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성지순례기

정진하는 모임은 최상의 모임, 향천선원 우 실라 사야도 법회

담마다사 이병욱 2020. 10. 19. 12:51

 

정진하는 모임은 최상의 모임, 향천선원 우 실라 사야도 법회

 

 

향천선원, 오래 전부터 한번 가보고자 했다. 1018일 일요일 점심 때 장충체육관 근처에 있는 향천선원으로 향했다. 차를 몰고 갔다. 주차장이 문제가 되었다. 주택가에 있는 선원에 가니 주차할 수 있는 마땅한 공간이 없었다. 근처 공영주처장도 만차였다. 할 수 없이 길거리에 주차했다.

 

향천선원은 어떤 곳일까? 법요집에 쓰여 있는 안내문을 보니 향천선원은 테라와다 불가의 전통으로 덜도 더하지도 않은 부처님의 가르침과 수행체계를 전하고 공유하는 전법의 터전입니다.”라고 소개되어 있다.

 

설명문에서덜도 더하지도 않은이라는 말이 눈에 띈다. 이는 무슨 뜻일까? 이어지는 안내문에서 알 수 있다. 6차에 걸친 결집본을 토대로 하여 여기에서 더하지도 않고 빼지도 않은 것을 말한다. 이에 대한 실천으로서 보시, 지계, 수행이라는 선업의 체계와 계학, 정학, 혜학이라는 수행의 체계를 들고 있다.

 

아마 처음에는 대승전통에서부터 시작했을 것이다. 이는 대한불교조계종 대각회에 소속되어 있는 것으로 알 수 있다. 선원 입구 포대화상 불상으로도 짐작된다. 법당에 있는 불단에서도 흔적을 찾을 수 있다. 한국불교 전통에서 볼 수 있는 화려한 수미단이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석가모니 부처님의 좌우에 보관을 쓴 보살상이 있다. 그러나 지금은 테라와다불교 전통의 가르침을 전하는 전법과 수행도량으로 거듭난 것 같다.

 

우 실라 사야도와 인연

 

우 실라 사야도와 인연이 있다. 지난 9월 초 연희동 찻집에서 청식공양에 초대받아 참석한 것이 인연이 되었다. 이를 미얀마불교의 힘은 디서 나올까?’(2020.9.9)라는 제목으로 글을 올린 바 있다. 이런 인연으로 사야도가 수행지도하고 있는 향천선원을 찾아 가서 인사드리고 싶었다.

 

법회는 오후 2시에 예정되어 있었다. 우 실라 사야도가 주관하는 법회이다. 오전 수행과 점심공양 등 일정이 있었지만 오후법회만 참석했다.

 

법회참석 인원은 20명가량 되었다. 한국말이 유창한 미얀마 사야도의 법회는 들을만 하다. 발음이 약간 어색하기는 하지만 잘 귀 기울여 들으면 어떤 말인지 알 수 있다. 외국인 스님이 우리말로 유창하게 법문하는 것은 희유한 일이다.

 

 

우 실라 사야도는 약 1시간 20분가량 법문했다. 법문은 모두 유튜브에 공개된다. 법문을 듣고 노트했다. 한번 듣는 것으로 그쳐서는 안된다. 잘 새겨 들어야 한다. 그러나 기억에는 한계가 있다. 물론 유튜브에 올려져 있는 것을 다시듣기로 들으면 될 것이다. 그러나 가장 좋은 것은 노트한 것을 바탕으로 글을 써 보는 것이다.

 

망갈라숫따는 행복경이 아니라 축복경

 

우 실라 사야도는 망갈라숫따에 대하여 법문했다. 망갈라숫따(Sn2.4, Khp.5)는 테라와다불교의 예불문이자 수호경이다. 라따나숫따(Sn2.1, Khp.6)와 멧따숫따(Sn1.8, Khp.9)와 함께 삼대 예불문으로 잘 알려져 있다.

 

망갈라숫따는 어느 정도로 중요할까? 가장 고층이라 말하는 숫따니빠따에도 실려 있고 동시에 쿳다까니까야에서 쿳다까빠따(小誦經)에도 실려 있다. 참고로 쿳다까빠따에 실려 있는 아홉 개의 경은 2천년 전부터 불교인이라면 모두 외워야 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향천선원 법요집에서는 망갈라숫따에 대하여 행복경이라고 번역했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면 행복경이라기 보다는 축복경이라고 해야 한다. 이는 경의 제목이 빠알리어로 망갈라(magala)인 것에서 확인된다.

 

망갈라라는 말은 ‘auspicious’ 또는 ‘lucky’의 뜻이다. 행복을 뜻하는 수카(sukha)의 의미도 있지만 상서로움또는 행운의 뜻이 강하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현재의 행복뿐만 아니라 미래의 행복에 대한 것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는 다름 아닌 축복이다.

 

망갈라숫따가 축복경인 이유는 경의 마지막 게송에서도 확인된다. 마지막 게송을보면 모든 것에서 번영하리니(Sabbattha sotthi gacchanti)”(Stn.269)라고 되어 있다. 여기서 ‘sotthi’‘well-being; safety; blessing’의 의미이다. 이는 현재의 행복뿐만 아니라 미래의 행복도 기원하는 것이다. 이는 다름 아닌 축복이다. 마치 결혼식장에서 신랑신부에게 축복의 말을 전하는 것과 같다.

 

결혼식장에서 신랑과 신부는 최고로 행복한 사람들이다. 그런데 하객들은 모두 두 사람에 대하여 결혼을 축하합니다.”라고 말한다. 이는 현재의 행복뿐만 아니라 미래 행복도 바라는 축복의 말이다. 또한 미래 번영에 대한 것이다. 현재 선업을 지어 행복하면 미래 역시 행운이 따를 것이라는 가르침이다. 이는 망갈라경 마지막 게송에서이러한 방법으로 그 길을 따르면, 어디서든 실패하지 아니하고 모든 곳에서 번영하리니, 이것이야말로 축복입니다.”(Stn.269)라고 되어 있는 것에서 알 수 있다.

 

망갈라숫따는 행복경이라고 번역하기 보다는 축복경으로 번역하는 것이 더 맞는 것 같다. 한역으로는 길상경(吉祥經)’이라고 하고, 영역으로는 ‘blessing’이라고 번역한다.

 

망갈라숫따 38가지 행복과 십복업사

 

먼저 망갈라숫따를 독송했다. 사야도는 빠알리 원문을 특유의 운율로 낭송하면 대중들은 한글로 번역된 것을 낭송했다. 이와 같은 망갈라숫따에 대하여 세간의 행복과 출세간의 행복이 모두 들어 있다고 했다. 이는 보시, 지계, 수행으로 크게 요약된다.

 

절에 가면 스님들은 보시공덕을 강조한다. 보시하면 복을 많이 받음을 말한다. 또 절에 가면 열심히 기도하세요.”라는 말을 많이 듣는다. 열심히 기도하고 보시를 많이 하면 선업공덕이 됨을 말한다. 그러나 보시와 기도에 그쳐서는 안될 것이다. 부처님의 더도 말고 덜도 않은 가르침을 따른다면 보시뿐만 아니라 지계도 해야 하고, 더 나아가 수행도 해야 한다. 이는 경전적 근거가 있다.

 

상윳따니까야 마하나마의 경’(S55.37)을 보면 부처님과 재가신자 마하나마와의 대화가 있다. 마하나마는 부처님에게 재가신자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묻는다. 이에 부처님은 마하나마여, 부처님에게 귀의하고 가르침에 귀의하고 참모임에 귀의합니다. 마하나마여, 이렇게 해서 재가신자가 됩니다.”라고 말씀했다. 이로 알 수 있는 것은 불교인이 되는 첫번째 조건은 삼보를 귀의처, 의지처, 피난처로 삼는 것임을 알 수 있다.

 

불교인들은 삼보에 귀의함으로써 불자가 된다. 그 다음은 무엇일까?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오계를 말씀하신다. 그 다음은 믿음, 보시, 지혜에 대하여 차례로 말씀했다. 이는 오늘날 한국불교에서 보시와 기도만 강조하는 것과 다르다. 특히 지혜에 대하여 마하나마여, 세상에 재가신자는 발생과 소멸에 대한 고귀한 통찰력 있는 지혜를 갖추고 올바른 괴로움의 소멸로 이끄는 지혜를 성취합니다. 마하나마여, 이렇게 재가신자가 지혜를 성취합니다.”라고 말씀하신 것에서도 알 수 있다.

 

사야도는 망갈라숫따에 38가지 행복이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십선업에 대해서도 말했다. 들어 보니 십복업사에 대한 것이다. 참고로 십복업사는 1)보시(dana),2) (sila), 3)수행(bhavana),4)공경(apacayana), 5)작무(veyyavacca), 6)공덕의 시여(pattidana), 7)공덕의 수희(pattanumodana), 8)문법(聞法, dhammadavana), 9)설법(dhammadesana), 10)견정업(見正業, ditthijjukamma)에 대한 것이다.

 

십복업사를 보면 보시, 지계, 수행에서 더 확장된 것이다. 십복업사는 재가불자들을 교계하기 위하여 후대 성립된 것이다. 세간의 행복을 가져오는 열 가지 공덕행(puñña)’에 대한 것이다. 열 가지 내용을 보면 십악업과 반대되는 개념으로 되어 있다. 그래서 사야도는 십선행이라고 했을 것이다.

 

모든 행복의 출발점은

 

망갈라숫따 38가지 행복에서 가장 먼저 나오는 것은 악우에 대한 것이다. 이는 어리석은 자와 사귀지 않으며(Asevanā ca bālāna)”(Stn.259)라고 표현된다.

 

부처님은 왜 가장 먼저 어리석은 자와 사귀지 말라고 했을까? 그것은 진리의 길에 가는데 있어서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는 다름 아닌 도반의 중요성을 말한다. 이어지는 구절에서 슬기로운 님을 섬기고(paṇḍitānañca sevanā)”라고 되어 있는 것에서 알 수 있다.

 

망갈라숫따에서는 어리석은 자를 멀리하고 지혜로운 자를 사귀어야 함을 말한다. 그런데 이런 가르침은 한국불교에서 스님들에게 가장 먼저 가르치는 초발심자경문에서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초발심자경문에서 가장 처음 나오는 가르침 역시 악우에 대한 것이다. 자경문을 보면 무릇 부처님의 가르침에 귀의하고자 처음으로 마음 먹은 이(초발심자)는 모름지기 나쁜 벗(계율을 지키지 않고 세속적 욕망을 즐기는 이)을 멀리하여야 한다. (夫初人之心 須遠離惡友)”라고 했다. 그리고 이어서 반면 계행이 청정하고 지혜가 밝은 이를 가까이 하여야 한다 (親近賢善)”라고 했다. 이 말은 망갈라숫따에서 가장 처음에 언급되어 있는 어리석은 자와 사귀지 않으며, 슬기로운 님을 섬기며(Asevanā ca bālāna, paṇḍitānañca sevanā)”(Stn.259)라는 말과 정확하게 일치한다.

 

모든 행복의 출발점은 어리석은 자를 만나지 않는 것이다. 만약 어리석은 자를 만나서 사귀다면 불행이 시작될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이에 대하여 사야도는 어리석은 사람을 만나지 말기를!”그리고 관심갖지 않기를!”라고 말했다.

 

어리석은 자를 만나서 사귀게 되면 나쁜 길로 갈 수밖에 없다. 왜 그런가? 이에 대하여 사야도는 성냄이 있으면 성냄이 있는 자와 만납니다.”라고 했다. 욕망이 있는 자는 욕망이 있는 자와 만납니다.”라고 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끼리끼리 어울림을 말한다. 유유상종(類類相從)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저열한 경향을 가진 자들은 저열한 경향을 가진 자들과 관계를 맺고 그들과 어울린다.”(S14.16)라고 했다.

 

선업이 알아차림이고, 알아차림이 선업입니다.”

 

사야도의 한국말은 유창하기는 하지만 한계도 있다. 그럼에도 잘 들어보면 전에 들어 보지 못한 깊은 내용이 있다. 이는 주석과 복주석이 발달한 미얀마 불교의 영향 때문일 것이다. 또한 교학과 수행이 일치하는 불교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 것 중의 하나가 선업과 알아차림에 대한 것이다.

 

사야도는 법문에서 선업이 알아차림이고, 알아차림이 선업입니다.”라고 말했다. 선업과 알아차림을 같은 것으로 본 것이다. 여기서 알아차림에 대하여 지혜와 결합된 것이라고 했다. 이는 다름 아닌 삼빠자나(sampajāna)’에 대한 것이다.

 

사야도는 알아차림에 대하여 분명한 앎또는 올바른 알아차림을 뜻하는 삼빠자나의 의미로 보았다. 또 알아차림 하는 것에 대하여 수행의 의미로 보았다.

 

법문을 들을 때 법문 듣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이를 잘 귀기울여 듣는다면 이는 알아차림 하는 것이기 때문에 수행이 될 수 있음을 말한다. 이런 논리를 적용하면 수행 아닌 것이 없다. 계율을 잘 지키는 것도 알아차림이 있다면 수행이 된다. 보시도 거듭하면 알아차림이 있기 때문에 수행이 된다.

 

무엇이든지 알아차림이 있으면 수행이 된다. 이는 다름아닌 선업공덕이다. 그런데 모든 선업은 알아차림이 있어야 가능하다는 것이다. 알아차림 없는 선업은 있을 수 없음을 말한다.

 

지계하고 보시하는 것으로 그쳐서는 안된다. 단지 행복감만으로만 끝나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망갈라숫따에 있는 38가지 행복은 알아차림이 있을 때 행복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선업공덕이 된다고 했다. 알아차림이 있을 때 선업이 되고, 선업은 알아차림으로 가능하기 때문에 선업이 알아차림이고, 알아차림이 선업입니다.”라고 말한 것이다.

 

사야도의 문답식 법문과 반복학습

 

사야도는 문답식으로 법문을 진행했다. 망갈라숫따를 법문하면서 몇 가지 선행이 있어요?”라고 물어 보는 것이다. 그러면 대중은 서른 여덟 가지요.”라고 말한다. 이런 문답식은 부처님도 즐겨하신 것이다.

 

부처님은 수행승들이여, 어떻게 생각하는가? 물질은 영원한가 무상한가?”(S22.59)라는 식으로 법문했다. 이에 수행승들은 세존이시여, 무상합니다.”라고 말한다. 이와 같은 문답식 법문은 일방적으로 전달하는 것과 다르다.

 

부처님은 제자들과 문답식으로 주고받았다. 부처님은 물질에 대하여 결론적으로어떠한 물질이 과거에 속하든 미래에 속하든 현재에 속하든, 내적이든, 외적이든, 거칠든 미세하든, 저열하든 탁월하든, 멀리 있든 가까이 있든, 그 모든 물질은 이와 같이 이것은 나의 것이 아니고, 이것은 내가 아니고, 이것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라고 있는 그대로 올바른 지혜로 관찰해야 한다.”(S22.59)라고 말씀하셨다.

 

사야도의 법문을 보면 반복학습식이다. 이전에 법문 했던 것을 상기하면서 문답식으로 법문하는 것이다. 왜 그럴까? 잘 잊어버리기 때문이다. 또 부처님 가르침이 심오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했던 말을 또 하는 식으로 반복하는 것이다. 그런데 부처님 가르침은 아무리 반복해도 질리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들을 때마다 새로운 것이다. 이는 가르침이 아직 체득되지 않은 이유도 있을 것이다.

 

현자(paṇḍitā)를 섬겨야 하는 이유

 

사야도는 이번 법회에서 망갈라숫따를 문답식으로 법문했다. 38가지 행복에서 첫번째는 어리석은 사람을 만나지 않는 것이다. 다음으로 현명한 자를 만나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있는 어리석은 자와 사귀지 않으며, 슬기로운 님을 섬기며”(Stn.259)라고 했다. 어리석은 자를 멀리하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것이다. 그렇다면 슬기로운 님(paṇḍitā)을 섬겨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는 다름 아닌 최상의 모임과 관련이 있다. 부처님은 최상의 모임과 관련하여 이렇게 말씀했다.

 

 

수행승들이여, 최상의 모임이란 무엇인가? 그 모임 가운데 장로수행승이 사치하지 않고, 태만하지 않고 탈선을 멍에로 꺼리고 멀리 여읨을 선호하고 도달하지 못한 것에 도달하고, 성취하지 못한 것을 성취하고, 실현하지 못한 것을 실현시키기 위해 열심히 정진한다. 그의 후계자도 자각적으로 본 것을 따라 한다. 그들도 사치하지 않고 태만하지 않고 탈선을 멍에로 꺼리고 멀리 여읨을 선호하고 도달하지 못한 것에 도달하고, 성취하지 못한 것을 성취하고, 실현하지 못한 것을 실현시키기 위해 열심히 정진한다. 수행승들이여, 이것을 최상의 모임이라고 한다.”(A3.93)

 

 

최상의 모임은 다름 아닌 정진의 모임이다. 정진하는 모임에서는 잘 하는 사람을 따라 하려는 경향이 있다. 수행을 열심히 하는 사람을 보고서 그와 같이 따라 하려는 것이다. 그래서 모범이 될 만한 사람을 따라 하며 그와 같이 되려 하는 것이다. 현자를 섬겨야 하는 이유에 해당된다.

 

향천선원 법당 보리수

 

서울 도심에 이런 여법한 선원이 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더구나 테라와다 불교도량이다. 이는 선원장의 원력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머리가 허옅게 센 보살님이 선원장이다. 들은 바에 따르면 건물전체가 선원장 소유라고 한다. 보니 5층짜리 건물에서 4층과 5층을 선원으로 사용하고 있다.

 

법당은 5층에 있다. 특이하게도 보리수가 보였다. 인도나 미얀마 등 아열대 지방에서 자라는 보리수는 한국과 같은 기후대에서는 자라지 못한다. 겨울에 혹한을 견뎌내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나 실내에서 키우면 가능할 것이다.

 

 

몇 년 전 보리수를 하나 선물로 받아 키웠다. 이학종 선생으로부터 건네받은 것이다. 처음에는 잘 자랐다. 그러나 어느 때부터 잎파리가 떨어지며 시들어 버렸다. 보리수 재배에 실패한 것이다. 향천선원 법당 보리수를 보니 만약 잘 키웠으면 이 정도 자랐을 것으로 생각해 본다.

 

정진하는 모임은 최상의 모임

 

오늘날 일요일은 쉬는 날이다. 대부분 행사는 토요일에 몰려 있다. 일요일은 편히 쉬는 날이기도 하지만 종교행사가 있는 날이기도 하다. 기독교에서는 일요일 교회 가는 날이기도 하다. 그러나 불교의 경우 절이 대부분 산중에 있기 때문에 큰 마음먹지 않는 한 가기가 쉽지 않다.

 

도시에서 절 보기가 쉽지 않다. 그것도 부처님의 근본 가르침을 전하는 여법한 절은 더욱더 보기 힘들다. 이런 때 향천선원과 같은 부처님 근본 가르침을 전하는 선원이 있다는 것은 좀처럼 보기 어렵다. 더구나 미얀마 사야도가 직접 지도하고 있다. 그것도 유창한 한국말이다.

 

모임에 모범적인 장로가 있다면 장로처럼 되고자 하는 것이다. 훌륭한 스님이 있다면 스님처럼 되고자 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 사람과 되기 위해서 열심히 정진한다.”라고 했다. 후배는 선배가 정진하는 것을 보고서 후계자도 자각적으로 본 것을 따라 한다.”라고 했다. 이런 모임이 정진하는 모임이다. 정진하는 모임이 최상의 모임이다. 향천선원에서 그런 모습을 보았다.

 

 

2020-10-19

담마다사 이병욱