면 어떻게해서든지 타격을 주려고 한다. 특히 선거를 앞두고 비난과 비방에 열을 올리는데 욕설도 한다.
사람들은 내가 남을 비방할 수 있어도 남이 나를 비방하는 것을 참지 못하는 것 같다. 전형적인 ‘내로남불’식이다. 비판이 비난과 비방으로 변질되어 욕설에 이르렀을 때 폭망하게 된다. 실시간으로 소통되는 에스엔에스(SNS) 시대에서는 즉각적으로 과보를 받는다. 자기절제가 되어 있지 않는 자는 방송할 자격이 없는 것이다.
이 세상 어디를 둘러보아도 자신만큼 사랑스런 자는 없다. 빠세나디 왕이 “말리까여, 그대에게는 그대 자신보다 더 사랑스런 다른 사람이 있소?”라고 물었다. 현명한 말리까 왕비는 “대왕이시여, 나에게는 나 자신보다 더 사랑스러운 다른 사람은 없습니다. 대왕이시여, 그런데 전하께서는 자신보다 더 사랑스러운 다른 사람이 있습니까?”(S3.8)라며 되물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사랑스런 자는 자기자신이다. 왕비가 나라를 자신과 동일시하는 왕에게 “자신보다 더 사랑스러운 다른 사람이 있습니까?”라고 되물은 것은 이 세상에 자신보다 더 소중한 사람이 없음을 말한다. 이렇게 본다면 왕의 의중은 빗나갔다고 볼 수 있다. 은근하게 “이 세상에서 가장 사랑스런 사람은 대왕입니다.”라는 말을 기대 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미국영화를 보면 연인사이에서 또는 부부사이에서 사랑을 확인하는 장면을 종종 볼 수 있다. 그래서일까 “I love you.”라는 말을 달고 다니는 것 같다. 말끝마다 “사랑해, 사랑해!"라고 말하는 것이다. 마치 ‘립서비스’하듯이 말로서만 사랑이라는 말을 남발했을 때, 과연 그런 사랑을 진정한 사랑이라고 볼 수 있을까?
말리까 왕비는 꽃다발을 만들어 파는 가난한 집의 딸이었다. 어느 날 빠세나디 왕이 전쟁에 패하여 도망친 곳이 그곳 꽃집이었다. 그녀는 왕이 들어오자 잘 대해주었다. 그것을 인연으로 말리까는 빠세나디왕의 왕비가 된 것이다. 이런 은혜를 생각한다면 당연히 이 세상 그 누구보다도 왕인 자신을 사랑한다는 말을 했어야 했다. 또 기대했을 것이다. 그런데 왕비는 그런 기대와는 달리 왕비자신이 이 세상에서 가장 사랑스럽다고 했다.
현명한 왕이라면 실망하지 않았다. 왕비가 이 세상에서 자신이 가장 시랑스럽다고 말한 것은 사실 알고보면 왕이 이 세상에서 가장 사랑스런 존재라는 것을 우회적으로 표현한 것이기 때문이다.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은 자신이 사랑스런 것처럼 남도 사랑스럽다. 더구나 “자신보다 더 사랑스러운 다른 사람이 있습니까?”라며 되물었을 때, 이 말은 결국 "이 세상에 당신만큼 사랑스런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라는 말과 똑같다. 현명한 왕비의 역질문에 왕이 침묵한 것은 왕이 그 의미를 알았기 때문이다.
자신을 사랑하는 자는 남도 사랑하게 되어 있다. 자신을 사랑하는 자는 남도 자신만큼 사랑하기 때문에 해치지 않는다. 그런데 폭력을 행사하는 자는 특징이 있다는 것이다. 한결같이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자신을 하찮게 여기는 자는 남도 하찮게 여긴다. 자신을 해치는 자는 남도 해치기 마련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이렇게 말했다.
“대왕이여, 그렇습니다. 대왕이여, 그렇습니다. 어떤 사람들이든 신체적으로 나쁜 행위를 하고 언어적으로 나쁜 행위를 하며 정신적으로 나쁜 행위를 하면, 그들은 자기 자신을 사랑스런 사람으로 대하지 않는 것입니다. 만약 그들이 자기가 자신을 사랑스럽게 여긴다고 말하더라도, 여전히 그들은 자신을 미워하는 사람처럼 대하는 것입니다. 어떤 이유겠습니까? 그들은 미워하는 사람들이 서로에게 행하는 것처럼 자기 자신에게 행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그들은 자신을 미워하는 사람으로 대하고 있는 것입니다.”(S3.4)
경에서는 두 가지 반대되는 개념이 등장한다. 삐야(piya, 사랑하는 자)와 아삐야(apiya, 사랑하지 않는 자)이다. 이 두 용어는 능동적인 의미뿐만 아니라 수동적 의미(사랑받는 자, 사랑받지 않는 자)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자신을 사랑하는 자는 자신을 사랑스럽게 여기는 자가 된다. 반대로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자는 남들에게도 사랑받지 않는 자가 된다.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신, 구, 의 삼업에 대해 이야기했다.
신체적으로, 언어적으로, 정신적으로 악한 행위를 하면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라고 했다. 왜 그럴까? 자신에게 폭력적으로 대하는 사람은 자신에게 한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남에게도 폭력적으로 대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는 자신을 적으로 보기 때문이다. 자기를 증오하고 자신을 학대하는 자는 똑같은 방식으로 남에게도 그렇게 할 것이다.
신체적으로, 언어적으로, 정신적으로 악업을 일삼는 자는 자신을 적으로 여기는 자이다. 그런데 자신을 적으로 여기는 자는 남들도 적으로 여긴다는 사실이다. 이는 오계를 어기는 것으로 나타난다. 그래서 살생을 하고, 도둑질하고, 사음을 하고, 거짓말을 하고, 술을 마시는 행위를 하게 되는데, 이런 행위는 남도 해치는 것이 될뿐만아니라 결국 자신을 해치는 결과도 된다.
오계를 지키는 자는 자신을 사랑하는 자이기 때문에 지키는 것이 가능하다. 자신을 사랑하는 자는 자신을 사랑하는 것처럼, 남도 사랑할 것이기 때문에 남의 생명을 빼앗을 수 없고, 남의 것을 훔쳐갈 수 없고, 남의 아내를 탐할 수 없고, 거짓말하여 남을 속일 수 없고, 남에게 피해를 주는 음주행위를 할 수 없을 것이다. 오계를 지키지 않는 자는 자신을 하찮게 여기기 때문에 남도 하찮게 여겨 남에게 피해를 줄 것이다. 오계를 지키는 자는 자신도 사랑하고 남도 사랑하는 자이다.
80년 오월, 그때 당시 거리에서 외치던 구호가 있었다. 불의의 항거하여 “무릎꿇고 살기보다 서서 죽기원한다. 우리는 정의파다!”라고 외친 것이다. 정의를 위해서라면 같이 죽고 같이 살자고 했다. 그런데 ‘죽음’이라는 말에는 폭력적 요소가 있다는 것이다. 오로지 구호에 매몰되었을 때, 때로 폭력이 용인되기도 한다. 구호만 있고 삶은 없을 때 폭력적으로 된다. 이런 구호가 있다.
“불의에 살 것인가,
정의를 위해 죽을 것인가,
불의에 사는 것보다
정의를 위해 죽는 것이 낫다.”
참으로 멋진 말이다. 정의로운 사회, 정의로운 세상이 구현되길 바라는 구호이다. 그런데 정의만 강조했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질까? 정의로운 사회, 정의로운 세상을 위해서는 어느 정도 폭력은 용인될 수 있다는 뉘앙스가 있는 것이다. 목적달성을 위해서는 수단이 정당화될 수 있음을 말한다.
5공시절 구호는 ‘정의사회구현’이었다. 과연 그 시절에 정의로운 사회가 구현 되었을까? 정의라는 구호 하에 무자비한 폭력이 자행되었다. 본래 공권력에는 폭력적 요소가 있다. 정의라는 이름의 검찰권력, 경찰권력, 법원권력 등 모든 공권력은 때로 폭력과 동의어이다.
정의라는 이름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었다. 모든 구호에는 폭력과 희생이 따른다. 자유, 평등, 평화, 정의 등 모든 구호에는 폭력적 요소가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부처님 가르침에 답이 있다.
“Jīvitaṃ ca adhammena
dhammena maraṇaṃ ca
yaṃ, Maraṇaṃ dhammikaṃ
seyyo yaṃ ce jīve adhammikaṃ.”
“여법하지 못한 삶과
여법한 죽음이 있다.
여법한 죽음이,
여법하지 못한 삶보다 낫다.” (Thag.670)
여법한 삶(dhammena)’이 있다면‘여법하지 못한 삶(adhammena)’도 있을 것이다. 여법한 삶은 법다운 삶이다. 부처님 가르침대로 사는 삶이다. 본래 법다운 삶, 여법한 삶을 뜻하는 담메나(dhammena)는 영어로 ‘Justly, righteously’의 뜻이다. 번역하면 ‘정의로운 삶’이 된다.
부처님 가르침에 구호는 보이지 않는다. 그 대신 ‘삶’이 있다. 거룩한 자는 거룩한 삶을 살면 거룩한 자가 된다. 정의는 정의로운 삶을 사는 자에게서 실현된다. 오계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단지 “도둑질 하지 말라!”라고 하면 구호에 지나지 않는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불투도계에 대하여“주지 않는 것을 삼가는 학습계율을 지키겠습니다.”라고 한다. 이는 도둑질 하지 않는 ‘삶’을 말한다. 오계는 지키기 어려운 것이라서 평생에 걸쳐 완성된다는 의미가 있다. 그래서 ‘학습계율(sikkhāpada)’이라고 한다.
이 세상 어디를 둘러보아도 자신만큼 사랑스런 자가 없다. 자기가 자신을 사랑하는 것처럼 남들도 사랑할 것이기 때문에 남을 해치지 않는다. 오계를 지키면 남을 해치지 않기 때문에 자신도 해치지 않게 된다. 오계를 지키는 삶은 법다운 삶이고, 여법한 삶이고, 정의로운 삶이다.
정의는 구호에 있지 않고 삶에 있다. 정의로운 삶을 살면 정의로운 세상이 된다. 자유는 자유로운 삶에서, 평등은 평등한 삶에서, 평화는 평화로운 삶에서, 행복은 행복한 삶에서 구현된다. 이런 삶을 살려면 먼저 자기가 자신을 사랑해야 한다. 너 자신을 사랑하라!
2020-05-09
담마다사 이병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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