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성지순례기

일본풍 동국사에서 본 조동종 참회비

담마다사 이병욱 2020. 9. 21. 11:59

 

일본풍 동국사에서 본 조동종 참회비

 

 

12일 가족여행 다음날 아침이다. 고군산군도 대장도 팬션을 빠져나와 다시 군산을 향했다. 목적지는 동국사이다. 군산에 가면 반드시 들러야 할 필수 코스중의 하나이다. 특히 불교인이라면 놓칠 수 없다.

 

 

치욕의 건축물을 보고서

 

동국사는 익히 들어서 알고 있다. 공중파 방송에서도 소개된 바 있다. 일본식 건축물이 특색이다. 법당이 일본식절의 법당이어서 사람들의 관심을 끌고 있다. 어떻게 일본식 법당이 오늘날까지 존재하는 것일까?

 

지금은 사라져 존재하지 않는 중앙청건물이 있었다. 조선총독부청사를 말한다. 광화문 뒷편 근정전 앞에 자리잡았던 고딕양식의 위풍당당한 건물이었다. 그러나 김영상정부가 들어서면서 파괴되었다. 명목은 민족정기를 바로 세운다는 것이었다.

 

조선총독부 건물에 대한 논란은 분분하다. 우리민족의 아픔과 치욕을 고스란히 간작한 조선총독부 건물은 파괴되어야 마땅하다. 그런 한편 역사적 가치가 있는 건물을 함부로 파괴해 버린다면 경복궁을 파괴한 그들과 다를 바 없을 것이다. 분명한 사실은 조선총독부 건물은 파괴되어 지금 존재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오늘날 대한민국에서 왜색건축물을 보기가 쉽지 않다. 치욕의 역사를 바로잡고 민족정기를 세우기 위해서는 창조적 파괴가 필요하다. 그러나 치욕의 역사도 역사이다. 치욕의 건축물을 보고서 역사의 교훈으로 삼을 수도 있는 것이다. 군산의 동국사 법당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왜색이 농후한 동국사에서

 

동국사는 왜색이 짙다. 일본식 건축물이 오늘날까지 고스란히 남아 있는 것이다. 파괴의 시대에 파괴되지 않고 남아 있는 것이 기적에 가깝다. 파괴되지 않고 남아있어서일까 이제 군산의 명소가 되었다. 군산을 찾는 사람들이라면 반드시 들러야할 필수 투어코스가 된 것이다.

 

 

동국사에 들어서면 왜색풍이 물씬 풍기는 것 같다. 종루도 왜색이고, 법당도 왜색이다. 법당과 연결되어 있는 요사채도 왜색이다. 심지어 법당 뒤에 있는 맹종죽 군락도 일본 것이다.

 

 

 

 

 

온통 왜색 일색인 동국사에서 왜색 아닌 것도 있다. 그것은 법당에 모셔져 있는 불상과 종루 옆에 있는 소녀상이다. 그리고 새로 지운 법당건물이다.

 

 

동국사 법당은 전형적인 일본식법당이다. 겉으로 보기에도 우리나라 법당과 확연히 차이가 난다. 팔작지붕 형태는 비슷하지만 경사가 급하고 용머리나 추녀 끝이 덜 들려져 있다. 무엇보다 화려한 단청이 보이지 않는다.

 

 

법당에 들어가 보니

 

일본식 절을 보면 공포와 용머리 등으로 이루어진 화려함이 없다. 단순하고 소박한 것이 특징이다. 법당 내부는 어떨까? 들어가 보니 마치 교실처럼 보인다. 바닥이 모두 마루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법당은 겉에서 보는 것과 달리 공간이 매우 넓다. 이삼백명은 앉을 수 있는 너른 강당 같기도 하다. 바닥은 미끈하다. 평탄한 것이 특징이다. 삐걱거리는 한국법당과는 대조적이다.

 

법당에 모셔진 불상은 한국불상이다. 법당의 겉모습과 속모습은 전형적인 왜색이지만 천정에 매달려 있는 연등과 삼존불은 한국 것이어서 혼합된 모습이다.

 

 

불상은 한국불상이다. 그런데 한국의 법당에서 보는 것과는 차이가 있다. 그것은협시불 자리에 가섭과 아난이 있기 때문이다. 이는 관세음보살과 지장보살을 협시불로 하고 있는 전형적인 한국법당 내부와 다른 것이다.

 

 

 

동국사 대웅전을 보면 겉모습은 왜색이지만 정신만큼은 한국식이다. 일본절이라고 하여 일본불상을 모셔 놓지 않은 것이다. 왜색과 한국식의 기묘한 조화라고 해야 할 것이다.

 

조동종 참회비를 보면

 

동국사에 가면 참회비가 있다. 일본 조동종에서 작성한 것이다. 이로 알 수 있는 것은 동국사는 일본 조동종사찰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일본 조동종은 한국의 조계종과 같은 선종계통이다. 그렇다면 조동종에서는 무엇을 참회한다는 것일까? 서두를 옮겨 보면 다음과 같다.

 

 

우리 조동종은 명치유신 이후 태평양 전쟁 패전에 이르기까지 동아시아를 중심으로 아시아 전역에서 해외포교라는 미명 하에 당시의 정치권력이 자행한 아시아 지배 야욕에 가담하거나 영합하여 수많은 아시아인들의 인권을 침해해 왔다. 또한 탈아입구를 내세워 아시아인들과 그들의 문화를 멸시하였으며, 일본 국체와 불교에 대한 우월의식에서 일본 문화를 강요하여 민족적 자긍심과 존엄성을 훼손하는 행위를 해왔다. 게다가 불교적 교의에도 어굿나는 이런 행동들을 석가모니 세존과 삼국전등의 역대 조사의 이름을 빌어 행해 왔던 것이다. 참으로 부끄러운 행위라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참회문은 일본 조동종에서 발표된 참사문에서 발췌한 것을 조각해 놓은 것이다. 2012년에 건립된 비문이다.

 

비문의 서두를 보면 참으로 부끄러운 행위라고 했다. 종교가 정치권력의 수단으로 전락했던 것을 말한다. 이는 일본의 침략과 함께 일본종교도 들어 갔음을 말한다. 마치 서세동점시절 식민지개척과 함께 기독교를 전파했던 것과 조금도 다를 바 없다. 한손에는 총을 들고 한손에는 바이블을 든 것과 같다.

 

치욕의 역사를 잊지 않으려는 듯

 

오늘날 동국사라 불리우는 왜색풍의 절의 역사는 일본제국주의의 침략과 함께 시작되었다. 한일병합 1년전 1909년 일본 조동종 승려 우찌다에 의해서 금강선사(錦江禪寺)라는 이름으로 설립된 것이 시초이다. 1913년에 현 위치에 자리잡았으니 올해로 107년된 절이다.

 

 

어떤 건축물이든지 백년 이상 되면 보존의 가치가 있다. 설령 그것이 치욕의 상징일지라도 역사적 교훈으로 삼아야 한다. 이런 측면으로 본다면 조선총독부 건물의 파괴는 아쉬운 점이 없지 않아 있다.

 

동국사의 전신 금강선사가 파괴되지 않은 것은 이른바 적산가옥을 불교계에서 접수했기 때문이라고 본다. 일본사찰을 한국사찰로 변경하여 계속 종교시설로 사용한 것이다.

 

동국사는 왜색이 농후하다. 그러나 치욕의 역사를 잊지 않으려고 하는 것 같다. 이는 소녀상 건립으로 알 수 있다. 일본식 종루 옆에 작은 소녀상이 그것이다. 2015년 군산시민과 일본인의 성금을 모아 만든 위안부 기림비’라고 한다.

 

 

우리는 맹세한다. 두 번 다시 잘못을 범하지 않겠다고.”

 

진정한 참회는 받아 주어야 한다. 이는 부처님도 강조한 것이다. 그래서 다음과 같이 말씀했다.

 

 

진정으로 참회할 때 참회를 받지 않고

울화를 품고 분노가 무거운 자는 원한에 묶이네.

나는 원한을 즐겨하지 않기에

그대들의 참회를 받아들이네.(S1.35)

 

 

참회는 진정성이 있어야 한다. 허공에 참회하거나 대리참회한다면 진정한 참회라고 볼 수 없다. 참회는 당사자에게 해야 한다. 그것도 진정한 참회를 해야 한다.

 

참회는 면전에서 해야 한다. 어떻게 하는 것일까? 청정도론에 따르면 쪼그리고 앉아서 참회하는 것이다. 대중들에게 자신의 허물에 대하여 존자들이여, 저는 이러이러한 이름의 존자에게 이런 말을 했는데, 그 존자가 저를 용서하기를 바랍니다.”(Vism.13.85)라며 참회해야 한다는 것이다.

 

참회를 하면 참회를 받아 주어야 한다. 무릎 꿇고 참회했음에도 참회를 받아 주지 않는다면 옹졸하다는 말을 들을 것이다. 그래서 진정으로 참회할 때 참회를 받지 않고 울화를 품고 분노가 무거운 자는 원한에 묶이네.”(S1.35)라고 했다.

 

조동종의 참회는 진정한 참회라고 볼 수 있을까? 비문에 적혀 있는 것을 보면 우리는 맹세한다. 두 번 다시 잘못을 범하지 않겠다고.”라는 문구가 두 번 보인다. 이는 과거 일본의 억압으로 인하여 고통받은 아시아아 사람들에게 사죄하는 것이다. 종교가 권력에 편승되어서 가해자 입장이 되었던 것을 사죄하는 것이다.

 

 

진정으로 뉘우치고 참회할 때는 받아 주어야

 

 

 

베이붐세대이다. 베이부머로서 일제 강점기 시절을 겪어 보지 않았다. 다만 교과서에 배운 역사지식으로 일본제국주의의 만행을 알고 있을 뿐이다. 그런데 일본 조동종에서는 참사문을 만들어 전세계에 공표했다. 이를 진정한 참회로 알고 받아들여야 할까?

 

 

참회는 당사자를 찾아가 무릎 꿇고 면전에서 해야 한다. 그래야 진정한 참회로 받아 줄 수 있다. 그러나 당사자들이 이미 사망했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청정도론에 따르면 무덤에라도 가서 참회해야 한다고 했다. 이렇게 본다면 조동종의 참회는 어느 정도 진정성이 엿보인다. 이는 우리는 맹세한다. 두 번 다시 잘못을 범하지 않겠다고.”라고 명문화한 것에서 알 수 있다.

 

 

진정으로 참회할 때 받아 주어야 한다. 무릎 꿇고 참회했음에도 원한의 마음이 풀어지지 않는다면 그것도 허물이다. 그런데 모든 번뇌를 여읜 자는 처음부터 원한이 없었다는 것이다. 상대방이 설령 자신에게 잘못을 했다고 하더라도 원한의 마음이 없기 때문에 참회를 하든 말든 마음의 원한이 없음을 말한다. 이는 부처님의 마음이다. 그래서 나는 원한을 즐겨하지 않기에 그대들의 참회를 받아 들이네.(S1.35)라며 참회를 기꺼이 받아 들이는 것이다.

 

원한에 묶인 자는 참회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진정한 참회를 해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원한에 묶여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번뇌가 다한 성자는 원한이 있을 수 없어서 원한에 묶여 있지 않다. 진정으로 뉘우치고 참회할 때는 받아 주어야 한다.

 

 

일본의 진정한 사과가 이루어지려면

 

성냄의 뿌리가 뽑힌 성자에게는 참회하지 않는다고 하여 원한이 있는 것도 아니고, 참회한다고 하여 원한이 풀어지는 것도 아니다. 애초부터 원한이 없기 때문에 참회를 하든 말든 원한의 마음이 없어서 원한에 묶이지 않는다.

 

인간만이 부끄러움을 알 수 있다. 이는 인간이 동물과 구별되는 가장 큰 이유라고 볼 수 있다. 조동동은 과거 자신들의 행위가 부끄럽다고 했다. 그래서 과거 그들의 포교 역사에 있어서 고통받았던 아시아인들에게 진심으로 사죄하며 참회하고자 한다.”라고 했다. 이것은 어찌보면 일본정부를 대신해서 대리사과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일본정부는 한국인들에게 사죄하고 사과했을까? 아직까지 분명하게 말한 것 같지는 않다. 외교적 수사를 사용하여 통석의 념정도에 그친 것 같다. 일본의 진정한 사과가 이루어지려면 조동종의 참사문처럼 명문화해야 한다. 그리고 곳곳에 비석으로 남겨 놓아야 할 것이다. “우리는 맹세한다. 두 번 다시 잘못을 범하지 않겠다.”라고.

 

 

 

 

2020-09-21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