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성지순례기

불갑사 대웅전 앞에 서니

담마다사 이병욱 2020. 7. 12. 17:28

 

불갑사 대웅전 앞에 서니

 

 

일년에 한번 사촌들이 모인다. 고향에서 합동제사가 있는 날이다. 조부모와 백부모 제사를 한날에 모신다. 매월 양력으로 6월이었으나 올해는 윤사월이 되어서 7 11일 토요일에 모였다.

 

이번에는 차를 가져 갔다. 매년 KTX를 이용했으나 올해는 차를 이용하여 가기로 했다. 한꺼번에 두 가지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것이다. 제사도 참석하고 친구집도 방문하기 위한 것이다. 해남으로 귀농한 친구를 찾아 가는 것이다.

전남 함평군 월야까지 계산해 보니 312키로 거리이다. 3시간 20분가량 걸린다. 장거리이긴 하지만 도전해 보기로 했다.

 

떠나기 전에 만반의 준비를 했다. 차 상태를 점검한 것이다. 먼저 엔진오일을 교체했다. 또 기름은 가득 채워 두었다. 경차모닝은 용량이 999cc에 지나지 않는다. 차체가 약해 보지만 풀옵션이다. 에어백 등 있을 것은 다 있다. 차가 작기 때문에 간격을 유지하고 큰 차가 오면 무조건 피하는 전략을 썼다. 일종의 방어운전인 것이다.

 

불갑사를 향하여

 

새벽에 출발했다. 해가 뜨기 전인 오전 5 20분에 집을 나섰다. 서해안고속도로 남서울톨게이트를 빠져나와 화성으로 달릴 때 해가 떠 오르기 시작했다. 아침 찬란한 햇살에 초록의 대지가 빛났다. 이른 아침 쾌속질주가 상쾌했다.

 

제사는 낮 12시에 지낸다. 남는 시간에 무엇을 해야 할까? 사찰순례를 하기로 했다. 불갑사에 가 보기로 한 것이다. 영광 IC에서 빠져나오면 된다.

 

불갑사는 2009 6월에 가 본 바 있다. 그때 당시 작은 법회 모임에서 남도로 여러 군데 사찰 순례했었는데 그때 가 본 것이다. 이번에 11년만에 다시 가 보게 되었다.

 

 

불갑사에는 오전 9시 반 경에 도착했다. 코로나 때문일까 일주문에서 차량진입금지라는 팻말이 보였지만 무시하고 들어 갔다. 일주문에서 절 까지는 한참 걸리기 때문에 도저히 어쩔 수 없었다. 절 입구에 이르니 차를 몰고 오기를 잘 했다. 모두 차를 절 주차장에 주차했기 때문이다.

 

한국불교역사의 시작은 불갑사에서

 

불갑사는 큰 절이다. 보통 큰 절이 아니다. 거의 본사급이다. 어쩌면 본사급 보다 더 큰지 모른다. 가람의 전각 수로 따지면 삼보사찰 못지 않은 것 같다. 그러나 사람들은 불갑사를 잘 모르는 것 같다. 그것은 치우쳐져 있기 때문일 것이다.

 

불갑사는 한반도 남서쪽 끝 부분에 치우쳐져 있다. 서울과 수도권에서 거리도 멀 뿐만 아니라 배후에 큰 도시도 없어서 자주 가지 않는 길이다. 그래서일까 불갑사라는 절이 있는 줄조차 모르는 것 같다.

 

불갑사는 생각 보다는 꽤 오래된 절이다. 어쩌면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 된 절인지 모른다. 그것은 백제불교의 전래와도 관련이 있다.

 

중학교 다닐 때 국사시간에 백제불교 전래에 대하여 배웠다. 인도승려 마라난타 존자가 동진에서 백제로 불교를 전하여 주었다고 한다. 역사서에는 백제 침류왕 원년인 384년으로 되어 있다. 이것이 백제불교의 시작이다. 지금으로부터 1636년전의 일이다.

 

한국불교에 대하여 1700년 역사라고 말한다. 다종교 사회에서 역사와 전통은 자부심으로 작용한다. 유일신교가 이땅에 들어 온지는 이백년도 되지 않기 때문에 자부심을 가질만 하다. 그런데 백제불교 역사가 곧 한국불교 역사라는 사실이다. 그것도 영광에 있는 법성포로 들어 왔다. 마라난타 존자가 동진에서 배를 타고 상륙한 것이 한국불교 역사의 시작이라고 볼 수 있다.

 

법성포에 가 본 적이 있다. 역시 2009 6월 순례했을 때의 일이다. 법성포에 가면 마라난타사가 있다. 인도풍으로 지은 절이다. 법전스님이 조계종 종정스님으로 있을 때 완성된 것이다. 이처럼 백제불교 도래지에 여법한 가람이 세워진 것은 법전스님이 영광출신인 이유도 없지 않아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불갑사는 누가 세웠을까?

 

전통사찰 창건이야기를 보면 공통된 내용이 있다. 거의 대부분 원효대사 아니면 의상대사가 창건했다는 이야기를 전한다. 그러나 불갑사는 다르다. 대웅전을 소개 하는 안내판에 따르면불갑사는 인도 간다라의 고승 마라난타존자께서 남중국 동진을 거쳐 백제 침류왕 원년(甲年, 384)에 영광 법성포로 들어와 모악산 자락에 최초로 창건한 백제불교 초전성지이다.”라고 기록해 놓았다.

 

불갑사는 마라난타 존자가 창건한 것이라고 한다. 외국인이 창건주인 것이다. 그것도 인도의 고승 마라난타가 창건했다고 한다. 더구나 백제불교 초전성지(初轉聖地)라고 했다. 한반도에 처음으로 불교가 전파된 역사적 장소인 것이다.

 

마라난타 존자는 어떤 불교를 전파했을까?

 

마라난타 존자는 어떤 불교를 전파했을까? 서기 384년이라면 중국에서 중국화된 불교가 나오기 이전이다. 중국에서는 위진남북조시대에 본격적으로 불교가 서역을 통해서 전래 되었는데 같은 시기에 한반도에도 불교가 전래된 것이다. 이는 자연스런 현상이다. 본래 문화는 마치 물이 위에서 아래로 흐르는 것처럼 스며든다. 중국에 전래된 불교가 자연스럽게 한반도까지 이른 것이다. 그 첫 상륙지점이 법성포이고 이곳 불갑사에서 처음으로 불교가 전파된 것이다. 그래서 불갑사를 초전성지라고 했을 것이다.

 

마라난타 존자가 전한 불교는 초기불교일 가능성이 높다. 왜 그럴까? 현장스님의 인도여행기에 따르면 7세기 인도대륙에서 주류는 초기불교였다고 말한다. 흔히 소승불교 또는 부파불교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때 당시 인도에서는 대승불교가 있긴 있었지만 소수였을 뿐이다.

 

법현스님은 4세기에 인도에 갔었는데 그때도 초기불교가 주류였다고 한다. 마라난타 존자는 4세기 사람이다. 법현스님이 인도여행 할 때 시기에 살았던 스님이다. 이렇게 본다면 마라난타 존자가 전달한 불교는 초기불교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불갑사에 대하여 불갑사측에서는 스스로 초전성지라고 했다. 그러나 어떤 불교를 전달했는지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 중국에 불교가 전래되는 시점이라면 경전위주의 불교이었을 것이다. 그것은 아마도 부처님의 근본가르침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사성제와 팔정도, 십이연기, 오온, 십이처, 십팔계 등과 같은 근본 가르침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그러나 처음부터 어려운 가르침을 전달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처음에는 시계생천 등 쉬운 가르침부터 시작하여 점차 보다 높은 가르침으로 전달했을 것이다. 그러나 자료가 남아 있지 않아서 어떤 가르침을 펼쳤는지 알 수 없다.

 

본사급 사찰에서 수많은 성보문화재를 보면

 

불갑사에 오면 그 규모에 있어서 깜짝 놀라게 된다. 무려 30개 가까이 되는 전각을 보면 삼보사찰 못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불사는 누가 한 것일까? 마치 한반도 한쪽 귀퉁이 치우쳐져 있어서 사람들의 발길이 닿지 않는 곳에 이런 거대사찰이 있다는 것이 불가사의할 정도이다.

 

 

오늘날 불갑사는 본사급 거대사찰이 되었다. 그런데 오래 전부터 불갑사는 큰 절이었다는 것이다. 고려말 진각국사가 주석할 때에는 천명의 수행승이 살았다고 한다. 한때 본사에 40여동 500여칸이 되었고 산내 31암자를 거느린 대찰이었다는 것이다. 그런 옛날의 영화를 오늘날 불갑사에서 보는 것 같다.

 

 

불갑사는 볼 거리가 많다. 본사급에서나 볼 수 있는 성보박물관이 있을 정도이다. 또한 불갑사에는 문화재도 많다. 대웅전, 팔상전, 칠성각, 일광당, 명부전, 만세루, 천왕문 등은 이삼백년 되었다. 대웅전에 있는 목조석가여래삼존불좌상은 보물 1377호이다. 이 밖에도 사천왕상, 나한상 등 많은 성보가 있다.

 

불갑사 사천왕상과 관련하여

 

불갑사의 중심은 대웅전이다. 대웅전으로 가려면 여러 관문을 거쳐야 한다. 가장 먼저 금강문이 있다. 다음으로 천왕문이다. 천왕문에는 사천왕상이 있다. 기록에 따르면 17세기 중엽에 조성된 것이라고 한다.

 

 

 

 

불갑사 사천왕상과 관련하여 부친의 이야기를 들었다. 부친이 초등학교 때 불갑사로 수학여행 갔었다고 한다. 그때 불갑사에서 하루 밤을 자게 되었는데 사천왕상을 처음 보았다고 한다. 무시무시하게 생긴 모습을 얘기했다.

 

사천왕상을 보면서 부친이 보았던 사천왕상을 또 보게 되었다. 세월은 흘렀지만 그 때 사천왕상은 여전히 그대로 무시무시한 형상을 하고 있는 것이다.

 

사천왕문 관문을 지나면 너른 마당이 펼쳐진다. 사방이 전각으로 되어 있다. 마치 구중궁궐에 와 있는 것 같다. 불갑사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마당이다.

 

 

 

대웅전 앞에 서니

 

다음에서 세 번째 관문은 만세루이다. 만세루 역시 이삼백년된 오랜 건물이다. 전란에서 불타지 않고 남아 있는 것이 기적 같은 일이라고 볼 수 있다. 만세루를 지나면 대웅전 마당에 이른다.

 

어느 절이든지 중심이 되는 법당이 있다. 석가모니부처님을 주불로 모셨다면 대웅전이 가장 중심이 된다. 그런데 불갑사 대웅전은 보물과도 같다는 것이다.

 

대웅전은 매우 잘 생겼다. 한눈에 보기에도 눈에 쏙 들어 올 정도이다. 그렇다면언제 지은 것일까? 기록에 따르면 1764년에 건립되었다. 정유재란 때 모두 다 타버렸는데 왜란이 끝나고 복구한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256년된 건물 앞에 서 있는 것이다.

 

대웅전 용마루에 함체가 있는데

 

불갑사 대웅전과 관련하여 사촌형님에게 들은 것이 있다. 대웅전 용마루에 하나의 함이 있다는 것이다. 그 함은 중국에서 가져온 것으로 유골이 들어 있다고 했다. 처음에는 이런 말을 믿지 않았다. 그러나 사실이었다. 사진을 보니 정말 용마루 중앙에 함체가 있는 것이었다. 대웅전 용마루에는 왜 함체가 있는 것일까?

 

 

불갑사 대웅전에 있는 불상은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 목조로 된 것으로 목조석가여래삼존불상이라고 한다. 보물 제1377호이다. 그런데 불상은 특이하게도 대웅전 정면을 향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마치 동향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불상은 남향하고 있다.

 

불갑사는 산의 서쪽에 자리하고 있기 때문에 대웅전은 서향이다. 불상도 당연히 서향이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불상은 마치 좌향좌 한 것처럼 남쪽 방향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용마루 함과 함께 안내판의 설명문을 보면이러한 불단의 측면배치 양식은 대웅전 지붕 용마루 중앙의 보탑과 한쌍을 이루는 것으로서 남방불교의 양식이 전래된 것이다.”라고 되어 있다.

 

불갑사 대웅전은 매우 특이 하다. 용마루에 함체 같은 보탑이 있는가 하면 불상은 좌향좌를 하고 있다. 더구나 이런 양식이 남방불교의 전래와 관련이 있다고 했다. 이는 인도고승 마라난타 존자와 관련이 있다. 마라난타가 전한 불교가 남방불교, 즉 오늘날 테라와다 불교와 유사한 초기불교였을 가능성이 높다.

 

불갑사 대웅전 용마루 보탑에 대하여 검색해 보았다. 월간해인에 따르면불갑사 대웅전 용마루 중앙에는 그 유래와 용도를 알 수 없는 독특한 모양의 기와가 얹혀 있다. 귀면 위에 우진각 지붕모양의 목조건물이 있고 지붕 위에는 보주가 놓여있다. 그런데 이 보주 윗면에 원구 모양의 무엇을 얹었던 흔적이 남아 있어 보륜을 쌓았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라는 글이 있다.

 

월간해인에 따르면 보탑 위에 보륜이 있었을 것이라고 한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마치 탑처럼 장식한 것이었다고 볼 수 있다. 오늘날 남방 테라와다불교에서 볼 수 있는 보탑 같은 것이다. 스리랑카의 경우다고바이고, 미얀마의 경우파고다가 이에 해당될 것이다.

 

불갑사 대웅전 용마루 중앙에 마치 함처럼 생긴 보탑의 흔적이 있다. 원래 모습을 복원한다면 남방불교에서나 볼 수 있는 탑이 세워져 있을 것이다. 마치 대웅전 전체가 탑과 같은 형태가 된다. 그래서 안내판에서남방불교의 전래와 관련이 있다고 했을 것이다.

 

불갑산이 웅웅 울었다는데

 

고향사람들에게 있어서 불갑산은 무서운 산으로 기억되고 있다. 한국전쟁 당시에 불갑산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죽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이념 갈등에 따른 것이다. 그때 당시 어느 지역에서나 있었던 좌우이념 갈등에 대한 것이다.

 

이번 고향방문에서 나이 든 사촌 형님에게 들은 이야기가 있다. 한국전쟁이 나기 전에 불갑산이 울었다는 것이다. 사촌 중에서도 가장 큰 형님은 해방이 되었을 때 초등학교 2학년이었다고 한다. 사촌 큰 형님은 나이가 거의 부모뻘이다. 형님은 해방후 한국전쟁이 일어나기까지 5년간에 일어 났던 일을 이야기했는데 어느 날 불갑산이 울었다는 것이다.

 

큰 형님은 불갑산이 우는 소리를 들었다고 한다. 큰 형님에 따르면웅웅소리내며 울었다고 한다. 그때 당시 지역에 살던 사람들은 모두 불갑산이 우는 소리를 다 들었다고 한다. 그때 당시 어른들이 말하기를 전쟁이나 큰 일이 날 징조라고 했다는 것이다.

 

불갑산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죽었다. 산 가까이에 있던 동네에서는 과부들이 많았다고 한다. 그런 불갑산은 빨치산의 근거지이기도 했다. 어른들 말에 따르면 낮에는 대한민국이고 밤에는 인민공화국이었다고 한다. 하루에 밤낮으로 주인이 매일 바뀌는 삶을 산 것이다. 그래서일까 남부군의 저자 이태는역사의 수레바퀴에 치이여 죽었다.”라고 묘사했다.

 

불상은 그대로인데

 

불갑사 대웅전 앞에 섰다. 그 옛날에도 대찰이었을 것이다. 전란 중에 모두 소실 되었지만 이후 복원되었다. 그렇게 이삼백년 내려오다가 최근에 크게 중창되었다. 그 규모는 본사급이고 삼보사찰급이다.

 

불갑사 대웅전에서 삼배를 했다. 불법승 삼보에 대한 삼배이다. 이곳에서 수 많은 사람들이 삼배 했을 것이다. 그리고 수많은 스님들이 다녀 갔을 것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거쳐 갔을 것이다. 그 중에는 고향마을 사람들도 있었을 것이다.

 

대웅전 방향과 달리 좌향좌한 불상을 본다. 목조불상으로 금칠을 한 것이다. 자비로운 모습이다. 옛날 사람들도 이 모습을 보았을 것이다. 고향사람들도 이 모습을 보았을 것이다. 불상은 그대로인데 서로 다른 시간에서 본 것이다.

 

불상은 수백년전 그대로의 모습으로 변함이 없다. 불상만 변함없는 것은 아니다. 가르침도 변함없이 전승되어 왔다. 입에서 입으로, 입에서 문자로 전승되어 왔다.

 

 

 

오전 10시에 예불을 보았다. 한스님이정구업진언하며 천수경을 독송하기 시작했다. 노보살 한 명이 뒤에 앉아 있다. 법당에는 단 두 명만 있을 뿐이다. 때가 되니 사시예불을 본 것이다.

 

불교가 1700년전에 전래된 이래 예불은 끊이지 않고 있다. 이 법당에서 수 많은 출가승들이 예불을 올렸을 것이다. 집에서 집없는 곳으로 출가한 그들은 출가의 목적을 달성했을까? 목탁을 두들기며 누가 보건 말건 예불을 올리는 스님을 보면 해야 할 일을 묵묵히 다하는 것 같다.

 

 

그는 오래지 않아 훌륭한 가문의 자제들이 그러기 위해 올바로 집에서 집 없는 곳으로 출가했듯이 위없는 청정한 삶을 지금 여기에서 스스로 알고 깨달아 성취했다. 그는태어남은 부서지고 청정한 삶은 이루어졌다. 해야 할 일을 다 마치고 더 이상 윤회하지 않는다.’고 분명히 알았다. 마침내 존자 쎄니야는 거룩한 분 가운데 한 분이 되었다.”(M57)

 

 

 

 

2020-07-12

담마다사 이병욱

 

 

'국내성지순례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일본풍 동국사에서 본 조동종 참회비  (0) 2020.09.21
함평 용천사 가는 길에  (0) 2020.07.14
사나사에 보리수가 있었네  (0) 2020.06.29
수종사 전망대에 서니  (0) 2020.06.29
지인에서 친구로  (0) 2020.06.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